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구라' 탓에 우울했는데, 기분 좋은 구라도 있었구나

[서평] 유홍준의 잡문집,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등록 2025.02.07 10:15수정 2025.02.07 10:16
0
원고료로 응원
'사실 아무 일도 없었으며, 호수의 달그림자를 좇는 것 같다'는 말을 뉴스로 전해 듣고는 부아가 치밀었다. 지난 4일 탄핵심판 5차 변론에 출석한 윤석열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에 관해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서 이같이 말한 것이다.

나는 12월 3일 이후, 잠을 깊게 이루지 못하고 있다. 나에게는 여전히 내란은 진행형처럼 느껴지는 데 그들은 이런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이런 종류의 말을 '거짓말'이라 하고 '거짓말'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을 '구라'라고 한다. 그런 '구라'를 듣다보면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다.


유홍준 잡문집-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2024년 12월 13일 초판3쇄/ 지은이 유홍준/ 펴낸곳(주)창비/ 가격 22,000원
유홍준 잡문집-나의 인생만사 답사기2024년 12월 13일 초판3쇄/ 지은이 유홍준/ 펴낸곳(주)창비/ 가격 22,000원창비

이른 새벽, 김민기 제1집(1971년 초판)을 듣는다. 첫 번째 노래 '아하, 누가 그렇게'가 흘러나온다. 김민기 특유의 중저음으로 불린 노래를 나는 모두 좋아한다. 어젯밤, <유홍준의 잡문집-나의 인생만사 잡문기> 제5장 '스승과 벗'에서 '김민기: '뒷것' 이전, 김민기의 앞모습'을 읽은 터라 노래는 더욱 깊이 마음을 적시고, 어두운 구라에 상처 입었던 마음이 밝아진다.

구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어두운 구라가 있고, 밝은 구라가 있는 것이다. 어두운 구라는 사람을 죽이고, 밝은 구라는 사람을 살린다.

이 책 <유홍준의 잡문집>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 밝은 구라다. 한 사람의 지성으로 다양한 이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그의 삶은 부럽기조차 하다. 그는 삶의 궤적을 돌아보며 쓴 글을 스스로 산문집을 '잡저'라고 한다. 그 이유는 '잡저에는 세상만사가 다 들어 있고 거기엔 인생이 녹아 있기 때문(P.6).'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구성은 이렇다.

제1장 인생만사
제2장 문화의 창
제3장 답사 여적
제4장 예술가와 함께
제5장 스승과 벗
부록 : 나의 글쓰기
자료 : 감옥에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 대학 3학년 때 시험답안지, 김지하 형이 옥중에서 지도한 글쓰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각 장의 내용도 유익하지만, 부록 이후의 내용들이 더 유익했다. 글쟁이 중에서 마지막 한 문장까지, 그것도 부록으로 첨부한 것인데, 독자의 시선을 붙들어 둘 재주를 가진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유홍준은 넉넉하게 그 일을 해낸 뿐만 아니라, 다음에는 또 어떤 저서를 내놓을까 기대하게 하는 것이다. 조선의 3대 구라로 등극할 만하다.

'조선의 3대 구라'는 누구였을까


"언론 통제가 극심하던 1970, 80년대에 재야인사와 문화예술인들은 한편으로는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의지를 다지고 정으로 나누는 술자리를 많이 가졌다. 술자리에 반드시 좌판을 휘어잡는 이야기꾼이 있기 마련인데 그 대표적인 분이 방배추로 더 많이 불리는 방동규 선생이었다....그러다 70년대 황석영 소설가가 등장하여....'황구라'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방동규, 백기완, 황석영이 '조선의 3대 구라'라고 불리게 된 내력이다......이후, 남도 답사에서 황석영 형은 3시간 만에 마이크를 내려놓고 내가(유홍준) 8시간 마이크를 잡으면서......내가 백기관, 황석영과 함께 '조선의 3대 구라'로 꼽히게 된 것이다(PP.336, 337)."

특히, 책의 제1장 인생만사 중에는 '잡초공적비'라는 잡문이 있는데 잡초와 잡문은 잘 어울린다. 그 첫 문장이다.

"사람들은 어려서 자랄 때는 모두들 꽃같이 되기를 바라지만 나이가 들 만큼 들면 잡초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p.22)."

강원도 평창군 청옥산 산마루 육백마지기에는 '잡초공적비'가 있다 한다. 찾아보니 비석 받침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태초에 이 땅에 주인으로 태어나 잡초라는 이름으로 짓밟히고, 뽑혀도 그 질긴 생명력으로 생채기 난 흙을 품고 보듬어 생명에 터전을 치유하는 위대함을 기리고자 이 비를 세우다(p.27)."

저자가 잡초공적비 비석 받침대의 글을 인용한 이유는, 이 책에 실린 잡문의 내용들 모두 '잡초를 예찬하는 잡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록 '좋은 글쓰기를 위한 15가지 조언' 중에서 가장 먼저 '제목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래서 제목만으로도 와 닿는 뜨거움이 있다. 이런 제목들이다.

'우리 어머니 이력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터치 미 뮤지엄', 신학절 : <모내기> 재판과 나, 오윤; 바람처럼 떠나간 민중미술의 전설 김민기: '뒷것' 이전, 김민기의 앞모습......'

책에 실린 유홍준의 글은 따뜻하고, 밝고 명랑하다가 숙연하고, 비장하다. 그가 지닌 재능이 부러워질 정도이다.

그는 뭔가를 볼 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역사적인 사건들에 얽힌 타자의 깊은 삶을 볼 줄 안다. 게다가 맺는 인연들마다 깊다. 이것이 구라의 힘일까? 아니, 진솔한 삶에서 나오는 구라가 아니라면 누구도 감동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꽃차례'라는 글에서 그는 봄이 오면 피어나는 꽃들을 나열한다. 이런 식으로.

'강진 백련사의 동백꽃, 선암사 무우전의 매화, 부석사 진입로의 사과꽃, 한라산 영실의 진달래......(p.29)'

나도 그를 흉내 내어 본다.

'찬물내기 복수초, 천마산 앉은부채, 화야산의 청노루귀, 풍도의 꿩의바람꽃, 수리산의 변산바라꽃, 한라산의 세복수초......'

부채메모 답사를 할 때 부채를 들고 다니며 틈틈히 거기에 쓸 내용을 메모한단다.
부채메모답사를 할 때 부채를 들고 다니며 틈틈히 거기에 쓸 내용을 메모한단다.창비

그는 답사를 다닐 때 '부채'를 들고 다니며 틈틈이 거기에 쓸 내용을 메모한다고 한다. 부채에 큰 설계도를 그린 다음, 글쓰기를 할 때 살을 붙여 완성한다는 것이다. 올 여름에는 나도 부채를 들고 다니며 틈틈이 메모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의 문장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걸은 곳마다 이야기가 피어난다. 그 이야기는 속되게 말해 구라요, 잡문이지만, 실은 구리지도 않고, 천박하지도 않다.

이 글을 마감하는 시간, 김민기 1집에서는 '친구'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 책에 의하면, 이 노래는 김민기가 고등학교 시절 만든 노래라고 한다. 천재성은 타고나는 것일까?

내 주변 현실에서는 구라가 판치는 세상인 듯해 우울했는데, 기분 좋은 구라에 빠져 다시 잡초처럼 일어나기로 했다.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 유홍준 잡문집

유홍준 (지은이),
창비, 2024


#유홍준 #잡문집 #김민기 #오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애 셋 잘 키웠는데... 중년에 남편이 이럴 줄이야 애 셋 잘 키웠는데... 중년에 남편이 이럴 줄이야
  2. 2 특활비 지켜려다 특경비 전액삭감...심우정, 무슨 일을 한 건가 특활비 지켜려다 특경비 전액삭감...심우정, 무슨 일을 한 건가
  3. 3 어느 건물주의 '횟집 임대료 갑질'이 낳은 엄청난 변화 어느 건물주의 '횟집 임대료 갑질'이 낳은 엄청난 변화
  4. 4 응원봉 들고 광화문 가득 메운 시민들"일상 돌아가고 싶다...헌재, 이젠 탄핵해야" 응원봉 들고 광화문 가득 메운 시민들"일상 돌아가고 싶다...헌재, 이젠 탄핵해야"
  5. 5 윤석열 미래 예언한 34세 국힘 의원의 명연설 윤석열 미래 예언한  34세 국힘 의원의 명연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