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정유년 4월 1일자 초고본 국가유산청 현충사 난중일기, 소유자 최순선, 불허복제
최순선
보통 사람들은 일상에서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한다. 어려운 일을 처리하는 것은 그의 능력이고 그의 인격을 가늠할 수 있는 판단기준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타고난 성격과 평소의 수양이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에 보면, "군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천명(天命)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것을 행하고 요행을 바란다.(君子居易以俟命 小人行險以徼幸)"고 하였다. 여기서 말한 군자처럼 뜻밖의 일을 느긋하게 운명으로 돌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순신이 위대한 것은 보통 사람이 미칠 수 없는 생각으로 남다른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정유재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하 요시라의 모함을 받고 1597년 3월 4일 옥에 갇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초연하게 말을 하였다.
"죽고 삶은 명에 달렸으니 죽어야 한다면 죽을 것이다.(死生有命 死當死耳)"
이 말에는 생사에 연연해하지 않고 운명대로 하겠다는 이순신의 사생관이 담겨 있다. 이순신은 전쟁 중 일본군을 정벌하느라 각고의 노력을 하며 한 점 부끄럼 없이 최선을 다했기에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다. 선조가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라고 이순신에게 출동명령을 내렸지만, 이순신은 일본군의 계략임을 알고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았다. 작전상 출동을 유보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왕명거역죄로 간주되어 조정에서는 극형을 논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대신들의 신원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인물들은 정탁, 이원익, 이항복, 이정형 등이다. 유성룡은 이순신을 교체하면 한산도를 지킬 수 없다고 선조에게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네 차례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후 선조가 특별사면을 하여 3월 4일에 투옥되었다가 4월 1일에 27일 만에 나왔는데, 석방된 날부터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는 8월 3일까지 120일간의 백의종군의 여정에 올랐다.
왕명을 받고도 출동하지 않은 이순신의 행위에 대해 병법으로 한번 살펴보겠다. <손자병법> '지형'에, "전쟁의 원칙에 (상황이) 이길 수 없다면 임금이 반드시 싸우라고 명해도 싸우지 않는 것이 맞다.(戰道不勝, 主曰必戰, 無戰可也.)"고 하였다. 이에 대해 송나라 병가 장예(張預)는 "왕명을 따르다가 패하느니 규정을 어기고서 성공하는 것이 낫다"고 주석하였다. 명대 병법가 조본학(趙本學)은 "장수는 밖에서 임무를 맡고 유리함이 자기에게 있어 싸울 수 있으면 싸우고, 싸울 수 없으면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왕이 명령을 내려도 전쟁하러 나아갈지에 대한 판단은 지휘권이 있는 장수가 하는 것이고, 병법상 상황이 불리하면 출동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역대 병가들의 이론을 종합해 보면, 결국 이순신의 판단은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억울하게 죄인의 몸이 되어 남행길에 올라 곧장 아산으로 갔다. 아산에 머무는 동안 선영에 들러 곡을 하고, 조상의 사당에 들러 참배하고 원행(遠行)하는 사유를 고유(告由)하였다. 4월 13일 여수에서 출발하여 아산으로 오다가 선상에서 객사한 모친의 시신을 아산 해암리 게바위(蟹巖)에서 맞이하였다. 시신을 본가에 운구하여 빈소를 차린 뒤 이순신은 하직을 고하였다.
어머니의 영연(靈筵)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으며 곡하였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정이 있겠는가. 빨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조카 뇌(蕾)의 집에 가서 조상의 사당 앞에서 하직을 아뢰었다. 금곡(金谷)의 강 선전관(姜宣傳官)(강희증)의 집 앞에 당도하니, 강정(姜晶), 강영수(姜永壽)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을 하였다.
- 정유년 4월 19일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노승석 역주)
금곡(金谷)은 아산 배방읍 신흥리에 있는 계곡 일대로 이를 감태기마을이라고 한다. 여기에 있는 진주강씨 집성촌에는 강정과 강영수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이곳은 현재 이순신이 말에서 내려 곡한 유적지로 알려졌는데, 수차례 현장 답사하여 위치를 비정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이곳에 있던 강희증의 집앞에서 이순신은 강정과 강영수에게 조문의 답례를 표하고 마침내 남행의 길을 떠났다.
이순신은 극형을 당할 위기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현실에 순응하는 자세로 임하였다. 그에게는 꿈이 현실로 이루어질 만큼 그의 정신력은 고도로 정제되어 있었기에, 남다른 예지력으로 적의 계략이 허구임을 알아내어 지휘관의 책임을 다하였다. 그럼에도 죄인이 되어 백의종군하는 중에 모친상을 당하는 악순환의 상황 속에서 예법을 따라 신하된 자, 자식된 자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인고(忍苦)의 노력이 있었기에 끝내 국난극복의 대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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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자문위원(난중일기). 역사고증전문가.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 여해고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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