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바다와 사람 다 살리는 일... 사라진 잘피를 찾아서

경남 사천시 잘피 복원 현장 및 이식 후 1차 모니터링 현장 탐방

등록 2025.01.24 12:09수정 2025.01.24 15:18
0
원고료로 응원
"진짜 맛있었어. 우리 클 때 먹을 게 뭐 있겠어? 여름에 수영하면서 캐서 막 먹었지. 들쩍지근한 게 많이 먹으면 햇(혀)바닥이 새까맣게 됐어."

올해 일흔 살 넘은 경남 사천시 대포 어촌계 정강주 계장은 어릴 적 바다를 떠올리며 엷게 미소 짓는다. 당시 바다는 이곳 말로 '진지리'로 통하는 '잘피'가 지천이었다. 해마다 잘라다 퇴비로 써도 매년 또 자랐다. 개구쟁이들에겐 수영할 때 발에 걸려 귀찮기는 했지만, 먹을 게 귀했던 시절 새끼손가락 두께 잘피 몇 개만 따서 잘근잘근 씹으면 단맛도 나고 배도 덜 고파지는 고마운 존재기도 했다.

잘피가 사라졌다

바다의 보물 '잘피' 잘피는 수질 정화, 해양생물 산란과 서식지 제공뿐 아니라 탄소저감 효과로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바다의 보물 '잘피'잘피는 수질 정화, 해양생물 산란과 서식지 제공뿐 아니라 탄소저감 효과로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다.에코피스아시아

그랬던 잘피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1990년대 이후 지구적으로 매년 7%씩 잘피숲이 감소하는데, 30초마다 축구장 면적의 잘피숲이 사라진다는 보고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70년대부터 잘피 군락지의 50~70%가 사라졌다는 분석이다. 사천시 대포 연안은 10여 년 전부터 급감해 현재는 고작 0.2ha(헥타르)만 남았다고 한다.

연안 매립과 해양 오염 등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또 지구가열화(global boiling) 등에 따른 고수온 현상도 영향을 미친다. 당장 잘피숲에 살던 치어들과 산란장을 찾는 물고기가 보이지 않았다. 예전 흔했던 해삼, 멍게도 사라졌다. 정강주 계장은 "요즘 잘피가 없으니까 낚시가 잘 안돼. 자연스럽게 (잘피가) 싹 생기고 하면 참 좋은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잘피(seagrass)는 해초, 즉 '바다풀'의 통칭이다. 해조류(seaweed)와 다르다. 미역, 김과 같이 포자로 번식하는 게 해조류라면, 해초류는 바닷속에서 꽃을 피우고 씨도 맺는다. 또 잔디처럼 땅속으로 뻗은 줄기(지하경)로도 개체수를 늘린다. 여기서 땅속줄기 번식이 핵심이고, 씨앗은 일종의 '보험용'이라는 게 전문가의 설명이다.

큰 태풍이 오면 낮은 수심 연안은 바닥이 뒤집히면서 잘피 군락지가 훼손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2~3년 만에 완전 회복하는데, 바닥에 잘피 씨앗이 떨어져 있기에 가능하다. 육상 포유류가 바다로 귀환해 고래가 됐듯이, 잘피도 약 1억 년 전 외떡잎식물로 완전 진화했다가 다시 바다로 갔다는 것도 특징이다.


해양생물의 고향 잘피숲

잘피숲 복원 사업이 진행된 경남 사천시 대포항 에코피스아시아 등은 KB국민은행과 함께 경남 사천시 대포항 인근 지역에서 2차 바다숲 복원 활동을 진행했다. 이전 잘피 군락지가 풍성했던 대포항은 잘피 군락지가 급격히 사라지면서 물고기 등도 함께 보이지 않게 됐다.
잘피숲 복원 사업이 진행된 경남 사천시 대포항에코피스아시아 등은 KB국민은행과 함께 경남 사천시 대포항 인근 지역에서 2차 바다숲 복원 활동을 진행했다. 이전 잘피 군락지가 풍성했던 대포항은 잘피 군락지가 급격히 사라지면서 물고기 등도 함께 보이지 않게 됐다.이철재

잘피는 주로 열대지방에 많다. 온대 해역에 속하는 우리나라엔 거머리말, 애기거머리말 등 9종이 있다. 이 중 6종은 '해양생태계의 보전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해양보호생물로 지정되어 있고, 우리나라 연안 잘피의 80%는 거머리말이다.


잘피가 숲을 이룬 연안은 해양생물의 산란처와 서식지가 된다. 해양생태기술연구소 송휘준 박사는 "점농어, 농어, 갑오징어 같은 것들이 산란하는데, 이동성이 약한 치어는 항성 (잘피숲에) 붙어 살다가 어느 정도 자라 유어가 되면 큰 바다로 나간다"라고 말했다. 감성돔 등 '돔'자 들어가는 고급 어종도 잘피숲이 고향이다.

"물 정화에 잘피가 최고"라는 게 이 지역 어민들의 경험적 증언이다. 실제 잘피숲은 물속 영양염을 흡수하기에 수질 개선, 적조현상 완화 등의 효과가 있다. 또 잘피숲은 기후위기 시대 탄소 흡수원으로 각광받고 있는데, "1ha 당 연간 450kg의 탄소를 흡수한다"는 게 송휘준 박사의 분석이다.

육상생태계보다 최대 50배 이상의 탄소 흡수 능력을 지녔다는 평가도 있다. 그 때문에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잘피숲을 3대 해양 탄소 흡수원인 푸른 탄소(블루카본, Blue Carbon) 중 하나로 공인했다.

경남 사천시 대포 연안 잘피숲 복원 사업

국제환경전문단체 (사)에코피스아시아(이사장 김원호)는 국내 잘피 군락지 생태 회복을 위해 KB국민은행(은행장 이재근)과 함께 "잘피는 바다를 살리고, 잘피는 우리를 살린다!"라는 취지로 경남 사천시 대포동 연안에서 지난해 11월 18일부터 22일까지 'KB 바다숲' 조성 사업을 벌였다. 또 지난 12월 24일엔 이식지 전역에 대한 1차 모니터링을 진행했다.

여기에 국내에서 잘피 복원 최고 전문성을 갖춘 해양생태기술연구소(MEI)와 한국수산자원공단(FIRA)이 함께 했다. 필자는 전체 과정을 취재·기록하며 참여했다. 'KB 바다숲 프로젝트'는 2022년 출시한 'KB Net Zero S.T.A.R. 공익신탁' 가입 고객과 함께 조성한 기부금을 에코피스아시아에 전달하면서 시작됐고, 2024년부터는 KB국민은행 자체 기부금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잘피 이식 준비 성체를 이식하기 위해 육지에서 철사고정법으로 잘피를 정리하고 있다.
잘피 이식 준비성체를 이식하기 위해 육지에서 철사고정법으로 잘피를 정리하고 있다.이철재

앞서 2022~2023년 에코피스아시아와 해양생태기술연구소, 한국수산자원공단은 KB국민은행의 후원을 받아 경남 남해군 언포 연안에서 1차 바다숲을 조성했다. 에코피스아시아 이태일 처장은 "이식 후 총 9차례 모니터링 결과 자연 군락지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자랐다"라며 "생존율과 생육밀도는 각각 최대 10배, 9배 등 안정적인 모습을 확인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남해군 언포에서 획득한 잘피숲 복원 비법을 바탕으로 2024년부터 2차 잘피숲 복원 사업에 나섰다. 목표는 사천시 대포 연안에 1ha의 잘피숲을 복원하는 것. 이어 2027년까지 인근 지역으로 확대해 총 3ha의 잘피숲을 조성해 나갈 계획을 잡고 있다.

사실 잘피숲 복원 과정은 녹록지 않다. 복원 대상지 선정부터가 대충대충 할 수 없는 큰일이기 때문이다. 우선 후보 지역 대상 '이식 적합성 지수(TSI, transplantation suitable index)' 평가를 한다. 물의 탁도와 물속 영양염 상태 그리고 광합성에 필요한 빛의 물속 도달률이 중요한 평가 지표가 된다.

여기에 성게와 같이 잘피를 먹는 생물 서식 현황 조사, 예전 잘피 군락지 존재 여부 등 문헌 조사 결과와 함께 바닥이 자갈층인지 모래층인지 등 저질 상태 평가도 필수적이다. 송휘준 박사는 "각 항목 별로 0.1~0.2점씩 채점하는데, 이걸 곱해서 평가한다. 단 한 개 항목이라도 0이면 결괏값도 0이 된다. 그러면 심을 수 없는 곳으로 평가된다"라고 말했다.

KB 바다숲 2차 프로젝트 해양생태기술연구소 전문가들이 잘피 식재를 위해 바다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KB 바다숲 2차 프로젝트해양생태기술연구소 전문가들이 잘피 식재를 위해 바다속으로 들어가고 있다.에코피스아시아

자연에 대한 예측의 한계가 있기에 여러 조건이 맞는다고 해도 실제 잘피 복원이 잘 안 되는 경우도 있기에 사전 평가 과정은 그래서 더욱 꼼꼼하게 할 수밖에 없다. 또 최종적으로 잘피 복원에 대한 주민 의사도 중요하다. 이렇게 해서 경남 사천시 대포 연안이 선택됐는데, 이 지역은 10여 년 전만 해도 잘피 군락지가 있었고, 주민 수용성도 높았다.

잘피숲 복원, 더 확대해야

잘피 복원 방법은 이식과 파종 두 가지가 있다. 이식은 기존 군락지에서 잘피 성체를 채취해서 옮겨 심는 방식이고 파종은 여름철 씨앗을 수거해 보관했다가 늦가을 또는 겨울에 복원 대상지에 심는 방식이다. 파종은 기존 군락지 훼손을 최소화할 수 있고, 넓은 면적에 걸쳐 진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현재 기술로는 발아율이 낮다는 한계도 있다.

에코피스아시아 등은 사천시 대포 연안에서 1차 성체 이식에 이어 파종 방식을 함께 사용할 예정이다. 목표로 한 1ha 중 0.4ha는 성체 이식으로, 나머지 0.6ha는 파종 방식으로 진행한다. 성체 이식과 파종은 수온이 낮은 겨울철에 진행되는데, 상대적으로 잘피 성장이 더딘 가을부터 겨울철까지가 잘피 성체 이식의 적기이기 때문이다.

잠수 준비하는 해양생태기술연구소 전문가 잘피 이식은 한 겨울 바다속에서 진행되고 보호생물이라는 점에서 신중함과 함께 전문성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잠수 준비하는 해양생태기술연구소 전문가잘피 이식은 한 겨울 바다속에서 진행되고 보호생물이라는 점에서 신중함과 함께 전문성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이철재

온대 지역 서식 잘피는 겨울철 해수 온도가 낮아도 버틸 수 있지만, 여름철 해수 온도가 28도 이상 올라가면 오히려 피해를 받는다. 온도가 올라가면 광합성 생산 산소보다 소비량이 더 많아 고사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다. 한 겨울 바다 속 작업이기에 여간 고된 게 아니다. 특히 채취부터 이식까지 상당한 전문성과 신중함이 필요한 고된 작업이다.

사천 대포동 연안 이식은 전날 사천시 중촌항 인근 군락지에서 채취한 잘피를 옮겨와 육지에서 다듬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잘피 성체 두세 개마다 U자형 철사에 끼우는데, 국제적으로 가장 많이 쓰는 철사고정법(staple method) 이다. 이렇게 심어야 파도 등에 따른 유실을 막을 수 있다.

육지 잘피 정리 작업 동안 해양생태기술연구소 잠수팀은 이식 대상지 물속에서 로프로 구역 배분 작업을 벌인다. 이게 없으면 가시거리가 짧은 바다속에서 방향을 잃기 십상이다. 이후 본격적인 성체 이식 작업에 들어간다. 대략 5000주 잘피 이식에만 이틀 이상의 작업 시간이 필요했다.

잘피 생육 등 1차 모니터링 에코피스아시아, 해양생태기술연구소 등은 잘피 성체 이식 후 주기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잘피숲 조성 상태와 생육 상황 등을 체크한다. 이를 통해 사업의 성과를 측정할 수 있다.
잘피 생육 등 1차 모니터링에코피스아시아, 해양생태기술연구소 등은 잘피 성체 이식 후 주기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잘피숲 조성 상태와 생육 상황 등을 체크한다. 이를 통해 사업의 성과를 측정할 수 있다.에코피스아시아

이식만으로 끝내는 것은 제대로된 잘피 복원이 될 수 없다. 에코피스아시아 등은 지속적인 모니터링 계획을 잡고 있는데, 지난해 12월 24일 이식지 전역에 대한 1차 모니터링이 진행됐다. 이식 당시 잘피 평균 길이는 52.8cm였는데, 1차 모니터링 결과 49.2cm로 큰 차이가 없었지만, 생육 밀도는 이미 활착한 일부 개체에서 약 40% 가량 증가하는 등 안정적 분포가 확인됐다.

이태일 처장은 "잘피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블루카본으로 탄소 고정 효과와 함께 해양생물을 복원하고 수질을 정화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기에 이런 사업들이 계속해서 확대되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필자는 이후 잘피 복원 모니터링 과정도 계속 기록해 나갈 예정이다.

play

KB 바다숲 2차 프로젝트 '잘피 성체 이식' 경남 사천시 대포항 인근 잘피 성체 인식 과정을 담은 영상이다. ⓒ 에코피스아시아



#잘피 #에코피스아시아 #해양복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강/유/미' 세상을 꿈꿉니다. 강(江)은 흘러야(流) 아름답기(美) 때문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애 셋 잘 키웠는데... 중년에 남편이 이럴 줄이야 애 셋 잘 키웠는데... 중년에 남편이 이럴 줄이야
  2. 2 특활비 지켜려다 특경비 전액삭감...심우정, 무슨 일을 한 건가 특활비 지켜려다 특경비 전액삭감...심우정, 무슨 일을 한 건가
  3. 3 어느 건물주의 '횟집 임대료 갑질'이 낳은 엄청난 변화 어느 건물주의 '횟집 임대료 갑질'이 낳은 엄청난 변화
  4. 4 응원봉 들고 광화문 가득 메운 시민들"일상 돌아가고 싶다...헌재, 이젠 탄핵해야" 응원봉 들고 광화문 가득 메운 시민들"일상 돌아가고 싶다...헌재, 이젠 탄핵해야"
  5. 5 윤석열 미래 예언한 34세 국힘 의원의 명연설 윤석열 미래 예언한  34세 국힘 의원의 명연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