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면>의 한 장면.
핑거
사과를 기다리는 장면들에는 단 네 글자, '기다리고'가 반복될 뿐이다. 그러나 그림책의 사진 연출은 다르다. 우리가 경험했던 수많은 기다림을 보여준다. 지구는 커다란 나무 위에 올라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멀리 떠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같다. 그리고 황량한 숲 외다무다리 위에서 또 누군가를 기다리듯 홀로 앉아 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차가 오는 쪽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고, 빙판 위에 앉아 작은 구멍을 바라보며 낚시 줄에 걸려들 물고기를 기다린다. 좁은 다락방, 쌓여가는 책들 사이에서 책을 읽으며 또 기다린다.
독자에게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사과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미지들이지만, 독자의 감성을 자극하여 기다림의 지루함을 여지없이 느끼게 한다. 떠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던가,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던가, 얼음 낚시를 하며 얼마나 초조하게 물고기를 기다렸던가, 그리고 긴 긴 시간 책만 쌓여가도록 기다린 시간은 얼마나 지루했던가. 이런 말들을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가슴으로 느끼게 해주는 이미지들이 사과를 기다리는 지구의 마음을 온전히 독자에게 전달해 준다.
과거의 그림책들은 글과 그림이 이중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백설 공주가 살았습니다"라는 글이 있다면 그 옆에는 여지없이 백설 공주가 그려져야 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림책은 백설 공주 대신 백설 공주의 방만 덩그라니 있거나, 백설 공주를 괴롭히는 계모 마녀와 아버지의 다정한 모습만 보여주어 백설 공주의 처지를 보여주는 식이다. 글과 그림의 절묘한 협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면>의 작가들 역시 서로의 영역이 넘치지 않도록 절제하며 각각의 이야기 방식을 톱니바퀴처럼 맞추어가는 기술을 구사한다. 덕분에 지구의 기다림은 극대화된다.
시골집과 가족의 미학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시골집이다. 지구와 지호가 사는 집은 명절이면 찾아가는 할머니 집이나 60~70년대 가정집을 연상하게 한다. 거기서 할머니와 할아버지, 삼촌까지 함께 산다. 핵가족 시대에는 보기 드문 대가족이다.
어쩐지 이런저런 일들로 시끌벅적할 것만 같은 가족이다.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배어 있을 것만 같은 지구의 집과 가족들을 보고 있으면 어른 독자는 아련한 추억 속으로, 어린이 독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주셨던 사랑 속으로 시나브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지구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빨간 사과를 사과나무에서 발견한다. 신이 나서 쏜살같이 다락방 계단을 뛰어내려 가지만 곳곳에 복병이 있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당근을 못 찾아 애쓰고 있고, 할머니는 안경을 찾느라 힘들다. 화장실에 들어앉은 삼촌은 휴지가 없다고 지구를 부른다.
지구는 이 모든 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다 해결해 준다. 마당에 있는 목마른 고양이에게 물을 주는 일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 사이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빨간 사과는 늘 지구보다 빠른 동생 지호의 손에 들려 지호의 입으로 들어가고 만다.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면, 빨간 사과만 봐야 했나 봐요."
지구의 뒤늦은 후회와 뒷모습이 아련하다. 하지만 지구는 이내 행복해진다. 가족들의 손에 들린 빨간 사과가 지구의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햇님처럼 빨갛고, 보석처럼 빛나는 빨간 사과를 동생과 함께 먹는다.
그림책을 소개하는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림책의 그림을 온전히 보여줄 수 없음이 못내 아쉽다. 그림책의 글과, 그림을 대신한 사진들 함께 꾸린 향연이 얼마나 어른과 아이 모두를 정겹게 하는지 정확히 전달할 길이 없다.
'그림책 덕후'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그림책에 열광하는 어른들이 많아진 시대이다. 동화 읽는 어른들의 모임이 곳곳에 생기는 시대이다. 세대를 넘어 공감과 치유를 선사하는 아동 문학의 진화는 이제 K-CULTURE의 또다른 중심이 되었다. 유희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 우리의 본능을 사로잡는 또다른 예술의 한 영역이 된 그림책과 아동 문학의 발전에 박수를 보낸다.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면 - 2025 볼로냐 라가치 오페라 프리마 선정
진주 (지은이), 가희 (사진),
핑거,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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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말하고. 책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독서 탐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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