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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건물주의 '횟집 임대료 갑질'이 낳은 엄청난 변화

[정진동 평전] 영세상인의 대변인 백상기와 힘이 되어준 정진동... 상가임대차보호법 탄생 비화

등록 2025.03.17 09:48수정 2025.03.17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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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편집자말]
  회(자료사진).
회(자료사진). pieliny-flickr

백상기는 몇주 동안 내덕동과 우암동, 청주시청 부근을 걸어 다니며 상가 건물을 유심히 살폈다. 삼겹살집, 치킨 가게, 미용실, 세탁소 등이 가장 많았다.

청주 북부지역 일대를 샅샅이 뒤지며 어떤 업종의 가게들이 영업을 하고 있는지를 분석한 백상기는 자신이 창업할 업종을 최종 결정했다. 횟집이었다. 물론 그는 처음부터 횟집을 차릴 생각이었지만 시장분석을 통해 다른 음식점, 더 나아가 다른 업종의 자영업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사실 그는 지난 몇 년간 포장마차를 통해 돈을 쏠쏠히 벌었다. 큰 자본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포장마차는 좋은 점도 있지만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게 단점이었다. 불법 단속 문제였지만 자기 점포가 없다 보니 떠도는 부나방 같았다.

생계를 위한 방편으로 장사를 하려면 상가가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유로 잘 나가는 포장마차를 접고 상가를 구해 음식점을 차릴 결심을 한 것이다.

다음 순서는 상가를 구하는 일이었다. '상가임대'라고 쓰인 곳을 찾아다녔다. 보증금과 월세가 얼마인지를 물어봤다. 신축 건물은 임대료가 비쌌고 기존에 영업을 하고 있던 상가가 가게를 내놓으면 권리금이 반드시 뒤따랐다. 권리금이 없는 곳도 있었지만 그곳은 누가 보아도 장사가 허탕을 칠만한 위치였다.

또한 청주시청 근방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상가 임대료가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결국 청주의 외곽인 내덕동과 우암동으로 상가임대 대상지를 좁혔다.

몇 달간의 고생 끝에 우암동 청주MBC 근처의 15평(49.5㎡) 점포를 구했다. 백상기가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30만 원, 권리금 1400만 원짜리 점포를 계약했다. 1992년이었다.


1년만에 임대료 100% 인상... 건물주의 갑질

"아나고 한 접시요~" "네!" 홀서빙과 카운터를 담당하는 아내 윤영화가 주문하고 주방에서 일하는 남편 백상기가 큰소리로 답했다. 부부가 성실하게 일하는 횟집은 항상 만원이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바다가 없는 충북지역에서는 회가 시민들이 자주 찾는 음식은 아니었다. '시오야끼'라고 불리는 삼겹살집이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청주에도 1980년대 후반 들어 횟집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바다 회로는 아나고가 가장 일반적이고 고급 회로는 광어가 최고의 인기였다. 민물회로는 향어, 송어가 가장 대중적이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백상기가 1992년도에 차린 횟집은 별미로 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포장마차에 이어 횟집도 문전성시를 이루자 백상기·윤영화 부부의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횟집에 갑자기 먹구름이 드리웠다. 백상기 부부가 횟집을 차린 지 1년 만이었다.

당시에는 상가 임대 계약 기간이 1년이었다. 재계약을 하려는 데 건물주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인근 가게들과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임대료를 인상해야겠어요." "네." 건물주의 임대료 인상 발언에 백상기는 으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답했다.

"보증금 600만 원에 월세 60만 원입니다. 다음 달부터 시행하겠습니다." 건물주의 폭탄 발언에 백상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건물주의 얼굴이 두세 개로 보이다가 귓속에서 윙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남편의 이야기를 들은 윤영화는 울음을 터뜨렸다.

1년 만에 임대료 100% 인상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백상기는 고민을 했다. '장사를 계속해야 하나 마나?' 계속하자니 월세가 부담되고 그만두자니 시설비와 권리금을 날릴 판이었다. 일주일간의 고민 끝에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장사를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건물주를 만나 재계약을 하려는 데, 지뢰(?)가 터졌다.

임차인인 백상기가 임대료 100% 인상에 도장을 찍겠다고 하자 이번에는 월세 10만 원을 더 올리겠다고 한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이런 미친XX'라며 욕을 하고 싶었지만 임차인은 영원한 을(乙)의 시대였기에 눈물을 머금고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백상기는 횟집 운영을 단념하고 횟집 가게를 이어받아 장사할 사람을 물색했다. 그렇게 해야 시설비와 권리금을 보전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적임자를 구했다. 자기 가게를 인수할 사람을 데리고 건물주를 만났다.

이번에는 건물주의 핵폭탄 발언이 터졌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건물을 써야겠소"라고 했다. 다시 말해 '나가라'는 말이었다. 사정을 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백상기는 시설비와 권리금 일체를 받지 못한 채 짐을 싸야 했다.

변호사에서 허탕, 민주당에서 허탕... 그리고 찾은 정진동

 충북지역 민주화운동의 산실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서 정진동(우측)목사와 조순형 전도사
충북지역 민주화운동의 산실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서 정진동(우측)목사와 조순형 전도사청주도시산업선교회

빈털터리로 쫓겨나다시피 한 백상기는 홧병이 생겼다.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백상기의 말을 한참 들은 변호사는 "이 문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왜요?" "임차인이 보호받을 수 있는 관련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변호사 사무실을 나온 백상기의 어깨는 축 쳐졌다.

다음에는 민주당사를 찾았다. 어렵지 않게 국회의원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국회의원과 당직자의 반응도 변호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관련 법령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동안 실의에 빠진 그에게 실낱같은 희망의 불빛이 비쳤다. "그런 문제라면 정진동 목사를 찾아가 보세요." 정진동 목사가 누구냐고 하니, 충북지역의 민생문제를 척척 해결해주는 청주도시산업선교회 목사란다.

그렇게 해서 백상기가 정진동을 찾아간 것은 1993년 10월이었다. 그의 한숨 섞인 이야기를 들은 정진동은 입을 열었다. "법을 만듭시다." "예?" 백상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듣고 당황했다. 정진동은 "당신 같은 피해자가 청주뿐만 아니라 전국에 숱하게 있을 겁니다. 이런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되기 위해서는 상가임대차보호법을 제정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백상기는 무릎을 탁쳤다. 자기 개인의 문제는 변호사도 국회의원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즉 나라도 구제를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관련 법을 만든다면 자기 개인 문제는 소급적용해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제2, 제3의 피해자를 없앨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법을 어떻게 만듭니까?" "우선 서명을 받아서 정치권에 보냅시다." 정진동은 국회의원들이 알아서 저절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다.'

서명운동

청주 성안길 제일은행 앞에서 '영세상가 임대차보호법 제정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백상기, 정진동이 책상과 서명판을 준비해 외롭게 서명운동을 시작한 날은 1993년 10월 23일. 처음 들어보는 법률제정 서명운동에 지나가는 시민들의 첫 반응은 뜨악했다.

그런데 성안길의 상인들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게 되면(제정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상가 재계약 기간을 2년 이상으로 하고 인상 상한선을 두자는 겁니다" 정진동의 설명을 들은 상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 상인은 주저하지 않고 용지에 서명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서명운동은 세 차례 만에 1000명의 서명을 받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서명운동은 계속하되 서명 용지 1차분을 12월 국회 법사위원회와 언론사에 발송했다. 청주시민 2109명의 서명 용지가 국회에 전달됐다. 해를 넘겨서도 서명은 계속됐다. 1994년 2월 21일에는 정진동, 백상기와 박영호가 함께했다.

시간이 갈수록 성안길 서명운동은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성안길 상인들과 육거리시장, 중앙시장 상인들이 열성이었다. 아무래도 남의 건물을 빌려 장사하는 이들이 직접적 이해당사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장사는 하지 않지만 중소자영업자들의 경제적 보호장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성안길을 지나는 시민들도 우호적이었다.

2단계 서명운동은 집단적인 서명이었다. 당시 청주도시산업선교회가 관여하고 있던 주민운동 관련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뉴청주골프장' 건설을 반대하고 있던 청원군 옥산면·강외면 주민들 수백 명이 서명에 흔쾌히 동참했다.

분평동 택지개발 반대 투쟁 주민과 충주 연수동 택지개발 반대 주민, 청주 사천동 동아건설 피해 주민, 오창 과학단지 개발 반대 주민들이 서명에 참여했다. 청주·청원·충주 등지에 서명 용지를 들고 다닌 것은 백상기와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정진동 목사, 조순형 전도사였다.

"형석아파트 상가에 가 보세요"라는 제보가 접수됐다. 청주 복대동 형석아파트 상가에도 임대차계약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그러니 상인들이 '상가 임대차보호법 제정' 서명운동을 반길 수밖에 없었다. 백상기·정진동이 서명 용지 2차분 탄원서를 국회 법사위원회에 제출했다. 1995년 2월 22일이다.

삼발이 오토바이

 상가임대차보호법 제정이 제자리걸음하고 있다는 신문기사
상가임대차보호법 제정이 제자리걸음하고 있다는 신문기사한겨레신문

백상기가 국회에 서명 용지를 처음 전달한 게 1993년 12월이다. 하지만 이 법률은 국회 본회의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국회 법사위원회 심사소위원회에서 심의를 무한정 기다려야 했다. 국회의원들의 관심 밖이었기 때문이다.

백상기는 '이래선 어느 세월에 법이 통과될 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는 1995년 6월 27일 치러지는 청주시장 선거에 정진동이 출마하자 두 팔 걷고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개조한 삼발이 오토바이에 "청주시장 정진동" "상가임대차 보호법 제정" 소형 푯말을 꽃았다. 자신의 인생에 커다란 계기점을 준 정진동 목사 선거를 돕는 동시에 상가임대차 보호법 제정의 대의를 알리는 운동을 벌인 것이다.

선거가 끝나고 백상기는 서명을 전국으로 확산하기로 했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에 생계를 내팽개치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는 삼발이 오토바이에 두부를 실었다. 두부 장사를 하면서 동시에 서명을 받았다.

그는 선천적으로 소아마비가 있어서 불편한 다리로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의 재래시장을 다녔다. 그 결과 만 5년 동안 12만 명의 서명을 받았다. 특정 법을 제정하기 위해 혼자서 서명을 받은 숫자로는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이었다.

결국 법은 국회에서 처리돼야 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본격적인 서명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진정추(진보정당추진위원회)에 매달렸다.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자 백상기는 민주노동당 중앙당사에서 잠을 잤다. 국회 앞에서 상복을 입고 십자가 시위도 벌이고 민주당 당사에서 단식투쟁도 했다.

청주의 정기호 변호사가 법률 초안을 만들고 김문수·이재오 국회의원이 발의한 '상가임대차 보호법'이 2001년 12월 7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재계약시 기존 보증금과 임대료의 12% 이상 인상할 수 없다는 게 핵심내용이었다.

자신은 혜택을 받지 못하지만 전국의 자영업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준 데에는 백상기의 땀과 열정이 일등공신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백상기에게 법제정운동의 필요성에 자극을 주고 그가 힘들어 포기하려 할 때마다 격려를 해 준 이가 정진동이라는 점 말이다.

 영세상인의 대변자, 백상기 인터뷰 기사
영세상인의 대변자, 백상기 인터뷰 기사충청매일

#세발오토바이 #상가임대차보호법 #백상기 #서명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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