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 프라 시산펫을 찾는 누구나 거대한 체디 앞에서 멈춰서게 된다.
박배민
이 체디들이 특별한 이유는 부처나 승려를 위한 것이 아니라, 왕실을 위한 영묘(靈廟)라는 점에 있다. 높이 수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이 탑들은 과거 아유타야 왕실의 위엄을 짐작케 했다.
가이드를 해주는 '곤'에게 체디의 정확한 높이를 물었지만, 곤도 정확히 모른다며 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왕실의 권위와 신앙이 깃들어 있는 이 체디의 높이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검붉은 벽돌과 회색빛 석재만 남아 있지만, 과거 이 체디들은 첨탑 부분이 금박으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옛 아유타야 사람들은 햇빛을 반사하는 황금 체디를 멀리서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절대적인 왕실의 권위를 떠올리며 경외심이 일었을까? 아니면 내 위에 군림하는 왕실을 두려워 했을까?
체디에 새겨진 아유타야 왕국의 계보
3개의 체디는 각각 왕실의 영묘로,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왕국의 역사를 담은 신성한 상징물이었다. 셋 중 동쪽 체디가 가장 먼저 세워졌는데, 라마티보디 2세(제10대 왕, 재위 1491-1529년)가 자신의 아버지 뜨라이롯까낫 왕(제8대 왕)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 건축한 것이다.
중앙 체디는 동쪽 체디와 비슷한 시기에 라마티보디 2세가 자신의 형 보롬마라차티랏 3세(제9대 왕, 재위 1488~1491년)의 유골을 안치하며 세웠다.

▲작은 체디(앞)와 중심 체디(뒤).
박배민
약 40년 후, 마지막으로 세워진 서쪽 체디는 보롬마라차티랏 4세(제11대 왕, 재위 1529-1533년)가 자신의 아버지 라차티랏 2세(제7대, 재위 1424~1448)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지었다. 이렇게 세 개의 체디는 각기 다른 왕의 유해를 품고 있었으며, 왕국의 계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세 개의 체디가 세워진 시기는 조선의 성종~중종 시기와 비슷하다. 한쪽에서는 유교적 질서를, 다른 한쪽에서는 불교적 신앙을 기반으로 왕국의 권위를 세웠던 모습이 흥미롭게 대비된다.
아유타야식 탑의 비밀
왓 프라 시산펫의 체디는 아유타야 시대의 독특한 탑 양식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사례다. 체디는 네 방향에 현관처럼 보이는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일부만 내부로 연결된다.
4개의 현관은 지상에서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어, 밟고 올라가면 내부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만 대부분은 막혀 있다. 안쪽이 막혀 있는 현관에는 불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추측컨대 이 불상은 2~3미터 크기로 당시 체디의 위압감을 더해주었을 것이다.

▲몬돕(제례용 건물)의 출입구가 체디로 이어진 걸 볼 수 있다.
CyArk
계단을 따라 내부로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유산 보호를 위해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대신 탐방 후 확인한 3D 스캔 자료에서 체디의 현관이 체디 사이에 위치한 몬돕(Mondop, 의식용 건물)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외부에서 체디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몬돕을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동쪽에서 바라 본 모습. 사진에 표시된 출입구가 체디와 연결된다. 직전 사진과 같은 출입구다.
박배민
조선 왕릉과 닮은 몬돕(Mondop)

▲체디 사이에 위치해 있는 몬돕의 기단들. 체디에 맞춰 몬돕(기단)도 3개가 있다.
박배민
체디 사이에 있는 정사각형의 기단으로 관심을 돌려보자. 탐방 당시에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자료를 정리하면서 이 기단이 중요한 건축물의 일부임을 알게 되었다. 바로 '몬돕(Mondop)'이라는 건물의 기단이었다.
몬돕은 태국 불교 건축에서 의식, 설법 등을 위한 신성한 공간이다. 체디가 선대 왕들의 유골을 안치한 영묘라면, 몬돕은 제사를 지내고 왕실 의식을 거행하는 중심적인 장소였다.

▲왓 프라 시산펫에서 몬돕의 모습을 상상한 그림.
Ayutthaya: World Heritage
몬돕과 체디의 관계는 조선 왕릉과 비슷하다. 체디는 봉분, 몬돕은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니, 두 공간의 역할이 한층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이곳에서 왕실의 신성한 의식과 제례가 엄숙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른 사원(왓 프라 깨우)에 있는 몬돕. 왓 프라 시산펫의 몬돕도 과거 저렇게 금빛을 뿜어냈을 것이다.
박배민
흥미로운 건 3개의 체디와 몬돕의 건설 시기가 약 60~70년이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 몬돕들이 프라삿 통 왕(제24대 왕, 재위 1599~1630)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 왕릉처럼 한 번에 설계하고 지었다기보다는, 후대에 몬돕을 지어 왕실의 권위를 더욱 드높였다는 설명이다. 현재는 세 개의 몬돕 중 하나는 일부 벽면만 간신히 남아 있지만,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남서쪽에서 바라 본 체디
박배민
1767년 버마 침공은 왓 프라 시산펫을 폐허로 만들었지만, 1956년 태국 예술부의 손길로 200여 년 만에 복원이 이루어졌다. 다행히 동쪽 체디가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오늘날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었다. 다만, 침공 당시 선대 왕의 유해들은 사라져 그 행방을 더는 알 수 없게 됐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화려한 영화(榮華)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자그마한 흔적들뿐이다. 아유타야 왕국 또한 400여 년의 영화를 뒤로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왓 프라 시산펫은 체디가 남아 지금도 침묵 속에서 과거를 이야기한다.
한때 금빛으로 빛나고 찬란했던 사원은 이제 무너지고 잔해들이 남아 폐허가 되었지만, 이 체디들만큼은 여전히 아유타야 왕국의 역사와 왕실의 신앙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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