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걸스플레인(girlsplain) : 광장에 선 '딸에 대하여'

등록 2025.02.10 10:08수정 2025.02.10 10:08
0
원고료로 응원
2030여성들은 어떻게 살아왔길래 광장에 뛰쳐나올까. 우리 이야기는 우리가 기록한다.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앞에서 열린 윤석열퇴진비상행동 주최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9차 범시민대행진’에 참석한 시민들이 피켓, 응원봉, 깃발 등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앞에서 열린 윤석열퇴진비상행동 주최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9차 범시민대행진’에 참석한 시민들이 피켓, 응원봉, 깃발 등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권우성

*걸스플레인(girlsplain)은 맨스플레인(mansplain)을 패러디한 용어. 맨스플레인은 남성이 여성을 향해 거들먹거리며 지식을 뽐내는 모습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어다.

광장에 선 '2030'여성을 조명하는 뉴스의 댓글 창에서 가끔 이런 표현을 만난다. "딸들아 고맙다". 아마도 이 표현은 한국의 '부모세대'가 젊은 여성에게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응원 중 하나일 거다. 하지만 무려 2025년에도 정치의 중심에 선 젊은 여성을 그저 딸이라 부른다니? 이거 참 황당하다.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딸'들은 "딸아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 간담이 서늘해지므로 고맙단 말은, 노땡큐다. 전통적으로 부모가 딸한테 고마워하는 일은 '병간호를 자처함', '하향지원으로 국립대 감', '남동생 학비 보탬' 뭐 이런 것들이니까. 혹자는 "그건 엄마, 할머니 때나 그렇고!"라 말하지만 '2030'여성들에게도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억울하다 말하려는 건 아니다. 이미 슬픔은 소화한 지 오래니까. 그냥, 우리가 여전히 딸이면서도, 그저 딸만은 아니라는 걸 설명해주려는 거다. 정말 마지막으로 알려드린다. 아직 잘 모르시는 딸들의 모습을.

엄마 대신 부엌 엎고, 몰래 KTX 타고 집회에 나가다

새벽은 엄마 대신 부엌을 엎은 딸이다. 그녀는 딸만 넷인 집의 둘째다. 장손인 아버지를 이어 제사를 지낼 아들이 꼭 필요했단다. 하지만 아들은 태어나지 않았고, 실망한 할아버지는 막내 손녀의 이름을 제대로 지어주지 않았다. 엄마는 명절이면 스스로 죄인이 되어 부엌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모든 일은 엄마의 몫이었다. 어느 날 그는 엄마를 도우면서도 참을 수가 없어 사촌 남동생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마! 니, 니, 니! 부엌으로 온나, 들어온나, 이거 날라라". 새벽은 그렇게 매번 싸우며 집안의 풍경을 바꿨다. 이제 그녀는 세상도 바꾸기 위해 "시위 올콘러(모든 시위에 참석하는 사람을 뜻하는 은어)"가 되었다.


진희("민주노총 아저씨들한테 트위터 강의하고 왔어요"
https://omn.kr/2c2f1)는 무려 중딩(!) 때 "MB OUT"을 외친 딸이다. 이명박이 일제고사를 부활시킨대서 화가 났단다. 학교서 시험을 치다가 친구와 짜고 OMR카드에 "MB OUT"을 새겼다. 그리고 교무실에 끌려가 한 시간이나 혼이 났다. 선생은 반성문도 쓰라고 했다. 엄마에게 알렸더니 엄마는 '학생의 자주적인 표현을 왜 막느냐'며 선생에게 따졌다. 세상에는 이런 엄마도 있는 모양이다.

든든한 부모 곁에서 하고픈 것 다 하며 쑥쑥 자란 진희는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인 소녀상을 지키려다 경찰에 연행된 적도 있다. 여동생은 뉴스를 통해 경찰에 잡혀가는 언니를 보고는 황급히 경찰서로 달려갔다. 소녀상을 지키려던 언니를 지키러. 결과는? 여동생도 그길로 '운동권'이 되었다. 두 사람은 이제 광장을 지킨다.


서현은 세월호에 대한 엄마의 퉁명스런 말에 분노하는 딸이다. 사실, 서현의 집은 각자 알아서 '정치적 중립'을 유지해야 하는 분위기다. 부모님이 모두 공무원으로, 가족들하고만 있을 때도 정치색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현은 세상이 좀 더 궁금했다. 그래서 혼자 KTX를 타고 몰래 박근혜 탄핵 집회에 다녀왔다. 그 일은 언니도 모르게 묻어 두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만 입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세월호 뉴스를 보던 어머니가 '아직도 세월호 타령이냐' 할 때였다. 서현은 이렇게 대들었다. "엄마, 쟤네 나랑 동갑이에요. 내가 수학여행을 1년 일찍 간 게 아니었으면 내가 저거 타고 갔을 수도 있어요." 오래 숨죽였던 딸은 이제 더 참지 않는다. 서현은 12.3의 밤에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갔다.

소결(' TK 콘크리트는 TK의 딸들에 의해...' 이 대자보를 쓴 이유
https://omn.kr/2c2f5)은 부모라는 벽에 세게 부딪힌 경험을 대자보에 쓰는 딸이다. "TK의 콘크리트"는 다름 아닌 그녀의 부모 그 자체다. 부모는 딸이 쓴 대자보가 전국의 탄핵 광장을 울려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도 뉴스를 탔더니 이전보단 모욕의 강도가 좀 약해져서, "볼 것도 없는 좌파 언론"이라 인정해 줬단다.

소결은 평생을 단련한 덕에 이제는 그 표현마저도 대자보와 방송에 옮길 수 있다. 그럼에도 소결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악몽. 그녀는 광장에 다녀온 이후면 이명박에게 취조당하고 이승만에게 고문당하는 꿈을 꾼단다. 오랫동안 부모에게서 집회는 불법이고 위험한 것이라 들었던 결과다. 소결은 여전히 광장에 나서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제 발로 광장에 나서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고 말한다. 게다가 광장엔 마음 맞는 사람들만 있으니 오히려 좋다.

'딸'들이 부순 세계, '딸'들이 만들어낸 세계

광장에 선 '2030'여성은 이런 딸들이다. 딸들은 미처 다 자라기도 전부터 세상을 보고, 듣고, 읽으며 제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왔다. 부모가 찬성하든 반대하든, 자기의 행동을 지지 받든 무시 당하든, 꿋꿋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왔다. 지금의 딸들은 적어도 MB정부 시절 광우병 집회부터 광장에 있었고, 필요한 순간마다 광장에 서서 국가의 위기, 여성의 위기에 대응해 왔다.

이토록 경험이 풍부한 민주시민을 그저 '딸'로만 부르기에는 뭔가 아깝지 않은가? 그렇다면 앞으로는 한 번 딸들에게 다르게 기대를 걸어보시라. 흔쾌히 동료 시민으로 받아들여 보시라. 딸들이 정치로 나아가는 길을 섣불리 막지 마시라. 딸들이 지닌 가능성은 이보다 더 클 테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해당 기사는 브런치에 아카이빙 목적으로 게시될 수 있으며, 추후 인터뷰집 출간에 활용될 수 있습니다.

▣ 제보를 받습니다
오마이뉴스가 12.3 윤석열 내란사태와 관련한 제보를 받습니다. 내란 계획과 실행을 목격한 분들의 증언을 기다립니다.(https://omn.kr/jebo) 제보자의 신원은 철저히 보호되며, 제보 내용은 내란사태의 진실을 밝히는 데만 사용됩니다.
#맨스플레인 #탄핵집회 #2030여성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페미니스트, 여성이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를 사랑한다. nahyun_choi@pusan.ac.kr


이 기사는 연재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천세대 아파트 상가인데 '텅텅'... 쓰레기 분리수거장은 '호황' 천세대 아파트 상가인데 '텅텅'... 쓰레기 분리수거장은 '호황'
  2. 2 윤석열 '입틀막'에도 차분했던 앵커, 왜 장동혁에게 '목소리' 높였나 윤석열 '입틀막'에도 차분했던 앵커, 왜 장동혁에게 '목소리' 높였나
  3. 3 윤석열 시절, 택시에서 자주 들었던 저주의 말들 윤석열 시절, 택시에서 자주 들었던 저주의 말들
  4. 4 코스피 5천, 돈 얼마 벌었냐고? 2000년생 동창들의 대화 코스피 5천, 돈 얼마 벌었냐고? 2000년생 동창들의 대화
  5. 5 저가항공이니 탑승동? 인천공항의 같은 돈, 다른 서비스 저가항공이니 탑승동? 인천공항의 같은 돈, 다른 서비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