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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아이와 간 집회, 하루 만에 극단을 경험했습니다

내란세력 규탄 집회에 참가한 다음날 서부지법 폭동이 일어났다

등록 2025.01.31 14:56수정 2025.01.3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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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선포 이후 아이와 함께 참가한 첫 집회의 기록입니다. 영상으로만 보던 집회에서 온기와 희망을 느낀 그 다음 날 공교롭게도 서부지법을 공격하는 폭동이 있었습니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극단의 시대에 아이와 함께 잘 살아남는 방법을 공유하고자 합니다.[기자말]
또다시 돌아온 토요일. 다섯 살 아이에게 어김없이 산책 일정을 통보하고 시간에 맞춰 길을 나섰다. 동네를 한 바퀴 돌 셈이었다. 언덕길을 따라 내려가 사직단과 종로도서관을 거쳐 인왕산 둘레길을 통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게 보통의 우리 루트였다. 날이 유독 따뜻했고, 발걸음이 가벼웠다.

보도블럭 위에서 인간말이 되어 게임을 하다 보니 금방 서울 종로도서관 앞에 다다랐다. 광화문 거리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트를 수정하여 종로도서관 앞에서 사직단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와 광화문 큰 거리가 내다보이는 곳에 도착한 순간 저 멀리 깃발들과 사람들이 보였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12월 3일 이후 나의 일상은 쏟아지는 충격적인 뉴스들에 잠식되었다. 하루 종일 뉴스를 들으며 흥분하는 나를 지켜보던 아이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나쁜 짓을 해서 경찰이 체포해야 되는데, 대통령이 집에 숨어서 나오지를 않아."

자신이 좋아하는 '경찰', '체포'라는 단어가 등장해서인지 아이는 흥미를 보였다. 그 이후 아이는 종종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대통령은 체포됐어?'라고 묻곤 했다.

 아이와 함께 간 집회 모습
아이와 함께 간 집회 모습최지현

언젠가 집회가 뭐냐고 묻는 다섯 살 아이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원하는 것을 크게 말하는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예를 들면, 일주일에 4번만 유치원에 가자! 이렇게 외치는 거야."


아이는 매우 흡족한 얼굴로 그럼 나는 그거 할래! 일주일에 4번만 유치원에 가기!라고 외쳤다. 내친김에 집회에 한번 나가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가장 큰 이유는 나 혼자서 아이와 괜찮을까,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국회 앞 대로를 가득 매운 사람들과 삭막한 여의도를 단번에 축제의 현장으로 변신시킨 응원봉들, 추운 날씨에 집회에 나온 아이와 양육자들을 위해 사비를 털어 버스를 대절한 시민, 집회 근처의 식당과 카페에서 이어지는 선결제 소식을 듣고 보면서 오바마 대통령의 유명한 말이 생각이 났다. WHEN THEY GO LOW, WE GO HIGH.

온 우주의 기운이 떠미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그날은 마치 온 우주의 기운이 우리를 그곳으로 떠밀어주는 것 같았다. 드디어 우리도 집회에 가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차량이 통제되어 한산한 넓은 도로를 옆에 끼고 천천히 인파들이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경복궁역 인근, 은행이 있는 건물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다시 만난 세계가 흘러나왔다. 이 노래가 21세기의 투쟁가가 되기 전부터 나는 이 노래를 좋아했다. 순정만화 주제곡과 응원곡을 적절히 섞어 놓은 것 같은 멜로디에 뻔하지 않은 가사가 좋았다. 특히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울지 않게 나를 도와줘" 이 부분에서는 매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경복궁 담장을 따라 휘어지는 골목 안쪽으로는 참석자들에게 커피와 차, 어묵을 무료로 나눠주는 푸드트럭들이 늘어서 있었다. 정치인과 학교 동문회, 노동조합, 그리고 어떤 명패도 내걸지 않아 아마도 시민들이 자비로 운영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트럭들이었다.

세상을 처음 만난 아이처럼 골목을 쭈뼛쭈뼛 돌아다니다가 학교 급식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나눠 주시는 어묵을 받았다. 쉼터로 제공된 버스 안에서 어묵을 먹으며 분위기에 적응한 후 대로변으로 나서자, 노조 조끼를 입은 어떤 아저씨가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다가 아이에게 주라며 핫팩을 내게 건네주었다.

화난 시민들의 행진 ‘윤석열 즉각퇴진 사회대개혁 4차 범시민대행진’이 지난 12월 28일 오후 서울 광화문앞에서 윤석열퇴진 비상행동 주최로 열린 가운데, 참가자들이 응원봉 불빛을 밝히며 명동입구까지 행진하던 모습.
화난 시민들의 행진‘윤석열 즉각퇴진 사회대개혁 4차 범시민대행진’이 지난 12월 28일 오후 서울 광화문앞에서 윤석열퇴진 비상행동 주최로 열린 가운데, 참가자들이 응원봉 불빛을 밝히며 명동입구까지 행진하던 모습.권우성

과거 스무 살 언저리의 나에게 집회는 주말의 고정된 일정이었을 만큼 익숙한 것이었다. 2000년대 초반 대학에 입학해 한 줌 남아있던 소위 학생운동을 경험한 나에게 집회와 그 문화는 여전히 몸에 새겨진 것처럼 남아있다.

가끔 투쟁가를 흥얼거리거나(단결만이 살 길이요, 노동자가 살 길이요.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투쟁하는 사업장 옆을 지날 때 스피커에서 빵빵하게 투쟁가가 흘러나오면 심장이 쿵쿵댄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노조, ~당, ~단체, ~학생회 등의 단체명이 적힌 깃발들과 인사말을 대신하는 "투쟁!"의 외침, 심장박동수를 올리는 비장하고 결연한 노래들, 노래가 흐르는 내내 계속되는 팔뚝질, 그리고 훈련된 발성의 힘찬 발언들이 내가 겪었던, 그리하여 내가 상상하는 집회의 모습이었다.

때문에 2016년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을 규탄하면서 학생들이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복창할 때 나는 생경함을 넘어 혼란을 느꼈다. 저건 (내가 알던) 집회가 아닌데, (내가 알던) 투쟁이 아닌데. 그리고 그해 연말 내내 계속되었던 대규모 촛불집회는 축제라 할 만한 것이었다. 한 번도 집회에 나가본 적 없다던 동생과 함께 나 또한 크리스마스이브를 거리에서 보냈고, 스스로를 정치무관심층이라 표현하던 친구조차 집회에 다녀왔노라고 고백하던 시절이었다.

유대감에서 비롯된 온기

그런데 집회에 가보니 요즘 시민들은 그때보다도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낫다는 말은 이렇게 고쳐야 한다. 한 사람이 열 걸음을 가는 동안 열 명의 사람은 스무 걸음을 나갈 수 있다고.

자리를 잡고 앉아 투쟁이라고 외치며 인사하는 대학생과 열일곱살 고등학생, 배달 라이더 노조원이라고 소개하는 청년의 발언을 들었다. 집회를 많이 나갔을 때에도 자발적으로(는) 발언을 한 적이 한번도 없는 나는 발언을 듣는 내내 감탄을 거듭했다. 범우주적 카페인 중독자 모임이라고 적힌 깃발을 보며 킥킥댔다. 밴드 허클베리핀과 말로의 공연을 보았다. 한번 나왔을 뿐인데 이렇게 많이 받아도 되나, 황송한 마음이 들었다. 믿을 수 없이 평화롭고 다정한 기운이 가득한 집회였다.

그동안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해 대다수 시민들에게는 불편을 초래하는 집단으로 적대시되었던 노동조합과 '빠순이'로, '사회적 의식'이 없다고 비하 당하던 아이돌 팬들,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는 청년들, 나처럼 아이와 같이 나온 양육인까지. 도저히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이들이 이곳에서 만나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그동안 내가 분노와 무기력, 절망에 시달렸던 건 이곳에, 이들과 함께 있지 않아서였음을 알았다. 유대감에서 비롯된 온기가 우리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내 안의 깊은 곳에 따뜻한 기운이 들어차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일요일, 법원이 공격 당하는 영상을 보았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경찰과 언론인을 공격하고 법원에 난입하여 기물들을 때려 부수고 사무실을 뒤지며 윤석열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한 판사 이름을 외쳐 댔다. 믿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토요일에 느꼈던 희망이 두려움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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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시 26분 지난 19일 새벽, 서부지법 안으로 난입한 폭도들은 유리창과 집기를 모두 부수기 시작했다.
오전 3시 26분지난 19일 새벽, 서부지법 안으로 난입한 폭도들은 유리창과 집기를 모두 부수기 시작했다.락TV 유튜브 캡쳐

사실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을 시작한 이후로 내게는 부쩍 두려움과 분노가 많아졌다.

아이를 안은 우크라이나 피난민 사진을 보았을 때, 계속되는 공습으로 지하벙커에서 학교생활을 하는 우크라이나 아이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아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이스라엘 민간인들이 테러 당했다는 뉴스를 보고는 혹시나 싶어 우리 집안에 아이를 숨길 만한 공간이 있는지를 물색했던 적도 있다.

한동안 무장 괴한이 집에 침입하면 어쩌나 하는 망상에까지 시달렸다. 또 이후 보복의 외피를 쓰고 팔레스타인을 대상으로 아이, 환자를 가리지 않는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을 때에는 고통스러워서 차마 뉴스를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외면했다는 사실에 다시 고통을 느꼈다.

우리나라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고 해도, 나의 삶과 전혀 무관한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 끔찍한 야만 앞에 국제사회라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참담했고 무기력했다.

또 한편으로는 산업을 둘러싼 멈추지 않는 욕망들이 기후재앙이 되어 끔찍한 산불과 홍수, 이상기후 현상으로 전세계 곳곳을 덮치는 것을 보면서 아이가 살아갈 10년, 20년, 30년 후를 생각하면 두려움에 몸서리가 처진다. 이와중에 극우파시즘을 선동하며 다시 정권을 잡은 트럼프 대통령은 기후위기를 멈추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시 거꾸로 되돌릴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2021년 미국 의회 습격사건을 보며 참 미국스럽다고 생각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극우세력의 공개적인 활동 무대가 되고 있다. 물론 전조는 있었다. 된장녀에서부터 시작되어 맘X(불가침의 영역이었던 '모성'을 공격하기에 이른), 한녀, 한남 등 재생산되는 혐오와 적대의 표현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극단의 시대에 아이와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 그것도 잘, 되도록 즐겁게. 그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그 토요일 집회에서 아이와 함께 목격하고 겪었던 연대의 온기를 떠올릴 것이다. 시민들의 유기적이고 화학적인 결합을 되새길 것이다. 되도록 자주 나가서 보고, 듣고, 말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빛의혁명 #집회참가기 #육아일상 #극단의시대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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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다닌 지 10년, 아이를 키운 지는 3년이 되었고요, 이제 막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와 더불어 살기 좋은 세상에 대해 고민합니다.


이 기사는 연재 극단의 시대, 아이와 함께 살아남기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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