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적암 터 수운 최제우가 동학 교리인 '논학문(論學文)'을 집필하고 '검결'이라는 칼 춤을 췄다는 은적암 터. 옆으로 교룡산 산신단이 같이 한다.
남원시청(네이버 블로그 : 남원에 빠지다)
수운이 교리를 밝히는 '논학문'을 집필한 곳이다. 휘영청 달이 밝은 어느 밤, 나무 칼을 든 수운이 이곳에서 "시호! 시호! 이내 시호!"로 시작하는 '검결'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옆에 교룡산 산신단이 있어, 이 터가 남원 민중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는지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은적암 사방으로 찬바람이 매섭다. 교룡(蛟龍)이니, 때를 잘못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한 영웅호걸이다. 수운이나 김개남이 교룡이었음은 분명하다.
남원읍성
남원의 큰 물줄기인 요천과 교룡산에서 발원한 광지천 둘 다 남서쪽으로 흐른다. 두 물줄기 사이에 읍성이 앉았고, 동서남북 길이가 각 850∼870m로 정사각형에 가깝다. 둘레 3,441m의 벽이 두꺼운 성으로, 편편한 곳에 쌓은 평지성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실록은 1477(성종 8)년 축성을 시작하여 1492(성종 23)년에 완성했다 기록한다. 처음 쌓은 성이 좁았던지 증축 논의가 일어난다.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으나, 여러 정황상 1530년 이전에 증축된 것으로 보인다.

▲남원읍성과 교룡산 남아 있는 읍성 북벽과 그 너머 지척으로 교룡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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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m 남은 북벽에 오른다. 네모난 치성에서 북문 터까지 복원이 한창이다. 남원읍성 북서쪽으로 교룡산성이 지척이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니 '만인의총'이 애처로이 읍성을 응시하고 있다. 성 가까이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옛길을 따라 성안을 걷는다. 용성초등학교 자리에 객사 '용성관'이 있었고, 바로 아래 남원문화원 자리가 관아와 내아다. 이들 건축물을 비켜 가로망이 직선으로 남-북을 이었고, 객사와 동헌을 가르는 동-서 가로가 용성관에서 직교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 때 동·서·남문의 문루가 불에 탔다.
강제 병합으로 남원읍성이 차례로 훼철되기 시작한다. 신작로와 철도로 남원읍성을 허물어나갔다. 전주~순천 간 도로가 개설된 1911∼1913년 사이 북문이 사라진다.

▲남원읍성 치성 네모난 치성과 성벽 밖으로 발굴 당시 해자가 보인다. 저 끝에서 북문 터까지 현재 복원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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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선(1935)을 개통하면서 요천이 흐르는 방향과 나란히 철도를 끌어들인다. 그 자리에 남원역을 앉히고 철로 주변을 가로망으로 둘러싼다. 이로써 격자형이던 옛 읍성의 가로체계가 뭉크러져 버렸다. 아울러 근대화라는 미명으로 성안 곳곳을 파헤친다. 대부분 성벽이 이때 훼철되었다.
정유재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도 남원읍성은 큰 곤욕을 치렀다. 1593년 6월(음) 2차 진주성 전투 때 진주성을 함락한 왜군이 남원읍성도 공격해 쑥대밭을 만든다. 파손된 성을 명나라 장수 낙상지가 곧바로 고쳐 쌓는다. 정유재란(1597) 때 이곳 수비 책임을 맡은 명나라 총병 양원이 성을 보강한다. 성벽을 수리하고 해자를 더 깊이 팠으며 여장을 높여 쌓는다.

▲해자 2019~2020년 발굴 당시 남원읍성의 북벽 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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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전주를 목표로 왜군이 세 갈래 길로 내륙 깊숙이 침범한다. 섬진강 물길로 1대가, 좌군은 진주-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우군은 합천을 지나 황석산성으로 진군한다. 남원은 바람 앞에 내놓인 등불이다. 고니시, 시마즈, 우키다가 이끄는 5만 6천 병력이 8월 12일 남원으로 몰려들어 성을 포위한다.
성안 백성이 7천여 명이다. 여러 장수가 교룡산성에서 진지전을 펼치자 주장한다. 그러나 양원은 거만했다. 평지성이니 1천 기병을 믿었던 모양이다. 기병을 포함 명군이 3천이다. 2천 군사로 전주에 주둔하던 명 장수 진우충이 지원을 거부한다.
어쩐 일인지 인근의 권율과 이원익의 1만 조선군도 섬진강의 왜군을 견제하며 주저한다. 웅치전투에서 왜군을 막았던 전라 병마사 이복남이 1천 군사를 이끌고 꽹과리와 북을 치며 당당하게 남원성으로 입성할 뿐이다. 이 모습에 왜군이 당황할 정도다.
13일부터 전투가 시작된다. 다음 날, 왜군이 장대를 높이 세워 조총을 난사한다. 명 군사들이 사상을 내고 동요한다. 그날 밤 명-왜군 간에 합의가 있었을까? 양원이 도망칠 계책을 구한다. 15일 볏짚으로 해자를 메운 왜군 공격에 성이 함락되고, 이복남 등 조선군은 화약고를 폭발시켜 자폭해버린다. 7천 백성들도 코가 베어진 채 모두 살육당한다.

▲만인의총 정유재란 당시 남원읍성 전투 패배로 죽임을 당한 백성과 조명연합군의 넋을 기리는 합동 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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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묘사한 왜 종군 승려가 쓴 글은 참담함 그 자체이다. 양원을 비롯한 50여 명만이 살아 도망간다. 읍성이 어찌 되었을지는 불문가지다. 이 패배의 결과가 '만인의총'이다.
춘향전과 광한루
한겨울, 남문 밖 광한루원이 적요하다. 꽃피고 새 우짖는 춘삼월에 이팔청춘 이몽룡은 방구석에서 얼마나 갑갑했을까. 춘향전은 춘심에 흠뻑 젖어 광한루로 향하는 그의 발길에서 시작한다. 민중이 읊어가며 써낸 최고의 고전소설 춘향전은 남원이 배경이다. 1872년 지방지도는, 소설이 묘사하는 읍성과 그 주변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남원 토박이 방자의 요란스러운 사설을 따라 춘향전 속 남원으로 걸어 들어가 보자. 객사 뒤에 '정유난순절팔충열단'을 그려 놓았다. 장시가 성안과 남문 밖에 표시되어 있다. 동문 밖 선원사와 문루에 잇닿은 요천 변 동림이 울울하고, 서문 옆에는 관우 사당인 관왕묘가 있다. 남문 밖에 오작교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어 있고, 그 옆에 2층 누각의 광한루가 서 있다. 북문 밖 향교와 낙타 등 같은 교룡산성 묘사가 무척 세세하다.

▲광한루 남원 객사 용성관의 별서로 지어진 광한루. 춘향전의 본 무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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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는 남원 객사 용성관에 딸린 1419년에 세워진 공용 누각으로, 자연경관에 인공 정원을 덧붙였다. 남문 밖 북적거리는 장시와 별개로, 정적이고 유유자적하는 쉼의 공간이다.
양녕대군 폐위를 반대하던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낙향한다. 그의 조상이 지은 정자를 철거한 자리에 누각을 지어 '광통루'라 이름한다. 한글 창제에 힘을 보탠 정인지가 달나라에나 있을 법한 풍경이라며 '광한루'로 바꿔 부른다. 기축옥사로 호남 유학자의 씨를 말려버렸다는 정철이 이곳을 찾아 큰 연못을 파고 3신 산을 조성하고 오작교를 놓아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광한루원을 나오며, 명창 임방울이 쇳소리로 불렀던 '쑥대머리'를 읊조려 본다. 춘향전은 애틋한 사랑 이야기다. 우리 정서에 이처럼 깊숙이 젖어 든 이야기도 흔치 않다. 묘사하는 장소는 매우 구체적이다. 민중이 지어낸 이야기 속 서사는 남원읍성 그 자체다. 읍성 옛 건축물이 마치 춘향전 무대 같다. 만남과 사랑, 이별과 그리움, 재회하는 장면이 모두 현실에 버금간다.
읍성을 온전히 복원해 내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서문과 남문 터에 표석을 세웠듯, 성벽을 따라가는 표식은 가능해 보인다. 이로써 읍성 윤곽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면, 장소와 역사, 이야기가 훨씬 더 강렬하게 기억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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