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새하얀 논밭과 도로의 경계는 오로지 그 높이의 차이만으로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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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예약한 숙소는 우리가 도착해 방을 배정받자마자 '만실'이라는 팻말이 현관 계산대에 올려졌다. 깨끗하게 닦아놓은 복도에 하릴없이 눈 발자국을 잔뜩 남겨놓은 우리에게, 마음씨 좋은 주인장은 넉넉한 웃음과 함께 따뜻한 환영의 말을 건넸다.
"하이고, 눈사람이 따로 없네잉. 춘디 얼릉 들어와요. 방 따수울 것이여."
"네네. 고맙습니다."
"불편한 거 있으믄 인터폰 하시고이!"
오랜만에 듣는 남도 사투리가 정겨웠다. 왠지 모르게 길거리에 주렁주렁 걸려있던 굴비의 모습이 아주머니의 목소리와 겹쳐졌다. 3층이었던 숙소 창문을 열자마자 더 많은 굴비와 눈이 마주쳤다. 호텔 바로 옆 건물이 굴비 덕장이었다. 아파트 4층 높이는 족히 되어 보이는 곳에 굴비가 층층이 살고 있었다.
옛날 이곳은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풍성한 곳이었다고 한다. 칠산 해역은 조기가 지나가는 길목이고, 특히 이곳에서 산란을 하던 습성 덕분에 물 반 고기 반의 상황이 연출되곤 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예전 같지 않은데, 그래도 법성포는 조기가 굴비로 변모하는 데에 필요한 가장 좋은 해풍이 불어오는 곳이어서 덕장으로서의 명맥은 여전하다. 창문을 열고 천천히 운전을 하고 있자니 바람을 따라 짭쪼름한 굴비의 향기가 코끝을 계속 스쳤다. 자린고비가 굴비를 입으로 먹지는 않았어도 코로는 잘 먹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 눈 내리는 굴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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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말라가고 있는 법성포 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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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이 괜찮은 한 식당을 정해 들어갔다. 1인분에 2만 원. 산지에서 먹는 정식치고 가격이 나쁘지 않았다. 보통 해당 음식이 유명한 곳에서는 오히려 비싸고 맛이 없는 일이 태반인데, 법성포는 그렇지 않았다. 손맛이 좋은 전남이기도 하고, 얼리지 않은 굴비로 바로 요리했기 때문인지 집에서 해 먹는 것보다 맛이 더 좋았다.
특히 반찬으로 나온 요리들이 참 인상 깊었다. 강진, 해남, 영광 등 이곳의 밥상이 유명한 이유는 주된 요리 못지않은 반찬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날 지금까지 먹었던 것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게장을 먹었다. 여느 집 냉장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밑반찬 또한 매우 맛있었다.
손에서 모락모락 나는 김... 눈 내린 해안이 절경
다음날 오전까지 눈이 계속 내렸다. 사람들이 제법 왔다 갔다 했지만 새눈이 금세 흔적을 지워, 처음 밟은 눈처럼 새 단장하여 우리를 설레게 해 주었다. 포구에는 썰물이 빠져나간 뒤 갯벌에 눈이 잔뜩 쌓여, 눈으로 된 바다 위에 배가 썰매처럼 놓여있는 재미있는 풍경이 만들어졌다.
흑백필름을 넣었지만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보는 세상은 컬러일 텐데, 쉴 새 없이 내리는 눈이 점점 풍경을 흑과 백으로 만들고 있었다. 신이 나서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며 셔터를 누르다 보니 발갛게 달아오른 나의 맨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눈 쌓인 바다 새하얀 눈 속에 빨간 배의 깃발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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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으로 담은 법성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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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에서 잠시 벗어나 영광대교를 건너 남쪽으로 향하면 백수읍으로 가는 해안도로가 나온다. 백수해안도로라고 이름한 경치 좋은 길이다. 오후가 되어 다시 굵은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 이곳에서, 애초에 보고자 했던 진한 회색빛의 바다를 만났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와도 같은 해무와 함께.
가다 보니 일부러 전시라도 한 듯 노오란 트럭이 공터에 세워져 있었다. 바퀴 자국도 없고 횡으로 내린 눈이 고스란히 타이어에 얼어붙은 것을 보니 아마 눈이 내리기 전부터 가만히 서 있었던 모양이다. 색의 대비가 확실하여 시선을 끌었다. 흑백 말고 컬러필름도 챙겨 온 것에 안도하며 셔터를 눌렀다.

▲대신등대 진한 회색빛 바다 위로 굵은 눈발이 묵직하게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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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색빛 바다, 하얀 눈, 노오란 트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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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두텁게 쌓인 해안은 곳곳이 절경이었다. 거친 눈발을 소리 없이 흡수하는 바다의 위용을 사진에 모두 담을 수 없었다. 마치 다른 세상, 다른 차원을 바라보는 듯했다. 모든 찌든 것을 말없이 받아들여, 파도의 힘으로 진흙에 짓이김으로써 맑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숭고한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다를 향해 네모 반듯하게 지어진 사당이 눈에 들어왔다. 열부순절지인 모열사였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을 피해 피신하던 부녀자들이 일본 함선을 만나자, 끌려가서 능욕을 당하느니 이곳에서 의롭게 죽겠다는 마음으로 바다에 몸을 던졌고 이를 기리기 위해 지은 곳이다.
안달복달 않아도 올 봄

▲열부순절지 모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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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해안도로 모든 것을 삼킬 듯이 질주하던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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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애초 목적지였던 고창을 들렀다. 해변길을 따라 가마미를 지나 구시포로 향했다. 날이 점점 개어오고 있었다. 공기는 여전히 싸늘했지만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살은 이제 더 이상 겨울의 것이 아니었다.
굳이 염려하지 않아도 봄은 오기 마련이다. 그래도 봄이 기다려지는 것은 아마도, 늘 같은 따스함이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은 항상 새롭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의 어지러운 시국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광기 어린 겨울이 지나가면 당연하게도 봄이 올 것이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추위가 엄습했던 것이기에, 우리가 앞으로 피워낼 꽃망울은 오히려 더 선명한 빛깔을 뽐내게 되지 않을까.

▲구시포해변 멀리서 빛내림이 만들어지고, 역광의 햇빛이 파도의 주름살을 선명하게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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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해왔습니다.
2025년,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아빠가 쓰는 육아일기를 통해 한 아이의 양육 뿐 아니라 한국의 교육, 인류와 생태 등을 종합적으로 고민하는 시민기자가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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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도 돈 물고 다녔다는 곳... 바람에서 굴비 향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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