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동주 시인 추도식에서 참가자들이 윤동주 시인 시비에 꽃을 바치고 있습니다.
박현국
윤동주 시인은 1942년 10월 도시샤대학 문학부 문화학과 영어영문학 전공 학생으로 편입학하였습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우리말로 시를 쓴다는 이유로 1943년 7월 항일 독립 운동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후쿠오카 형무소로 옮겨져 1945년 2월 16일 숨을 거두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유족 대표로 참석한 조카 윤인석 교수께서는 학교와 사람과 관련된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윤인석(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교수는 30년 전 윤동주 시비를 세우는 자리에서도 도시샤대학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대학을 비롯한 학교에선 대부분 일정한 기간 동안 학습 활동을 하고, 자격을 갖추면 졸업을 합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스승과 더불어 수업 시간에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과제를 수행하면서 성취도를 높입니다.
학교에서는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공부뿐만 아니고, 같은 목표를 가진 동료들끼리 사귀면서 정보를 교환하고, 자료를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경험을 쌓기도 합니다. 대부분 학교를 마치거나 졸업하면 일자리를 찾아서 떠나거나 다른 곳에서 배움을 이어 가기도 합니다. 학교는 수업과 공부, 친구와 경험,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키우는 곳이기도 합니다.

▲ 윤동주 시인 추도식에서 한일의원연맹 주호영 국회부의장과 주오사카총영사관 진창수 총영사님께서 인사말을 하셧습니다.
박현국
윤동주 시인 역시 1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교토 도시샤대학에서 영문학도로서 공부하면서, 새로운 희망과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암울한 일제 강점기 한반도 출신 유학생에게는 그런 것들이 밤거리를 활보하는 사치였고,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 사상범으로 체포되기 직전까지 어려움과 위기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가지고 도시샤 대학 캠퍼스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교토에서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어 세상을 마감했습니다.
유족 대표로 참석한 윤인석 교수는 윤동주 시비가 있는 도시샤대학 캠퍼스가 여러 가지로 뜻깊은 장소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은 시간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합니다. 사람은 익숙해진 장소를 기억하고 평안함을 느낍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윤동주 시인이 체험하면서 써 내려갔을 시를 읽어봅니다.

▲ 윤동주 시인 추도식에서 교토국제학교 1학년 기타무라(北村 天音) 학생이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외워서 낭독했습니다.
박현국
쉽게 씨워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여섯 다다미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라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 한줄 시를 적어 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 받어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만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가?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씨워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여섯 다다미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후의 악수.
이번 윤동주 시비 건립 30주년 추도식에는 윤동주 추모 모임 회장 박희균, 주오사카대한민국총영사관 진창수 총영사, 한일의원연맹 주호영 국회부의장 등이 참석하여 인사말을 했으며 교토 국제학교 1학년 기타무라 학생이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추도식은 참가자들의 헌화로 마쳤는데 참가자들이 많아서 긴 줄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30년 전인 1995년 도시샤대학 캠퍼스에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세워질 때에는 여러 가지 반대 의견이 있었습니다. 도시샤대학은 기독교 재단 대학입니다. 기독교에서 신 이외의 형상에 절하고 숭배하는 것은 우상 숭배라고 금기시합니다. 그렇지만 윤동주 시인과 작품이 남긴 업적에 입각하여 한일 두 나라의 미래와 역사적 반성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된다고 주장하여 성사되었습니다.

▲ 윤동주 시인과 정병욱 교수입니다. 일제강점기 어두운 시절 윤동주 시인이 쓴 시는 정병욱 교수가 잘 보관했다가 시집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민족시인 윤동주의 시, 세상에 알린 벗 정병욱, https://omn.kr/28vsh)
박현국
교토에서 윤동주 시비는 한국인이나 윤동주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는 유명한 장소입니다. 특히 교토를 찾는 한국인 여행객은 나이나 성별을 불문하고 누구나 한번 이상 찾아갑니다. 시비에는 늘 새로운 꽃이 놓이고, 방명록에는 늘 새로운 이름이 적혀지고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 추모 모임 역시 한국 사람뿐만 아니고, 많은 일본인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추모회에 참석한 일본 사람은 윤동주 시를 읽기 위해서 한국말을 열심히 공부했고, 이제는 윤동주 시를 일본어로 바꾸는 일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27세 젊은 나이에 형무소 살이를 하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생애뿐만 아니라 그가 남기신 주옥 같은 시들은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을 변화시키고, 우리 말, 우리 시, 우리 글의 뛰어난 가치와 수준을 한 층 더 높였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 한 사람의 예술가를 소중히 여겨야할 까닭이기도 합니다.

▲ 윤동주 시인의 조카인 윤인석 교수님께서 유족 대표로 인사를 했습니다.(사진 가운데에서 왼쪽으로 두번째 )
박현국
주최자 및 참고누리집> 윤동주 시인 추모 모임, 도시샤코리아동창회, 도시샤 코리아연구센터, https://do-cks.net/、202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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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일본에서 생활한지 30년이 되어갑니다. 이제 서서히 일본인의 문화와 삶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한국과 일본의 문화 이해와 상호 교류를 위해 뭔가를 해보고 싶습니다. 한국의 발달되 인터넷망과 일본의 보존된 자연을 조화시켜 서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교류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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