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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두 개 얻자" 남편의 제안에 깊어지는 고민

[태국 치앙라이에서 겨울 보내기] 결혼기념일을 맞아 생각해보는 '부부생활'

등록 2025.01.07 09:42수정 2025.01.07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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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궐 같은 집을 두고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한 칸짜리 방에서 옹색하게 지내자니 절로 이 소리가 나온다. 편리하고 안락한 내 집을 놔두고 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농담들을 한다. 태국 치앙라이에서 겨울을 보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우리는 현재 한 칸짜리 방을 얻어 지내고 있다. 방은 꽤 크고 넓어서 답답한 느낌은 없지만 그래도 방 하나에서 부부가 같이 지내다보니 갑갑할 때가 더러 있다. 한국에서는 각자의 시간과 공간을 누렸는데 외국에서는 거의 24시간을 붙어 있다시피 한다. 그러다 보니 한 몸처럼 움직일 때가 많고, 자연히 혼자만의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태국 치앙라이에서 겨울을 보내는 사람들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지내니 좋은 점도 있다. 결혼 생활이 오래 되다 보니 서로에게 편해져서 배우자에 대한 마음이 일상화 되었다. 그랬는데 외국에서는 서로에 대한 마음이 남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와 달리 외국에서는 온전히 우리 둘뿐인 것이나 마찬가지니 서로가 각별해진다. 게다가 24시간을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하니 구혼 부부들에게는 신혼이 다시 온 듯 살뜰한 마음도 든다.

 태국 치앙라이의 '쏨뎃 프라씨나카린드라 정원'입니다. '프라씨나카린드라'는 현 왕의 할머니로 푸미폰 전 왕의 어머니입니다. 한국여행자들은 편의상 '왕비정원'이라고 부릅니다.
태국 치앙라이의 '쏨뎃 프라씨나카린드라 정원'입니다. '프라씨나카린드라'는 현 왕의 할머니로 푸미폰 전 왕의 어머니입니다. 한국여행자들은 편의상 '왕비정원'이라고 부릅니다. 이승숙

 태국 치앙라이에 있는 일명 '왕비정원'.
태국 치앙라이에 있는 일명 '왕비정원'. 이승숙

그러나 불편한 점도 그에 못지않게 있다. 내 시간과 공간이 없다는 게 가장 불편하다. 어디를 가도 같이 가고 무엇을 해도 같이 한다. 둘이 한 몸처럼 세트로 움직이니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가 없다. 각자의 시간을 누리고 싶을 때도 있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다.

오래 함께 산 부부라고 어찌 다 맞을 수가 있을까. 잠을 자는 시간대가 다른 사람도 있고 일어나는 시간대가 달라서 불편한 경우도 있다. 식성이 달라서 식당에 갔을 때 음식 고르기가 어렵다는 사람도 있다. 결혼해서 같이 살며 서로 닮아갔지만 그래도 본질적인 다름은 바꿀 수가 없다.


구혼도 신혼이 되는 치앙라이 생활

우리 부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잠자는 시간대가 서로 달라 늘 티격태격했다. 남편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데 반해 나는 늦게 잠을 잔다. 그러니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대도 많이 달랐다. 남편은 새벽 5시도 안 되어서 일어나는데 나는 그 시간대에는 깊이 잠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버릇은 태국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9시만 되면 잠자리에 드는 남편과 달리 나는 한밤중까지 안 자고 놀았다. 그러니 서로 불편했다. 한 사람은 불을 껐으면 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불을 켜놔야 했으니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밤마다 벌였다.

 태국 치앙라이 일명 '왕비정원'.
태국 치앙라이 일명 '왕비정원'.이승숙

어느 날 남편이 그랬다.

"방, 두 개 얻자. 그게 서로 좋을 것 같아."

잠자는 시간대가 달라 불편하니 차라리 방을 두 개 얻자고 했다. 태국 치앙라이에서 겨울을 보내기 위해 온 지 열흘도 안 됐을 때 일이었다. 그 말을 듣자 화가 났다. 남편은 좋은 의도로 한 말이었지만 서운했다.

'아니, 방 두 개를 얻자고? 나랑 같이 있는 게 싫다는 거야, 뭐야? 그리고 남들이 뭐라고 하겠어? 부부가 방을 두 개 얻어 지낸다면 얼마나 말들이 많을 건가 말이야.'

같은 숙소에서 이웃으로 지내는 한국 분들이 말을 할 것 같았다. 저 집 부부는 이상하다고, 어떻게 한 방에서 지내지 않고 따로 지내느냐고 분명 말들을 할 것 같았다. 그에 더해 걸리는 게 또 하나 더 있었다. 뒷담화 쯤이야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그보다 '돈'이 더 든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태국 치앙라이 '르 메르디앙 호텔' 정원입니다.
태국 치앙라이 '르 메르디앙 호텔' 정원입니다. 박상훈

방을 두 개 얻는다면 안 써도 될 돈을 쓰는 셈이다. 좀 편하자고 방을 두 개 얻으면 당연히 방값으로 두 배나 되는 돈을 지출해야 한다.

사실 방 값이라고 해봐야 크게 비싸지는 않다. 태국 치앙라이는 물가가 싸서 지금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의 경우 방 하나를 한 달 빌리는 데 우리나라 돈으로 20만 원 정도 밖에 하지 않는다. 그 정도 쯤이면 방을 두 개 얻어도 괜찮겠다 싶지만 그래도 가외의 돈이 더 들어간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남편의 제안을 단 칼에 내쳤다.

"무슨 방을 두 개씩이나 얻자고 하는 거야? 왜 쓸데없는 데 돈 쓰려고 해."

그렇게 쏘아 붙였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자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돈'을 더 쓴다는 그 생각을 지우자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은 나만의 공간을 가진다는 게 좋았다. 그래서 남편에게 말했다. '괜찮은 생각 같다'고, '방 두 개 얻는 것 한 번 생각해보자'고 말했다.

부부는 일심동체, 그러나...

세상은 '부부'에게 요구하는 틀이 있다. '부부는 일심동체'여야 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두 사람이 마치 하나의 존재처럼 같이 행동하고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말이 품고 있는 뜻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난의 손가락질을 한다. 부부는 이래야 한다는 정답이 있기라도 한 양 우리 사회는 무언의 압력을 부부에게 가한다.

 치앙라이 생활 체육 시설에서 '우드 볼'을 즐기는 부부. 함께 한 세월만큼 아름다운 노년의 부부입니다.
치앙라이 생활 체육 시설에서 '우드 볼'을 즐기는 부부. 함께 한 세월만큼 아름다운 노년의 부부입니다.이승숙

부부는 일심동체인 것처럼 서로를 생각해야 하겠지만 그보다는 각자가 서로 다른 존재임을 자각하는 게 우선이다. 남편의 의견을 무조건적으로 따르기를 요구하던 시대는 갔다. 지금은 서로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시대다.

일심동체는 이상적인 관계일 뿐 실제로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개별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는 부부상이다. 각자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 맞춰 조화롭게 사는 것이 현명한 부부의 모습일 것이다.

서로 존중하며 조화롭게 사는 삶

외국에서 방 하나를 얻어 두세 달 동안 온전히 같이 지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일 수 있다. 각자 바쁘게 지냈던 생활을 접고 고요히 서로에게 집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따로 또 같이 지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함께 할 때는 서로에게 집중하지만 고요히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도 좋을 것 같다.

 큰 나무처럼 서로에게 넉넉하기, 태국 치앙라이에서 배우는 삶입니다.
큰 나무처럼 서로에게 넉넉하기, 태국 치앙라이에서 배우는 삶입니다. 이승숙

밤이 깊어 사방이 고요하다. 주방의 식탁에 앉아 글을 쓰는 지금 이 시각, 자정을 넘어 01시가 다 되었다. 남편의 숙면에 방해가 될까 봐 노트북의 자판을 조심스럽게 누른다. 그래도 새어나가는 불빛은 막을 수가 없다.

방을 두 개 얻자고 말은 했지만 실제로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지 남편은 그 후로는 별 말이 없다. 대신 내가 그 점에 대해 생각하고 숙고한다. 방을 두 개 얻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두 개 얻는 게 좋을 것도 같고 또 저렇게 생각하면 괜한 짓을 하는 것 같이도 느껴진다.

새해가 된 지도 이틀이 지났다. 자정이 넘었으니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지난 3일은 우리가 부부의 연을 맺은 지 38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 긴 날들을 우리는 잘 맞춰가며 살았구나. 새삼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동남아겨울살이 #태국치앙라이 #치앙라이 #부부 #결혼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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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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