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난 시민들의 행진‘윤석열 즉각퇴진 사회대개혁 4차 범시민대행진’이 지난 12월 28일 오후 서울 광화문앞에서 윤석열퇴진 비상행동 주최로 열린 가운데, 참가자들이 응원봉 불빛을 밝히며 명동입구까지 행진하던 모습.
권우성
과거 스무 살 언저리의 나에게 집회는 주말의 고정된 일정이었을 만큼 익숙한 것이었다. 2000년대 초반 대학에 입학해 한 줌 남아있던 소위 학생운동을 경험한 나에게 집회와 그 문화는 여전히 몸에 새겨진 것처럼 남아있다.
가끔 투쟁가를 흥얼거리거나(단결만이 살 길이요, 노동자가 살 길이요.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투쟁하는 사업장 옆을 지날 때 스피커에서 빵빵하게 투쟁가가 흘러나오면 심장이 쿵쿵댄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노조, ~당, ~단체, ~학생회 등의 단체명이 적힌 깃발들과 인사말을 대신하는 "투쟁!"의 외침, 심장박동수를 올리는 비장하고 결연한 노래들, 노래가 흐르는 내내 계속되는 팔뚝질, 그리고 훈련된 발성의 힘찬 발언들이 내가 겪었던, 그리하여 내가 상상하는 집회의 모습이었다.
때문에 2016년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을 규탄하면서 학생들이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복창할 때 나는 생경함을 넘어 혼란을 느꼈다. 저건 (내가 알던) 집회가 아닌데, (내가 알던) 투쟁이 아닌데. 그리고 그해 연말 내내 계속되었던 대규모 촛불집회는 축제라 할 만한 것이었다. 한 번도 집회에 나가본 적 없다던 동생과 함께 나 또한 크리스마스이브를 거리에서 보냈고, 스스로를 정치무관심층이라 표현하던 친구조차 집회에 다녀왔노라고 고백하던 시절이었다.
유대감에서 비롯된 온기
그런데 집회에 가보니 요즘 시민들은 그때보다도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낫다는 말은 이렇게 고쳐야 한다. 한 사람이 열 걸음을 가는 동안 열 명의 사람은 스무 걸음을 나갈 수 있다고.
자리를 잡고 앉아 투쟁이라고 외치며 인사하는 대학생과 열일곱살 고등학생, 배달 라이더 노조원이라고 소개하는 청년의 발언을 들었다. 집회를 많이 나갔을 때에도 자발적으로(는) 발언을 한 적이 한번도 없는 나는 발언을 듣는 내내 감탄을 거듭했다. 범우주적 카페인 중독자 모임이라고 적힌 깃발을 보며 킥킥댔다. 밴드 허클베리핀과 말로의 공연을 보았다. 한번 나왔을 뿐인데 이렇게 많이 받아도 되나, 황송한 마음이 들었다. 믿을 수 없이 평화롭고 다정한 기운이 가득한 집회였다.
그동안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해 대다수 시민들에게는 불편을 초래하는 집단으로 적대시되었던 노동조합과 '빠순이'로, '사회적 의식'이 없다고 비하 당하던 아이돌 팬들,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는 청년들, 나처럼 아이와 같이 나온 양육인까지. 도저히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이들이 이곳에서 만나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그동안 내가 분노와 무기력, 절망에 시달렸던 건 이곳에, 이들과 함께 있지 않아서였음을 알았다. 유대감에서 비롯된 온기가 우리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내 안의 깊은 곳에 따뜻한 기운이 들어차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일요일, 법원이 공격 당하는 영상을 보았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경찰과 언론인을 공격하고 법원에 난입하여 기물들을 때려 부수고 사무실을 뒤지며 윤석열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한 판사 이름을 외쳐 댔다. 믿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토요일에 느꼈던 희망이 두려움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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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시 26분지난 19일 새벽, 서부지법 안으로 난입한 폭도들은 유리창과 집기를 모두 부수기 시작했다.
락TV 유튜브 캡쳐
사실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을 시작한 이후로 내게는 부쩍 두려움과 분노가 많아졌다.
아이를 안은 우크라이나 피난민 사진을 보았을 때, 계속되는 공습으로 지하벙커에서 학교생활을 하는 우크라이나 아이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아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이스라엘 민간인들이 테러 당했다는 뉴스를 보고는 혹시나 싶어 우리 집안에 아이를 숨길 만한 공간이 있는지를 물색했던 적도 있다.
한동안 무장 괴한이 집에 침입하면 어쩌나 하는 망상에까지 시달렸다. 또 이후 보복의 외피를 쓰고 팔레스타인을 대상으로 아이, 환자를 가리지 않는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을 때에는 고통스러워서 차마 뉴스를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외면했다는 사실에 다시 고통을 느꼈다.
우리나라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고 해도, 나의 삶과 전혀 무관한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 끔찍한 야만 앞에 국제사회라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참담했고 무기력했다.
또 한편으로는 산업을 둘러싼 멈추지 않는 욕망들이 기후재앙이 되어 끔찍한 산불과 홍수, 이상기후 현상으로 전세계 곳곳을 덮치는 것을 보면서 아이가 살아갈 10년, 20년, 30년 후를 생각하면 두려움에 몸서리가 처진다. 이와중에 극우파시즘을 선동하며 다시 정권을 잡은 트럼프 대통령은 기후위기를 멈추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시 거꾸로 되돌릴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2021년 미국 의회 습격사건을 보며 참 미국스럽다고 생각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극우세력의 공개적인 활동 무대가 되고 있다. 물론 전조는 있었다. 된장녀에서부터 시작되어 맘X(불가침의 영역이었던 '모성'을 공격하기에 이른), 한녀, 한남 등 재생산되는 혐오와 적대의 표현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극단의 시대에 아이와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 그것도 잘, 되도록 즐겁게. 그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그 토요일 집회에서 아이와 함께 목격하고 겪었던 연대의 온기를 떠올릴 것이다. 시민들의 유기적이고 화학적인 결합을 되새길 것이다. 되도록 자주 나가서 보고, 듣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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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다닌 지 10년, 아이를 키운 지는 3년이 되었고요,
이제 막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와 더불어 살기 좋은 세상에 대해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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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아이와 간 집회, 하루 만에 극단을 경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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