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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운을 걸어보는 디저트 한 조각

프랑스 사람들이 새해에 나눠 먹는 '갈레트 데 루아'

등록 2025.02.11 17:32수정 2025.02.11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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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간 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집들이 선물로 무얼 사갈까 고민하다 해가 바뀌고 처음 만나는 자리이니 갈레트 데 루아를 만들어 가기로 했다.


'왕의 갈레트'라는 뜻의 갈레트 데 루아는 주현절(예수의 출현을 축하하는 기독교의 교회력 절기이다. 날짜는 전통적으로는 1월 6일이나, 나라에 따라서는 1월 2일부터 8일 사이의 주일(일요일)로 하기도 한다)을 기념하여 먹는 디저트다.

프랑스에서는 1월이면 베이커리마다 갈레트를 굽느라 거리에 버터 향이 가득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떡국처럼 새해를 맞으며 가족이나 친지들과 갈레트 데 루아를 나눠 먹기 때문이다. 갈레트 안에 페브(도자기 인형)를 숨겨 한 해의 운을 점치기도 한다. 페브가 든 파이 조각을 갖는 사람은 그날의 왕이 되는 행운을 얻고 새해에 소원이 이루어질 거라며 사람들에게 축하받는다.

 프랑스에서는 1월이면 베이커리마다 갈레트를 굽느라 거리에 버터 향이 가득하다.
프랑스에서는 1월이면 베이커리마다 갈레트를 굽느라 거리에 버터 향이 가득하다.김현진

갈레트는 버터와 밀가루를 겹쳐 만든 푀유타주(밀가루 반죽으로 버터를 감싼 뒤 반죽을 접고 밀대로 눌러 미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그 사이사이에 일정한 휴지시간을 두는 방법으로 만든다) 반죽에 아몬드 크림을 넣어 굽는다. 반죽을 접고 밀어 펴는 과정을 반복해야 해서 손이 많이 가는 디저트다. 그러는 사이 버터가 녹지 않게 하고 반죽의 모양을 고정하기 위해 냉장 휴지까지 거친다. 갈레트 하나를 만드는데 하루가 넘게 걸린다.

버터와 반죽의 상태가 잘 맞아떨어져 적은 힘에도 반죽이 쓱쓱 펼쳐질 때의 리듬감, 반죽이 늘어나 반듯하게 직사각형을 이룰 때의 단정함, 반죽이 손바닥에 닿는 몰랑한 촉감까지 과정의 일을 좋아한다. 균일한 힘으로 밀어 펴기를 거듭하기, 그 단순한 작업의 반복을 즐긴다.

시간을 겹겹이 쌓아 완성하는 페이스트리가 내겐 삶의 은유처럼 보인다. 푀유타주 반죽 사이로 필요한 시간과 노력이 깃들어야 기름종이 여러 장을 포개어 놓은 듯, 반죽이 서로 들러붙지 않고 부풀어 오를 수 있다. 무언가에 공을 들이면 무의미하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이 하나의 디저트가 온전히 보여준다.


갈레트 데 루아로 한 해의 운을 점친다

전날 미리 만들어 놓은 반죽 사이로 아몬드 크림과 말린 과일을 넣고 잊지 않고 작은 페브도 숨겼다. 갈레트 윗면에는 딸아이가 눈 결정체 모양을 그려 넣었다. 성형을 마친 갈레트를 뜨거운 오븐에 넣고 기다렸다. 푀유타주가 고르게 잘 부푼다면 올 한 해 나의 운도 좋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갈레트의 성패에 내 운을 걸어보는 일, 그것도 갈레트 굽는 재미 중 하나다.


 갈레트 윗면에는 딸아이가 눈 결정체 모양을 그려 넣었다.
갈레트 윗면에는 딸아이가 눈 결정체 모양을 그려 넣었다.김현진

갈레트 하나로 한 해의 운을 점친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은 손 쓸 도리 없이 닥치고 지나갈 것이니 이처럼 사소한 일에 미래를 건다. 어쩔 수 없는 일 앞에서는 겸허히 시간의 힘을 빌어보는 도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신 내가 손 쓸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에 닿게 하고 싶다. 거기에도 운은 필요하다. 정직하게 노력을 들이면 그 노력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일, 충실한 과정이 마땅한 결과로 귀결되는 것이야말로 행운인지 모른다.

완성된 갈레트를 오븐에서 꺼내 보니 두 배 이상으로 잘 부풀었다. 층층이 결이 살아 있는 걸 보니 올해는 운수대통인가 보다. 순조롭게 일이 풀리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그럴 것 같다. 말에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언어는 우리를 그런 미래로 이끌어준다.

갈레트를 상자에 담아 지인의 집으로 갔다. 그 집의 여섯 살배기 꼬마가 우리를 반겼다. 수줍음 많고 낯을 가리는 아이다. 그런 성격 때문에 오랜만에 만나면 서로에게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걸렸는데 이번엔 악수하자고 내미는 내 손을 피하는 대신 슬쩍 잡아주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천진난만한 질문을 거침없이 던졌고 자고 가라고, 더 놀다 가라며 다정한 말을 아낌없이 건넸다.

며칠 전 백일이 된 그 집의 둘째는 어찌나 순하고 잘 웃는지, 부부의 얼굴에는 육아로 지친 기색보다 아기 닮은 미소가 가득하다. 내성적이지만 솔직하고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다정한 엄마를 닮은 첫째, 온화하고 평온한 아빠를 닮은 둘째. 두 아이를 보며 부부는 참 운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지닌 말의 토양이 그처럼 다정하고 온화해서 아이들의 말과 표정도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자연스레 나와 내 아이의 말에 대해 생각이 이어졌다. 아이가 자랄 때 내 말의 토양은 어땠더라? 닦달하고 꾸짖는 말이었을까, 수용하며 안아주는 부드러운 말이었을까?

나와 남편은 잠들기 힘들어하고 울음소리가 크고, 그만큼 소리에 예민한 아이를 키우느라 육아에 애를 먹었다. 백지상태의 한 존재가 서서히 채워져 가는 과정을 신비롭게만 바라보지 못했다. 아이 때문에 내가 성장하지 못할까 두려워 아이가 빨리 자라길 바랐던 날엔 아이의 더딘 속도를 온전히 존중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 안에서 부정적이고 우울한 말,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이 무성히 자라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닥치고 닥쳐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런 일에 휘둘리다 때로는 맞서다 결국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대신 내가 손을 쓸 수 있는 대상으로 눈을 돌렸다. 내 안의 말을 바꾸는 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내 안의 언어는 스스로 바꿀 수 있다.

나만의 정원에서라면 언제나 내가 왕

말의 정원을 일구는데 글쓰기가 손에 잘 맞는 호미 역할을 해주었다. 잡초처럼 세를 확장하는 부정적인 말을 수시로 잘라내고 건강하고 다정한 말, 용기를 불어넣는 말을 꾸준히 심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찾고 세상에 들려주고 싶은 말을 연습하면서 말의 정원을 가꾸었다. 잡초로 무성하던 곳을 정돈하자 하나둘 꽃과 싹이 보였다. 언어가 풍성해질수록 삶의 토대가 단단해지는 기분이다.

솔직함과 용기, 다정함을 본래의 토양처럼 지니고 태어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타고나지 못했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 글쓰기라는 호미, 독서라는 삽으로, 혹은 각자에게 익숙한 도구로 내면의 정원을 가꿔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재능처럼 언어라는 재능에서도 타고나는 것보다 노력이 중요하다. 그 정원은 꾸준하고 균일한 반복으로 시간과 노력을 층층이 쌓을수록 아름다워질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갈레트를 나누어 먹었다. 올해의 왕은 누가 되었을까? 자기만의 정원에서 행운이 들어올 자리를 가꾸는 이들 모두가 왕이 아닐까. 우리는 각자의 내면의 정원에선 저마다의 왕이니까. 어떤 말을 자신에게 들려주는 왕이 될지 선택할 수 있다. 각자의 정원에 긍정과 다정, 용기의 씨앗을 심으며 풍요를 불어넣는 왕이 되면 어떨까? 성실한 과정이 좋은 결과로 향하는 운은 당신이 기억하는 한 그 정원에 내내 함께할 테니까.

모두가 자기만의 정원을 성실히 가꾸다 삶이라는 정원에서도 멋진 왕이 되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갈레트데루아 #올해의왕 #새해의행운 #나만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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