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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5.02.22 10:42수정 2025.02.22 10:42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중학교 1학년(오는 3월이면 2학년)인 딸이 하나 있다. 새해가 시작될 무렵, 아이는 방학을 맞아 학원을 다 끊어달라고 했다. 이미 아이의 마음이 뜬 것 같아 몇 가지 약속을 하고 아이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매일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아이를 보는 건 쉽지 않았다. 한 달이 거의 다 지날 즈음, 나는 아이와 타협을 했다. 집 근처 유명 대형학원에서 영어 테스트를 받아보기로. 테스트 당일. 아이는 대형학원은 절대 다니지 않겠다고, 자신은 오로지 테스트를 위해 가는 거라고 못을 박았다.
나를 당황시킨 상담 실장의 질문
영어 테스트 시간은 70분이나 됐다. 긴 테스트 후 아이도 나도 지쳤을 때 상담이 시작됐다. 빨리 상담을 끝내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왜 학원을 옮길 생각을 하셨어요? 예전엔 어떤 학원에 다녔나요?"
상담 실장의 질문에 내가 답했다.
"동네 학원만 쭉 다녔어요. 한 선생님에게만 7년 정도 배웠죠."
"그 선생님께 배웠을 때 어땠는지, 그리고 왜 테스트를 받으러 왔는지부터 말해 볼까요?"
이번에는 아이가 대답했다. 상담 실장은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말했다.
"소이(가명)야. 너에게는 아주 훌륭한 두 가지 장점이 있어. 우선은 어떤 사람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면 그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거야. 충성심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넌 사람의 단점보다 장점을 더 크게 보는구나. 기존 선생님의 단점도 알지만 장점을 아주 크게 이야기하네. 오케이, 알겠어. 근데 너 정말 멋진 아이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몇이나 될까.
"어머니, 제가 기존 선생님의 장점이 있으면서 그 선생님의 아쉬운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선생님을 잘 연결해 주고 싶은데요. 그러려면 아이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소이는 어떤 아이인가요? 아이에 대해 좀 말해주세요."
순간 백지가 됐다. 내 아이는 어떤 아이인가. 누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는가. 보통 친구들과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한 명이 "우리 아이가 게임만 해서 속상해 죽겠어"라고 하면 "우리 아이도 그래, 핸드폰이 아주 손바닥에 붙었지" 하고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면 나도 질세라, "얘, 우리 애는 어떤 줄 알아?" 하고 아이의 치부를 드러낸다.
대부분의 대화가 이런 식이었는데, 우리 아이는 어떤 아이냐고? 우리 아이는 어떤 아이인가.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선생님 매칭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학습적인 부분을 말씀드리자면, 저희 아이는 칭찬을 해줄 때 더 잘하는 아이입니다. 잘한다고 하면 더 잘하려고 하는 아이고요, 왜 못하냐고 하면 이를 악물고 하기보다는 튕겨져 나가는 경향이 있어요. 그리고 저희 아이는 노래하는 걸 좋아합니다. 또래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릴스나 인생네컷 찍는 것도 좋아하고요."
아이에 대해 말하는 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이가 하루종일 유튜브와 인스타만 보는 게 아니라 나름 공부도 하려고 하고 성적에 대한 고민도 있는 입체적인 사춘기 아이로 다가온다.
실장은 아이를 보며 또 한 번 멋지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덧붙일 이야기가 있는지 물었다. 아이는 내 말에 동의하고는 몇 가지 예시를 덧붙였다. 아이를 보아하니, 이 학원에 다닐 건가 보다. 아주 진지하게 대답한다.
질문이 이어졌다. 계획을 세워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지, 외향적인 편인지, 책은 얼마나 읽는지, 어떻게 읽는지. 나는 모든 질문에 조심스럽게 답했다. 혹여나 실제 아이와 다른 말을 전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어서다.
평소에도 아이에 대해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았을까. 실장은 나와 아이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경청했다. 그러고는 아이에게 '엄마와 이렇게 소통이 잘 되다니, 넌 정말 행운아구나'라는 말도 했다. 아이가 옆에 앉은 날 보고 씩 웃었다.
우리 집 중2 태풍 소멸 프로젝트 발동

▲닫힌 아이의 방문. 아이의 방문은 열려 있을 때보다 닫혀 있을 때가 더 많다.
김지은
나는 고개를 돌려 코를 푸는 척하면서 눈물을 닦았다. 그 전날, 내가 아이를 잘 못 키웠다고 생각했다. 퉁명스러운 말, 냉소적인 눈빛. 아이는 이미 내 손을 떠났다. 나는 아이에게 아주 미미한 영향만 미칠 뿐이다. 그럴 때 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그사이 아이의 방문은 닫힌다. 무력하다.
상담실장은 아이가 갈 수 있는 반과 그 반 담임의 스타일을 설명하시며 아이가 직접 반을 선택할 수 있게 했다. 테스트의 결과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아이는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 앞에서 다른 사람이 됐다.
상담을 마친 나와 아이는 무척 기분이 좋아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집은 학원에서 걸어서 40분 이상 걸린다. 학원에 올 때와 집에 갈 때의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아이는 어릴 때처럼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내가 모르는 여러 사건이 있었고 아이 혼자 속앓이를 한 모양이다. 아이를 오해했다. 집에 와 남편에게 상담 실장에 대해 말하니, 남편은 상술이라고 했다. 나는 설령 그게 상술이라도 상관없다고 했다.

▲노트북도 책도 노트도 덮자 급한 일을 하고 있더라도 아이가 말을 걸어올 때, 아이의 눈을 보자.
김지은
겉이 아니라 속을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려면 먼저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고, 나에게 말하는 사람의 장점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중학교에 들어가 말수가 부쩍 준 아이가 가끔 말을 걸어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노트북을 덮고 아이의 말을 들어야겠다. 그리고 틈이 있을 때마다 아이의 장점을 말해주어야지.
이제 곧 중2, 태풍 전야다. 수증기를 흠뻑 머금고 과잉에너지를 발산하려는 중2 태풍을 소멸시키려면 경청과 칭찬이 필수다. 강력한 태풍도 육지에 올라오면 적은 수증기량에 저절로 소멸 된다지. 단단한 지지와 경청으로 중2 태풍을 소멸시켜 보자. 우리 집 중2 태풍 소멸 프로젝트가 발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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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살아 갈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며 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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