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얼'을 통해 제작된 한 제주도 할머니의 자서전
이보슬
아이디어를 현실로, '메모리얼'의 첫걸음
젠: "'메모리얼'이 필요한 서비스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이를 검증할 기회가 필요했어요. 다행히 여러 지원 사업과 프로그램을 통해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024년 4월 말,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아이디어 사업화 지원사업' 공고를 마감 당일 아침에야 발견했어요. 원래는 그날 오후, 영상을 전공한 친구를 만나 프로젝트 합류를 설득할 계획이었는데, 공고를 보자마자 '이거다!' 싶었죠. 급하게 지원서를 제출했고, 운 좋게 선정되어 6월부터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초반에는 컨셉을 구체화하고 홍보 영상을 제작하는 데 집중했어요. 그러다 제주 창업 지원 프로그램인 '라이징업'을 발견했고, 개발자와 디자이너를 지원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바로 신청했죠. 우수상을 받아 개발을 시작할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ICT 실전 해커톤'에도 참가하게 됐어요.
해커톤에서는 기존의 영상 메시지 기능을 보완하고, AI 기반 맞춤형 질문 생성 및 자서전 기능을 추가했어요. 사용자가 삶의 한 장면을 기록하면 AI가 적절한 질문을 던져 더욱 풍부한 이야기를 남길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이었죠. 심사위원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아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메모리얼'은 초기 아이디어에서 점차 구체화되었고,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을 발판 삼아 현실적인 서비스로 발전하고 있어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기록할 수 있도록 플랫폼을 정교하게 다듬어갈 계획입니다."
- 메모리얼의 자서전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젠: "지난 11월 메모리얼 앱을 출시했고, 질문에 대한 답변만 하면 AI의 도움을 받아 간편하게 자서전을 만드는 서비스를 시작했어요. 지원 사업에 선정된 덕분에 빠르게 앱을 완성할 수 있었고, 무료로 자서전 1권을 제작해 드리는 이벤트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메모리얼'을 영상 기록 중심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보다 자연스럽게 접근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자서전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방식으로 확장했어요.
'삶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영상보다 글이 부담이 적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먼저 자서전 쓰기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한 후, 최종적으로 '메모리얼' 서비스와 연계하는 전략을 세웠죠.
한편, 앱 사용이 어려운 어르신들을 위해 노인복지관에서 웰다잉 강의를 통한 자서전 만들기 서비스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습니다."
- 복지관에서 자서전을 쓰는 과정에서 인상적인 점이 있었나요?
젠: "네, 6주 동안 제주특별자치도 노인복지관에서 자서전 강의를 진행했어요. 처음에는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내 인생에 기록할 만한 게 뭐가 있겠냐"라며 망설이셨죠. 평범한 삶이라고 여기셨으니까요. 하지만 한두 분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어떤 분은 힘겨운 결혼 생활과 시댁살이를 견뎌낸 이야기, 또 어떤 분은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셨죠. 그런데 그 이야기들의 근본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녀를 향한 사랑과 헌신'이었어요. 때로는 가슴 아픈 희생이었지만, 그 모든 시간을 오직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감내해오신 것이었죠. 저는 그 인생을 감히 다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오히려 깊이 존경하게 됐어요. 그리고 동시에 '메모리얼' 서비스의 당위성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있었어요.
자서전을 편집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우리는 위대한 삶을 사회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찾지만, 사실 가장 위대한 삶은 사랑과 희생 속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겉으로 보면 평범한 인생 같아도, 그 안에는 누구보다 깊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산책 중 별을 구경하는 젠&사이먼 부부
이보슬
- 사업을 시작하면서 두려움은 없었나요?
사이먼: "크게 두렵지는 않았어요. 저는 한 번 사업을 시도해본 경험이 있어서, 다시 회사를 다녀야 한다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하지만 막상 제주에서 사업을 하다 보니 예산을 잡아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아둔 돈이 빠져나가는 것 자체가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더라고요.
처음에는 외주를 받아서 돈을 벌면서 사업을 진행했어요. 하지만 외주 역시 남의 일을 해주는 것이고, 우리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죠. 결국, 외주 비중을 줄이고 예산을 다시 계산한 후 본격적으로 사업에 집중하기로 했죠."
젠: "불안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생활이 필요하더라고요. 사업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지만, 때때로 우리가 잘하고 있는지 불안할 때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꾸준한 루틴을 만드는 데 집중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산책을 하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주로 집중해서 일하고, 저녁에는 다시 산책을 나가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하루의 흐름이 생기고, 몸과 마음이 리셋되면서 더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더라고요.
사실 집이 곧 사무실이라 시간 관리를 안 하면 무너질 수 있는데, 오히려 너무 빡빡하게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흐름'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 제주에서 계속 정착할 계획인가요?
젠: "지금은 전세로 살고 있어서, 단기적인 목표는 2년을 잘 보내는 것이에요. 그 후에는 사업이 잘 자리 잡으면 전세 연장을 하거나 새로운 터를 잡을 계획입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꼭 제주가 아니더라도 일본이나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면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경험하고 싶어요. 우리가 개발하는 서비스들이 해외 시장에서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젠&사이먼 부부의 손
이보슬
디지털 시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사람의 이야기'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의 삶은 가족과 친구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다. '메모리얼' 프로젝트가 만들어지고, 제주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자서전으로 남겨지게 된 과정은 단순한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삶을 기억하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시도였다.
자서전 프로젝트를 통해 남겨진 이야기들은 단순한 개인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이 남긴 삶의 흔적이며, 후대에게 전해질 수 있는 소중한 역사적 사료다. 제주 복지관에서 진행된 자서전 강의에서 많은 어르신들이 '내 인생에 기록할 게 있겠냐'며 조심스러워했지만, 결국 그들의 이야기는 가족과 세상을 향한 사랑과 헌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기록되지 않은 삶'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메모리얼' 프로젝트처럼, 누군가의 이야기를 남기고 이어가려는 노력이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사라지는 기억'이 아니라 '계속되는 기억'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기록은 곧 존재의 증명이다. 그리고 존재를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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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진작가, 영화감독, 기자 이보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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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없이 제주로 간 신혼부부, 죽음 기록하는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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