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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없이는 글도 없다

시니어 글쓰기를 하며... 내 인생 '쓰면'이 아니고 '풀면'인 이유

등록 2025.03.04 17:00수정 2025.03.0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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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글을 써본 적이 없어요."

어르신 글쓰기 수업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60년 넘게 살아오면서 손편지 한 장, 일기 한 줄 쓴 적도 없다고 하신다. 그래도 이야기는 많다. 손주를 처음 봤을 때의 감격, 어린 시절에 먹던 보리밥과 강냉이죽, 부모님께 야단맞고 울던 기억까지 끊이지 않고 나온다.


글을 써본 적 없다는 이유로 이 모든 이야기가 사라져야 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이라는 이름으로 복지관에서 어르신 글쓰기 수업을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쓰는 것'이 아니라 '푸는 것'이다.

쓰는 것보다 푸는 게 먼저

글쓰기 수업에 집중하는 어르신들 말이 문장이 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한다
▲글쓰기 수업에 집중하는 어르신들 말이 문장이 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한다 최은영

강물이 흐르려면 먼저 샘이 터져야 한다. 돌에 갇혀 흐르지 못하면 결국 마르거나 썩고 만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으면 문장이 흐르지 않는다. 나는 어르신 수업에서는 처음부터 글을 쓰게 하지 않는다. 대신 어르신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나는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문장을 만들어 보여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내가 우리 집 막내거든요. 형님들이 맨날 부려먹었어. 나는 싫어도 말도 못했는데 지나고보니 귀여워 한 거 같기도 하고."


그러면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화면에 이렇게 텍스트를 띄운다.

'우리 집에서 나는 막내였다. 형들은 늘 내게 심부름을 시켰고, 나는 그게 싫으면서도 거절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형들이 나를 귀여워했던 것 같다.'


한쪽에서는 이야기를 풀고, 화면에서는 문장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어르신들은 "그냥 떠드는 게 어떻게 이렇게 나와요?" 하며 신기해한다. 그게 마음에 드시는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려는 분이 종종 계셔서 적절한 시간 배분이 필요할 정도다.

그러다 간혹 이런 말도 나온다.

"선생님이 문장을 만들어주시면, 그건 우리가 쓴 게 아니잖아요?"

수업 초반에 늘 나오는 질문이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수영 강습 처음 가면 키판 잡고 물에 뜨는 연습하죠. 키판 잡는다고 수영 강습 아닌가요? 제가 만드는 문장에 익숙해지는 시간은 수영으로 치면 키판 발차기랑 똑같아요."

내 인생 '풀면'을 수영장 키판과 비교했을 때 수긍 안 하셨던 분이 이제껏 한 명도 없었다. 잠깐 경직됐던 분위기가 바로 풀어졌다.

처음부터 완벽한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중요한 건 자신의 이야기가 문장이 되는 과정을 직접 보고 익숙해져야 한다. 특히 어르신처럼 오랫동안 자기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만 있는 분께는 더 그렇다.

먼저 생각을 풀어내고, 말로 정리하는 것이 훈련이 되면 점점 스스로 쓴다. 실제로 지난 기수의 한 수강생도 처음에는 말로만 풀어냈다. 그러다 몇 주 뒤에는 짧은 문장이라도 직접 써보기 시작하더니 결국 한 편의 에세이를 완성했다.

키판을 잡고 연습하던 수영 초보자가 어느 순간 키판을 졸업하듯 조금씩 혼자 힘으로 문장을 만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경험

직접 쓰는 84세 어르신 말이 문장이 되는 모습을 한 학기동안 보다보면 이렇게 한바닥을 채워 오신다
▲직접 쓰는 84세 어르신 말이 문장이 되는 모습을 한 학기동안 보다보면 이렇게 한바닥을 채워 오신다 최은영

지금 65세~80세 어르신은 역동의 시대를 살아왔다. 시대 자체가 부침이 심했던 터라 개인사가 마냥 평온할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그렇게 살아왔으니 내 삶은 별거 아니라고 치부하는 분들이 많다.

내가 수업에서 자주 하는 말도 '별 거 아닌 거 아니거든요!'이다. 당신들의 경험이 얼마나 귀한지 옆에서 부추겨야 한다. 그래야 마음밭 온도가 올라가서 있는줄도 몰랐던 글쓰기 씨앗이 움튼다.

겨우내 얼었던 땅은 이야기를 풀지 못한 마음과 같다. 그 땅에 온기가 돌면 싹이 돋아나듯 내 이야기를 '풀면' 마음의 온도가 올라간다.

수업 하다보면 어르신이 마음속 깊이 묻혀 있던 기억들을 천천히 꺼내놓는 순간을 본다. 처음에는 흐릿하고 어설퍼 보일 수도 있다. 그걸 풀어내다 보면 빛나는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내가 이 일을 가치 있다고 느끼는 이유다. 오랜 세월 자신을 지탱해온 삶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글로 풀어낼 때, 어르신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이게 정말 내 이야기인가?" 하며 신기해 하는 순간, 그분들이 자기 삶을 다시 들여다보고,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삶의 주인공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나는 느낀다.

글쓰기는 감각이 아니라 과정이다. 재능도 아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익혀가는 것이다. 천천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풀어내다 보면 문장은 그 뒤에 선물처럼 따라온다. 누구든 자기 삶을 풀어내고 글로 남길 수 있다. 그 순간 우리는 누군가의 조연이 아닌 진짜 주인공이 된다.

언젠가 당신도 한번쯤 해보면 좋겠다. 지나온 시간 속에도 아직 말로 꺼내지 못한 순간들, 그 조각을 하나씩 꺼내어 천천히 바라보고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그것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될 것이다.

그 이야기는 오직 당신만이 쓸 수 있는,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기록이다. 내 인생 '풀면'이 어르신만 하는 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에도 실립니다.
#내인생풀면책한권 #시니어글쓰기 #복지관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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