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서산 중앙고 교정에 세워진 남정현 문학비 앞에서. 문학비에 '민족자주를 열망한 분지의 작가'라고 쓰여 있다.
남정현
어느 시대나 독재자는 바른 말(글)을 싫어한다. 붓을 꺾고 입틀막을 서슴치 않는다.
박정희는 특히 심했다. <민족일보> 폐간과 조용수 사장 처형으로부터 재임기간 숱한 필화사건을 일으켰다. 여기 소개하는 소설가 남정현의 소설 <분지>사건도 그 중의 하나이다.
1965년, 한일협정을 둘러싸고 국내 정세가 소연할 때 문인들도 비준반대의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지식인들의 발언이 제고되고 있었다. 3월 9일 문인 82명은 "우리는 조국의 비운과 민족의 불행을 초래하는 이 매국 망국적인 악조약의 완전 파기를 위하여 전체 국민의 단결과 궐기를 호소하며…."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남정현도 이에 서명했다.
이날 중앙정보부는 남정현을 구속했다. 4개월 전 <현대문학> 3월호에 실린 단편소설 <분지>에 독자들의 호평이 따랐다. 중정에서 수사를 받은 남정현은 며칠 후 반공법 위반혐의로 서울지점 공안부로 송치되었다. 오랜 재판 끝에 법원의 '선고유예'로 마무리 되었다.
소설 <분지>의 요약문이다.
어머니,
제발 몸을 좀 그렇게 떨지 마십시오. 미관상 과히 좋아보이질 않습니다. 뭐 제가 지금 죽을 것 같아서 그러신다구요. 참 걱정도 팔자시군요. 적어도 홍길동의 제10대손이며 동시에 단군의 후손인 나 만수(萬壽)란 녀석이 아무렴 요만한 정도의 일을 가지고 그렇게 쉽사리 숨을 못 쉬게 될 것 같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누가 보면 웃습니다. 저는 설령 이보다 더한 결정적인 궁지에 몰리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처럼 그렇게 용이하게 미치거나 죽어 없어질 시시한 종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줄거리는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수의 어린 시절, 해방을 맞은 기쁨에 들뜬 어머니는 깨끗하게 몸단장을 하고 아이들과 함께 남편이 빨리 돌아오게 해 달라고 기도를 올린다. 무섭고 훌륭한 아빠가 오신다는 말에 만수와 분이는 온갖 기대에 부풀어 기다린다. 그러나 정성껏 만든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무슨 환영대회에 나갔던 어머니는 저녁 늦게, 절망스럽도록 이지러진 표정에 옷을 찢기우고 피묻은 몸으로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돌아온다. 이렇게 무서운 모습을 한 어머니는 돌아오자마자 옷부터 벗어 내던지고, 알몸으로 가랑이 사이를 쥐어뜯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아무데나 침을 탁탁 뱉어대며 어머니는 만수의 머리를 나꿔채 당신의 가랑이 사이에 들어민다. 악취와 두려움 속에서 만수는 어머니의 음부를 속속들이 본다. 어머니가 미군에게 겁탈당해 미쳤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번지는 가운데 식음을 전폐하고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다 어느날, "이 죽일 놈들아! 날 죽여다오." 애절한 외마디를 남기곤 눈을 감고 만다.
만수는 어머니의 기억을 미칠 듯이 잊으려 애쓰며 20년을 살았다. 그러나 6.25의 피난과 입대를 마치고 돌아온 만수의 앞에 서 있는 아리따운 여인―동생 분이가 스피드 상사의 현지처가 돼 있는 걸 봤을 때, 그는 엄마를 부르며 통곡한다. 이후 그는 분이의 도움으로 양키물건 장사를 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밤마다 스피드 상사가 분이를 괴롭히며, 본국의 마누라 것은 그렇지 않다면서 분이의 하반신을 두고 이러니 저러니 학대와 폭언을 일삼는 것은 오빠로서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차마 항변도 못하고 스피드 상사의 발길질을 견뎌내며 우는 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따라 울기만 하던 만수는 커다란 의문에 싸였다. 스피드 상사의 본부인, 즉 미세스 스피드의 하반신은 어떻게 생겼을까. 속시원히 떠들어보고 의문을 풀어야만 미치지 않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이런 의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어느날, 그러니까 며칠 전에 스피드 상사의 부인이 본국에서 날아온다. 만수는 너무나도 기뻐 곧 조국의 산하를 소개해주겠다는 명목으로 그녀를 향미산 정상으로 유인해 한 가지 청을 한다. 그가 여사의 하반신 때문에 밤마다 곤욕을 치르는 분이의 딱한 사정을 밝히고, 여사의 국부의 비밀스런 구조를 확인해서 그 됨됨을 분이게 알려주고 시정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미세스 스피드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뺨을 후려친다. 만수는 엉겁결에 달려들어 미세스 스피드의 몸을 덮친다. 그가 "원더풀!" 하고 위대한 결론이라도 얻은 듯 미세스 스피드의 몸에서 내려왔을 때, 그녀는 "헬프 미!"하는 비명과 함께 정신없이 산을 뛰어내려간다. 만수가 하늘을 향해 심호흡을 하려는 찰나, 난데없는 총성이 울리고 만수는 펜타곤으로부터 쫓기는 몸이 된다.
펜타곤 당국은 만수를 악마가 토해낸 오물인 동시에 인간 최대의 적으로 판정하고 향미산 전체를 폭파시켜버리기로 결정한다. 이제 그 최후의 시간이 1분 후로 다가왔다. 그러나 만수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
흩어진 육체가 다시 온전히 붙을 기적을 기대한다. 이제 곧 그는 태극 무늬로 아롱진 런닝샤쓰를 찢어 한 폭의 찬란한 깃발을 만들 것이다. 그리하여 바다를 건너 위대한 대륙 여인들의 배꼽 위에 이 깃발을 성심껏 꽂아놓을 작정이다. 그는 두려움에 떠는 어머니를 보며 다시 한 번 소리친다.
"자 보십시오. 저의 이 톡 솟아나온 눈깔을 말입니다. 글쎄 이 자식이 그렇게 용이하게 죽을 것 같습니까. 하하하." (주석 1)
주석
1> <한국문학명작사전>, 231~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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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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