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 고3 딸의 책상에 있는 글귀지만 실천을 하지 않는 듯하다.
정건우
난 딸에게 한 번도 '공부해라'라고 잔소리를 한 적이 없다. 무관심으로 비춰질 수는 있으나, 솔직히 나도 우수한 성적을 내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나의 유전자가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다면, 그 다음 후손이 공부를 잘 할 확률이 매우 낮다는 것을 인정하는 편이다.
'심심하면 공부해'라는 말이 전부인 나의 말이 딸에게 부담이 되었다면, 잔소리로 인정 될 수 있지만, 내가 딸에게 '공부'에 대해 한 말은 그게 전부다. 환경에 따라 변화 될 수는 있겠지만 난 '공부'보다는 '건강'과 '교유관계'를 우선으로 딸에게 말한다. 그런 말이 잘못 전달되었는지 '교우관계'는 좋지만 '귀차니즘'에 빠져 의욕이 없어 보일 때가 있다.
우리 딸은 매학기마다 반 회장(우리 시절 '반장'을 '회장'이라고 부른다)에 추천이 되고는 하는데 그때마다 '귀찮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후일에 '생활기록부'에 유리하다고 아내가 그렇게 잔소리를 해댔지만, 딸의 대답은 늘 '귀찮아서 싫다'이다. 그럼에도 친구들이 뽑는 우수 학생 상장은 매번 타온다.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 '귀차니즘'을 몸소 실행하고 있는 딸을 향해 아내는 '신생아'(먹고, 자고, 놀고)라는 별명을 지어주었고, 그런 별명에도 아무런 타격감 없이 초지 일관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딸을 보고 있자면, 이게 뭔가 싶기는 하지만, 그 고집스러운 의지가 대견하다.
아내도 그런 딸에 그럭저럭 맞춰가며 살고 있었는데, 고3이 되자 정신 차려야 한다며, 생활 습관을 바꾸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쯤에서 아내 이야기를 해야겠다. 난 아내를 존경한다. 존경이라는 단어는 위인이나 성인, 선구자에게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내 현실의 삶에서 '존경'이라는 마음을 가지게 한 것은 (후일 기회가 되면 언급하겠지만) 내 친구인 J군과 아내 뿐이다.
맏딸인 아내는 어려서부터 기울어진 가계를 책임지며, 지금까지 모진세월을 이겨냈다. 고졸에 머물던 학력을 극복하기 위해 낮에는 직장을, 밤에는 서울에서 제법 인지도가 있는 야간 대학을 다니며 '형설지공'을 몸소 실천해 졸업장을 받았다.
단, 한 번의 '지각'도 스스로에게 용납되지 않으며, 야근으로 피곤한 몸으로도 집안청소를 한 번도 미루지 않는 생활 습관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가끔 직설적인 표현이 주변을 힘들게 하지만 가족을 제일 우선하며, 모른 척 챙겨주는 마음을 지닌 전형적인 '츤데레' 성격의 아내다.
딸이 고3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기는 하였지만 딸의 일상에 그렇게 크게 관여한 적은 없었다. 그런 아내였는데 아이가 고3이 되자 달라졌다.
예민해진 아내
주말이 되면 우리집은 늘 대청소를 한다. 거기에는 나름 역할이 분담되어 있다. 올해 초등학교 입학을 기다리는 늦둥이 막내는 물티슈를 들고 먼지를 닦아내고, 첫째 딸은 걸레질을 하고, 난 주로 청소기를 돌린다. 아내는 총괄 지휘의 역할을 하며, 냉장고 정리, 살림 재배치 등의 일을 담당한다.
작은 일에도 칭찬을 받는 막내 아들의 신난 물티슈질을 제외하면, 주말 아침부터 온 집안을 휘젓는 일은 여간 귀찮은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사건의 발단은 딸이 걸레질을 너무 대충한 것이다. 평소에도 모자람은 있었지만, 그날은 딸이 지나간 자리에도 먼지가 그대로 있었다. 이것을 본 아내가 한 마디를 했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딸,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던가. 이게 뭐야?"
(내 생각에 그건 맞는 말이다)
"그럼 엄마가 하던가, 고3인데 아침부터 이게 뭐야?"
(그것도 맞는 말이다. 고3이라며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
"니가 고3인데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매일 핸드폰만 보면서 무슨 고3타령이야?"
(음~ 우리딸은 진짜 심심할때만 공부를 하는 것 같다)
"엄마 집이니까. 엄마가 다 하던가."
(딸아~ 아빠 지분도 있단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럼 너도 매달 월세를 내."
(월세도 받고, 우리 은퇴 걱정은 끝인가?)
"얼마 내면 되는데?"
(그래도 서울권인데 많이 내야 되지 않을까?)
"100만 원!"
(우리 딸 용돈으로 감당이 안될 텐데...)
딸은 하던 청소를 마무리 짓지도 않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남은 청소는 나의 몫이 되어 억울하긴 하였지만, 묵묵히 걸레질을 마무리 하는데 아내의 잔소리가 나를 향했다.
"당신도 무슨 말이라도 좀 해! 고3인데 맨날 잠만 자고, 핸드폰만 보고 아무것도 안하잖아. 지금이 젤 중요한 시간인데."
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누구의 편을 들었다가는 그 분노의 화살이 나를 향할 것이라는 것을. 뜬금없이 화살이 나를 향할 때는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정말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을 새삼 떠올리고는 한다.
평화롭고 싶은 아빠입니다

▲눈아무도 손대지 않는 눈밭에 나의 소원을 적어보았다
정건우
둘의 전쟁으로 인한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잠시 휴전상태가 유지되고,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 딸의 침묵과 아침을 준비하는 아내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만 어색하게 집안에 울려 퍼졌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늦은 아침이 완성되고 밥 먹으란 소리에 온 가족이 식탁에 모였다. 평소 간소화된 주말과 달리 잘 차려진 식탁이다. LA갈비부터 된장찌개에 이런 저런 밑반찬까지.
"너 LA갈비 좋아 하잖아. 많이 먹어."
(나도 좋아하는데)
"당신 오늘 막내 좀 봐."
(???)
"(딸) 패딩 찟어져서, 쇼핑 갈 거니까. 영화도 한 편 보고 저녁 먹고 올테니 막내랑 저녁 챙겨 먹어."
퉁명스럽지만 애정이 가득한 말에 딸은 묵묵부답으로 긍정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설거지도 끝나고 두 여인이 외출 준비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데 아내와 딸의 대화가 들렸다.
"겨울인데 목이 그게 뭐야? 목도리라도 좀 해!"
"냅둬."
둘의 뒷모습을 보며 난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강아지에게 간식을 먹이고 있는 막내에게 말했다.
"아들 우리는 목욕이나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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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가장에 평범한 직장인. 현재를 살아는 이들과 생각을 나누고 공감 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은 평범한 범인(凡人). 저서로는 누구나 공감 할 수 있는 사랑,이별 그리움,그리고 일상에 대한 짧은 메세지 <시절인연>이 있다. 모래시계_ 한쪽이 비워져야 다른 한쪽이 채워지는 슬픈 운명/ 나를 비울께 너를 채워<시절인연>본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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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고3이 된 딸, 집안 분위기가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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