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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복 위에 브래지어 입은 할머니가 꺼낸 말

여러 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 모두 달라서 낭만적인 수영장

등록 2025.01.23 12:05수정 2025.01.2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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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다음은 2이지만 2 다음이 1이라는 것이 꼭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모든 차량이 우측으로 운행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사람들은 모두 다양하다고 말들 하지만, 실제 그러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학습과 경험이 필요하다. 한겨울에도 봄같이 포근한 날이 있고, 따뜻한 봄날에도 우박, 눈보라 치는 날도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겪어봐야만 아는 것들이다.

그중 남자들은 평생 가도 모를 경험이 하나 있다. 바로 브래지어다. 개성에 따라 디자인도 다양하고, 소재도 각각이다. 노브라를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체형보정에 대한 의견도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착용 시 어느 정도의 답답함은 있다. 그래서 24시간 착용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밤에는 입은 듯 안 입은 듯 훌렁하게 '소박한 자유'를 누린다.


내복 위에 브래지어 한 할머니

내복 위에 브래지어를 입고 탈의실에서 어르신은 내복 위로 브래지어를 하신다. 그리고는 당신이 왜 그렇게 입으셨는지 먼저 설명하신다. 뭐 어떤가. 슈퍼맨도 빨강 팬티를 파란색 쫄쫄이 바지 위로 입는데 말이다.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서 AI를 이용해 생성한 이미지.
내복 위에 브래지어를 입고탈의실에서 어르신은 내복 위로 브래지어를 하신다. 그리고는 당신이 왜 그렇게 입으셨는지 먼저 설명하신다. 뭐 어떤가. 슈퍼맨도 빨강 팬티를 파란색 쫄쫄이 바지 위로 입는데 말이다.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서 AI를 이용해 생성한 이미지.Dalle가 생성한 이미지

수영장 탈의실에서 앞에 계신 어르신이 내복 위에 브래지어를 입고 계신다. 보는 이는 많았지만 누구도 묻거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무언의 시선이 사정없이 교차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침묵 속에 어르신이 먼저 말씀을 꺼내신다.

"젊을 때는 나도 망사 빤스도 입고 그랬는데 나이가 드니께 답답햐. 나이가 드니께 면이 최고여. 다 필요 없어."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귀신같이 우리들의 마음을 알고 어르신은 독백 극을 하셨다. 탈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미소 띤 얼굴로 어르신께 집중했다.

"팔십이 되니께 지방이 다 빠져나가고 살이 없어지니께 뭐가 닿으면 아퍼. 나도 젊을 때는 몰렀어. 근데 나이라는 게 그렇더라고. 특히 등에 브라자 끈이 닿으면 아퍼. 그래서 보기는 안 좋아도 어쩌. 내 방식이여. 이게 나는 좋더라고. 어차피 겉옷 걸치면 안 보이잖여. 안 그랴? 하하하"


잠시 관객이 된 탈의실 사람들은 키득댔다.

"뭐 어뗘? 순서가 바뀌면. 입기만 하면 되지. 누가 열어보지도 않는데. 안 그랴?"


어르신과 같은 반 동기이신지 한 술 거드신다. 모두들 그러려니 한다. 1 다음이 2든 2 다음이 1이든 크게 중한 것은 없다. 어차피 '나란히 나란히' 있는 사이니까 말이다. 어르신은 한 술 더 떠 화장품에 대한 일장 연설도 덤으로 하신다.

"수영장을 계속 다니니께 수분 관리가 중요햐. 제주 현무암으로 만든 거라고 요즘 잘 나간다고 해서 샀는데 써 보니께 좋더라고. 나는 화장품을 이런 것을 써."

그러면서 당신의 화장품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이신다. 꽤나 멋쟁이시다. 반지, 목걸이, 팔찌까지 휘감으셨다. 브래지어때문에 촌스러운 할매로 보이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다. 뭐 어떤가. 슈퍼맨도 빨간 팬티를 파란 쫄쫄이 밖으로 입는데 말이다. 옆에서 듣던 한 어르신이 한 마디 툭 뱉으신다.

"구찮게 뭐하러 차고 다녀. 나는 안 햐. 얼마나 편한지 몰러. 왜 햐?"
"따뜻햐."
".........."
"아침에 수영장 올라면 버스정류장서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알어? 하는 거 하고 안 하는 거하고 얼마나 다른데 그랴. 얼마나 따뜻한지 몰러."

물속, 누구에게나 평등한 공간

 누구에게나 평등해질 수 있는 공간, 수영장.
누구에게나 평등해질 수 있는 공간, 수영장.artemverbo on Unsplash

서로 모르는 사람들인데도 화기애애하다. 어쩌면 이것이 수영장이라는 공간이 주는 매력은 아닌지도 모른다. 수영장에 들어갈 때 입는 복장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수영모, 물안경, 수영복. 물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다. 밖에서 티 나게 보이는 옷도 없고, 여성들은 노메이컵이다. 물에서 굳이 거죽을 들여다보는 사람도 없다. 브랜드라고 해봐야 거기서 거기고, 모피코트 입고 입수하는 사람도 없다. 누구에게나 평등해질 수 있는 공간, 바로 이곳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일까. 사람들 표정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환하다. 80 넘은 어르신도 천진난만한 아기처럼 변하게 하는 이곳. 마치,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저렇게 티 하나 없이 맑은 모습으로 양수 안을 헤엄쳤겠지 싶다. 물속에서 첨벙거리며 낯선 사람과도 쉽게 인사를 나눌 수 있다. 동작이 잘 안 되면 서로 도움을 주기도 한다.

금산군 읍내에는 60여 평 규모의 작은 수영장이 있다. 25m 길이의 레인 네 개, 침탕, 기폭탕 그리고 어린이 수영장이 있다. 언제 가보더라도 가장 왼쪽은 어르신, 가장 오른쪽은 어린이나 개인 강습용으로 쓰인다.

좌측 레인의 어르신들은 수영 목적보다는 걷기 목적으로 오신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조금 첨벙거리다 줄지어서 레인을 따라 계속 걷거나 물에서 뜀뛰기를 하신다. 물의 중력으로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으니 그런듯한데 마치 어린이들이 점핑보드에서 '콩콩' 뛰는 것 같다. 세월의 흔적이 온몸에 새겨있는 어르신들의 표정에서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큰 축복이다.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몽글해진다. 세월살이에 다리가 휘고 몸은 쪼글쪼글하고 등도 굽어 있지만, 삶의 짐을 내려놓고 수영복 한 장 입고 물에 들어오면 긴장이 다 녹아버리는 것 같다. 어린이부터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모두의 얼굴이 같은 말을 한다.

수영장보다는 좀 더 물이 따끈한 침탕과 스파에는 다양한 세대가 함께 있다. 마치 노천탕에 있는 가족 같아 보이기도 한다. 어르신들은 아이들을 보며 흐뭇해하시고, 아이들은 어르신들한테 예쁘게도 인사를 한다.

다름이 일상의 행복이 된다면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다세대가 함께하고 즐길 수 있는 공간.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다세대가 함께하고 즐길 수 있는 공간.fotofyn on Unsplash

'옷'이라는 제도를 입고 사회에 나가면 그 모습은 모두 사라진다. 목적도 위치도 다르다. 긴장은 덤이다. 경우에 따라 수영장에 들어오는 사람 중에는 목걸이, 팔찌, 반지, 귀걸이 등 온갖 귀금속을 걸치고 수영하는 사람도 간혹 있기는 하다. 그러나 물이라는 공동체 안에서는 모두가 상대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를 '감 잡을 만한' 건덕지가 없어서인지 편안해 보인다. 마치 브래지어를 벗었을 때의 편안함처럼 말이다.

물 밖에서는 세대 간 분열과 괴리감도 크다. 그러나 적어도 이 소박한 풀장 안에서만큼은 모두가 한마음이다. 질서 있게 서로 배려한다. 같이 첨벙거리며 운동하다 보면 동질감도 느낀다. 어르신들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각도 건강해진다.

내복 위로 브래지어를 입은 어르신은 편해서 좋고, 보는 이들은 할머니의 해몽에 마음 한 켠이 따끈해진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이렇게 다세대가 함께하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다름이 또 다른 일상의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또 다른 낭만은 아닐까. 60여 평짜리 작은 공간에서 피어나는 이 따뜻함이 지금 우리 사회에 번져가면 참 좋겠다. "따뜻햐" 하는 소리가 가득하게 말이다.
덧붙이는 글 옷 한 장 걷어내면 모두가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인 것을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따뜻햐", 정말 모두가 따뜻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브래지어 #내복 #수영장 #금산군 #낭만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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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있는 공간구성을 위해 어떠한 경험과 감성이 어떻게 디자인되어야 하는지 연구해왔습니다. 삶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디자인으로 풀어내는 것이 저의 과제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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