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 '아빠'만큼 '좋은' 교사였을까

꼰대 담임의 한 해 돌아보기

등록 2025.02.11 12:42수정 2025.02.11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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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담임교사 역할은 앞으로 교사 생활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다. 학생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꼰대'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시험대. 비극으로 끝날지도 모르는 그 시험대에 올랐다,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고."
(오마이뉴스, 2024년 2월 20일, https://omn.kr/27hmt)

1년 전 담임을 맡겠다고 고집하고 나서 썼던 글 마지막 문단이다. 한 해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물들어버렸다. 조문영이라면 '연루되었다'라고 했을 것이다(조문영, 2024, <연루됨>, 16~17쪽, 글항아리).

교사는 직업 특성 덕분에 우연한 마주침이 만든 수많은 사건을 접한다. 매년 새로운 만남과 헤어짐을 되풀이한다. 장단점이 모두 있다. 가끔 마주치는 한 명 한 명의 깊게 접힌 주름을 폈을 때 나타날 장면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하기도 한다.

지난해 '우리 반' 학생들은 유난히 내 마음에 자신들의 색을 칠해 버렸다. 내 MBTI는 INTP다. 'P'를 'J'로 오해할 만큼 '극 T'다. 오랜 교사 생활로 몸에 밴 친절을 다정함으로 오해하는 이들도 있다. 건조한 성격 덕분에 이별을 쉽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학생들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유독 작년 반 학생들은 내 심장이 굳지 않았음을 불쑥불쑥 보여줬다.

학생들과 마주하는 시간이 설레고 즐거웠다. 문득문득 '나만 좋은 거 아냐?'라는 두려움이 스쳤지만, 모른 척했다. 틈만 나면 교실을 찾는 담임이 지겨워서라도 '배경'으로 여길 만도 한데, 마지막 날까지 즐겁게 맞아줬다.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작별 인사를 나눈 지도 한참 지났지만, 실감하지 못했다. 교무실 짐을 치우고, 텅 빈 교실에 들어서자 갑자기 '이별'이 달려들었다. 매년 반복되는 만남과 헤어짐이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직도 낯설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반복'은 불가능하다는 들뢰즈(Deleuze)의 말이 현실로 느껴진다(들뢰즈, 김상환 옮김, 2004, <차이와 반복>, 25~34쪽, 민음사). 삶은 재현(representation)되지 않는다.

뜨거웠던 시간이 지나갔다. 온기가 강하게 남았지만, 이제 돌아볼 때가 왔다. 과연 나는 어떤 담임교사였는지 '비판적으로' 되돌아볼 때가 됐다. 익숙하게 지나갔던 시간을 다시 퍼 올려 낯설게 따져보려고 한다. 지젝(Žižek)이 한 주장처럼, 기준은 냉정해진 '지금'이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

"과거의 잘못을 지금의 기준으로 재단해야 한다."(지젝, 노윤기 옮김, 2025, <자유 : 치유할 수 없는 질병>, 46쪽, 현암사).

'우리의 영원한 아빠 홍규 쌤', 우리 반 학생들이 마지막 '롤링 페이퍼'에 적은 제목이다. 수학여행 사진 갈무리 제목은 '딸 부자 몽규'였다. 지나치게 분에 넘치는 말이다. '몽규'는 내 별명 가운데 하나다. 나 스스로 만든 것인데, 유래는 매우 유치하다. 실제 이름인 '김홍규'를 빠르게 부르면 '기몽규'로 들리기도 한다. 특별한 의미는 없다.


내란 발생 이전까지만 해도,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라는 한탄과 괴담이 세상을 떠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아빠'라고 불렸으니, '좋은' 교사라고 불러도 될까? 내가 생각하는 훌륭한 교사 모습은 수많은 이들이 말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르치려 들지 않는 교사', '소통이 가능한 교사', '배우는 교사', '성찰하는 교사 ', '함께 하는 교사', '학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교사', 무엇보다 '자신과 학생을 평등한 존재로 여기는 교사'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내가 정한 기준에서 무엇 하나 해당하는 항목이 없다. 한 가지, 지금 '성찰하는 교사' 시늉은 하고 있다. 자세히 따져볼 만한 게 없다. 우리 반 학생들의 나에 관한 규정을 준거로 삼는다면, 그나마 할 말이 조금이라도 있겠다. 학생들이 정한 기준과 규정에 해당하는지, 그 기준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과연 나는 지난해 우리 반 학생들에게 '아빠'만큼 '좋은' 교사였을까?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일까? 초등학교나 유치원 교사의 절반 정도라도 학생들에게 에너지를 쏟았을까? 쉽게 답할 수 있다. '아니다'. 50대 중반의 '아저씨' 담임을 포장할 마땅한 호칭이 없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아빠'라는 개념은 개인에 따라 다양한 의미와 어감을 지니지 않는가. 생각해보니 이보다 적절한 말을 찾기도 어렵다. '좋은 아빠'는 분명 아니었다. 따뜻하고 세심하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쏟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아빠'라는 규정은 어떨까? 학생들은 분명히 나를 '좋은 아빠'처럼 따스하게 대했다. 깊게 엮여서 좋을 것 없는 교사로 대하지 않았다. '냅다' 카메라를 들이밀어 '인생 사진'을 만들어 주고, 자신들의 세계에 벽을 쌓지 않았다. 어설픈 담임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고 스스로 할 일을 찾았다. 귀찮고 힘들 텐데도, 하릴없이 자주 교실을 찾는 담임을 언제나 환대했다. 학교 밖에서 있던 일을 이야기하고, 카페인 중독인 나를 위해 잔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학생-교사' 관계가 '유사 가족화' 된 현상은 어떨까? 김지혜가 <가족각본>(2023, 창비)에서 잘 보여준 것처럼, 한국에서 '가족'은 각종 차별을 공식적으로 숨기거나 모른 척하게 만드는 제도적 수단이 되곤 한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교사 권위'의 상실이 아니라 오히려 '등장'과 '은폐'이다.

''포스트모던'한 사장은 자신이 회사의 주인이 아니며 공동의 창의력과 열정을 조율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직원 사이에 형식과 장벽은 없어야 하며 자신을 별명으로 불러 달라고 청한다. … 하지만 … 그는 여전히 우리의 주인이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에서 지배의 관계는 개인의 자기 부정을 통해 작동한다."
(지젝, 노윤기 옮김, 2025, <자유 : 치유할 수 없는 질병>, 40~41쪽, 현암사)

지젝은 위 글에서 '좋은 사장'이 은폐한 것을 드러냈다. 그의 말은 기업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학교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우리 반' 학생들의 과분한 표현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조심스럽게 과거를 돌아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좋은 교사'가 꼭 학생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학교 안 다양한 문제를 은폐하게 만들 수 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움이 뒤섞인다. 유난히 그들의 그늘이 짙게 느껴진다. 돌아보는 과정이 과거에 연연하는 것으로 생각될 정도다.
#그리움 #담임교사 #부족함 #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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