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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그리지 않아도 그릴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미술 수업'을 읽고 생각해 본 미술 교육에 대하여

등록 2025.01.07 08:43수정 2025.01.07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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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흥미를 느낀 건 중학교 2학년 미술 시간이었다. 자신의 손을 데생하는 소묘 기초 시간이었는데 그림의 형태가 실제와 제법 비슷하여 미술 선생님께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다. 칭찬을 듣자 그림을 그리는 게 재미있게 느껴졌다.

내가 사물의 형태를 인지하고 묘사하는 능력이 나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다. 명암을 표현하는 건 능숙하지 않았지만 선을 더해 갈수록 점점 그림이 완성도를 갖춰가는 게 신기했다. 그러나 흥미는 오래가지 못했다. 드로잉이 끝나고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채색에는 재능이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수채화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적절한 물 조절을 통해 원하는 느낌의 색채를 구현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여러 번 덧칠을 해버렸고, 잘해 보려고 할수록 그림은 얼룩덜룩 형편없어졌다. 미술 선생님은 채색에 대한 구체적인 교육은 하지 않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미술 시간은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다. 아마 미술에 재능과 관심이 있는 아이들은 이미 학원을 다니며 사교육을 받고 있으리라 여기셨던 듯하다. 그렇다고 선생님께 방법을 물어볼 정도의 용기도 없었다. 지금이라면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을 텐데 그때 나는 수줍음 많은 사춘기 소녀에 불과했다.

수채화를 그리는 데 좌절을 맛보고는 결국 '나는 그림에 소질이 없구나' 하고는 포기해 버렸다. 그림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들의 영역으로만 생각하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책 <세상의 모든 미술 수업>을 빌려 읽다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내가 학창 시절에 미술을 조금 재미있게 배울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함께 잊고 있던 그림에 대한 갈망이 살아났다.

 책 ‘세상의 모든 미술 수업’
책 ‘세상의 모든 미술 수업’김지영

<세상의 모든 미술 수업>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님, 미술사학자인 목수현 우정아 선생님, 자연을 활용한 미술 교육을 하는 이성원 교사님, 미술 치료 연구자인 주리애 교수님, 김중석 화가님 등 여러 교육자분들의 다양한 미술교육이 나온다. 그들의 미술 교육은 편견이 없다. 미술을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여기지 않는다. 보다 많은 이들이 미술을 즐기고 그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도록 도울 뿐이다.


유홍준 교수님은 예술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이 한국 미술사를 배울 수 있도록 여러 대안 공간을 다니며 강의를 하셨다. 한국 미술사 수업을 정식 교과목이 아닌 초청 강연으로 들을 수밖에 없던 시대였다. 사람들은 교수님을 '거리의 미술사가'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강좌 중 문화유산 답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때 경험을 토대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책이 나왔다. '시각의 혁명 없이는 손의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프랑스 미술평론가 알랭 주프루아의 격언을 토대로 미술 이론에 갈증을 느끼던 많은 학생들에게 단비같은 교육을 실천하신 것이었다.


돌멩이와 부러진 나뭇가지, 움직이는 지렁이로 만든 미술 작품, 서산의 이성원 미술 선생님은 자연을 캔버스 삼아 마음을 표현하는 '자연 미술'의 즐거움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하얀 머리카락을 민들레꽃 같다며 후 불기도 하고 건물의 시멘트 벽에 동그랗게 난 구멍에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워 뻥 뚫린 가슴을 표현하기도 했다. 자연 미술 시간엔 못 그릴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자연 그 자체가 모두 미술 재료가 되기에 따로 준비물을 챙겨야 하는 부담도 없었다. 아이들은 사각의 교실을 벗어나 즐겁게 창의성을 표현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2019년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라는, 할머니들의 그림과 글을 엮은 책이 나왔다. 이 책은 순천의 그림책 도서관에서 실시된 그림 수업에서 시작되었다. 김중석 화가님은 어느날 순천의 할머니들에게 그림 수업을 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할머니들은 그림 수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글도 모르는데 무슨 그림을 그리냐는 것이었다. 화가님은 할머니들이 최대한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형을 이용해 사람을 그리는 방법을 선보였고, 할머니들은 이런 과정을 신기해하며 그림 그리는 즐거움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할머니들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주변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 그리는 재미에 밤을 꼬박 새우는 분도 있었다. 기술적으로 뛰어나진 않았지만 할머니들의 그림은 마음을 움직이는 데가 있었다. 순수하고 진솔했다. 개성이 넘쳤다.

SNS를 통해 할머니들의 그림은 펴져 나갔고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인기에 힘입어 서울에서 전시회가 열릴 정도였다. 할머니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그림 그리는 풍요로운 삶의 기쁨도 알게 되었다. 그림이 할머니들의 삶을 변화시킨 것이었다.

 퇴근 후, 벽에 걸 나뭇잎 그림을 2절지에 색연필로 그리기 시작했다
퇴근 후, 벽에 걸 나뭇잎 그림을 2절지에 색연필로 그리기 시작했다김지영

아이들은 종이만 주어지면 그 위에 무언가를 끄적인다. 그저 그리고 싶은 마음만으로도 그릴 수 있다. 그런데 청소년기를 거치며 아이들은 그림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 잘 그리지 못 할까 봐 안 좋은 평가를 받을까 봐 걱정하게 된다. 그런 두려움을 해소하고 그림에 흥미를 유발하는 미술 교육이 이뤄진다면 우리 안에 잠재워 있던 예술성을 불러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너무 늦은 것은 없다. 76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무려 1600여 점의 그림을 남긴 미국의 화가 안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Anna Mary Robertson Moses) 할머니처럼. 순천의 할머니 화가님들처럼 말이다. <세상의 모든 미술 수업>을 읽으며 바라게 된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미술의 매력과 그림 그리는 즐거움을 알 수 있었으면 하고. 더 나아가 조금 더 일찍 그런 교육이 이뤄질 수 있었으면 하고.

예술성을 발휘하며 창의적으로 사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행복하게 산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미술을 통해 내 안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일상의 스트레스 지수를 낮춘다. 다각도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며 주변 사회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한다. 창의성을 발휘하고 발전시킨다.

창의성은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살게 한다. 미술교육이 즐거워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덧, 당신에게서 나온 모든 창작물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자기 안에 예술가가 살아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종류의 일을 하든 독창적이고 예리하고 대담하고 자기 표현적인 생명체로 화한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존재가 된다. 그는 소란을 일으키고, 뒤엎고, 일깨우고, 더 깊은 지혜를 향한 길을 열어 보이는 사람이다. 예술가가 아닌 이들이 책을 그만 덮으려고 하는 지점에서, 그 사람은 책장을 열어 아직 읽을 페이지가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버트 헨리, 화가'

세상의 모든 미술 수업

유홍준, 목수현, 우정아, 이성원, 김이삭, 주리애, 송혜승, 김중석, 이재경, 노길상 (지은이),
창비교육, 2024


#책 #서평 #북리뷰 #세상의모든미술수업 #미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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