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둑 소녀> 61쪽.
문화기획선 고잉미랑호
그러던 어느 날 윤정은 교통사고를 당해 인근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곳에서 시각장애인 미지와 만난다. 이들이 입원한 병원이 화상(火傷) 전문 병원이었다는 점에서 미지의 병명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미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미지의 어머니는 어릴 때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 후 아버지는 노모와 함께 살게 된다. 그가 친절했으면 참 좋았겠지만,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윤정의 아버지처럼 폭력적이었다. 딸이 시각을 잃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딸의 운명이 '절벽' 같다며 불안에 떨게 했다.
집안일도 딸의 몫이었다. 음식을 만드는 것도 그중의 하나다. 음식을 한다는 것은 뜨거운 물과 불을 다루는 것이니 앞이 보이지 않는 미지에게 실수는 치명적인 위험이다. 화상은 그렇게 입은 것이다. 미지의 삶은 편치 않다.
그런데 이것뿐이 아니다. 미지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가 나이가 많을 뿐만 아니라 눈이 보이지 않다는 점을 들어 헤어지자고 통보한다. 남자 쪽 부모님이 반대한다는 것이 이유다. 하지만 부모는 핑계다.
그는 장애를 가진 미지를 감당할 수 없었던 거다. 이 사실이 미지를 더욱더 슬프게 한다. 그러나 미지는 주저앉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을 당당히 한다. "저 가로등 불빛이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비춰주듯. 나도 내 남은 빛으로 사람들을 비춰주며 살고"(90) 싶다고 말하는 건강한 사람이다.
미지가 세상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그녀에게 친절한 손짓을 보낸다. 그녀는 처음에 이것을 동정으로 생각했다. 동정은 누군가를 안타깝게 여기는 연민과 비슷한 감정이다. 이런 마음을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데 점차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동정'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는 자신이 놓인 위치를 냉정히 받아들이고 현실을 직시하려는 마음이다.
도둑질을 그만두게 된 윤정
윤정은 미지의 이런 삶과 태도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버릇을 고쳐먹기로 마음먹는다. 장애인 활동 보조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의 역시 윤정으로 하여금 도둑질을 그만하게 하는 하나의 원동력이 된다. 국가에서 보조해 주는 사람에게 돈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정폭력이 난무했던 자신의 삶보다 더 힘겹게 살아가는 미지의 삶은 윤정을 반성하게 한다. '작가의 말'을 잠시 읽어보기로 하자.
반려자의 아버지는 산업재해로 장애인이 되었다. 급작스레 아버지를 돌보게 되면서 그가 겪었던 혼란과 갈등은 연애 때부터 지금까지 고스란히 내게도 전해져 온다. 어린 시절 만난 미지 언니가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겪어간 삶의 다른 이면들을 보면서도 그랬다. 어린 시절 만난 미지 언니, 그리고 지금의 반려자를 통해 그동안 외면해 온 시선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를테면 가난, 장애,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삶 같은 것들.
나는 미지 언니를 만나 세상을 보는 시각을 다시 배웠다. 내 옆에 존재한 적 없던 '장애'를 가진 사람을 미지 언니를 통해 처음 겪었다. 밝은 곳 보다 어두운 곳에 시선을 두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상처와 마음을 미지 언니가 알아차리고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기에 연약함을 숨길 수 없는 미지 언니 앞에서, 숨기고 싶었던 나의 상처와 연약함을 오히려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 작가의 말 中
<도둑소녀>의 작가 고미랑은 남편의 아버지가 산업재해로 장애인이 되고 난 후, 겪어야 했던 혼란과 갈등이 연애 시절은 물론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진다고 고백한다. 누군가를 돌보는 것은 이처럼 당사자뿐만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지친다는 표현이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돌봄 행위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 〈도둑 소녀〉 마지막 장면
문화기획선 고잉미랑호
낭떠러지의 삶을 씩씩하게 견디는 미지 언니를 떠올리면서 만화가는 "세상을 보는 시각을 다시 배웠다"라고 말한다. 미지 언니는 불편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남들이 보지 않은 '어두운 곳'이나 보이지 않는 '상처'를 품으려고 한다. 이런 시선은 잃어버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살결이다.
무엇보다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턱'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숨길 수 없었던 미지 언니의 삶은 자신의 상처와는 비교할 수 없다. 고미랑은 굳센 미지 언니의 삶을 보면서 연약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고 한다. 이런 용기 있는 고백이 힘 있게 이 텍스트를 통과한다.
이 책의 독자들 역시도 고미랑의 고백을 통해 미지 언니의 삶을 간접적으로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이번 봄에는 다시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도둑소녀
고미랑 (지은이),
문화기획선,고잉미랑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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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필은 평론가이며 지은 책으로 문학평론집 〈싸움〉(2022)이 있습니다. 이 평론집으로 2023년 5회 [죽비 문화 多 평론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밖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만화평론 공모전 수상집에 「그래픽 노블의 역습」(2021)과 「좋은 곳」(2022)과 「무제」(2023)를 발표하면서 만화평론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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