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지니 잠수함토끼콜렉티브 활동가
최세홍
세상은 평평하지 않다. 어딘가에는 경사가 있고 계층이나 성별, 나이 등에 따라 취약한 이들은 먼저 미끄러져 떨어진다. 섭식장애도 그렇다. 더 취약한 사람들이 쉽게 미끄러진다. 섭식장애는 거식증과 폭식증뿐 아니라 건강음식집착증(Orthorexia), 당뇨병성 섭식장애(Diabulimia), 회피적·제한적 음식 섭취 장애(ARFID, Avoidant/Restrictive Food Intake Disorder)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다이어트 강박과 우울증, 억압적인 환경 등으로 추정할 뿐 아직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 물론 미처 포착하지 못한 다양한 형태의 섭식장애로 누군가는 미끄러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 행사가 2월 24일부터 3월 2일까지 일주일간 열렸다. 국내외 섭식장애 당사자, 연구자 등이 모여 경험이나 해결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로 올해로 3회째다. 이 행사는 비영리단체 '
잠수함토끼콜렉티브'의 박지니 활동가가 기획해 왔는데 20년 넘게 '깨끗이' 낫지 못하고 섭식장애와 함께 살아온 당사자이자 책 <삼키기 연습>의 저자이다.
최근 장애 운동에서는 의료 중심의 언어에서 벗어나자는 흐름이 거세다. 하지만 섭식장애에 관한 의료 체계는 전혀 정립돼 있지 않은 상태다. 당사자들의 발화에 주목하며 의료 권력에 비판적인 흐름이 형성된 가운데 섭식장애 당사자들 역시 당사자 내러티브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역설적으로 당사자들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는 구조도 시급하다고 말한다. 섭식장애를 둘러싼 오해와 편견도 점점 더 깊어져 간다. 유튜브를 비롯해 우리를 둘러싼 식문화는 점점 기울어지고 있다. 먹방과 쿡방이 넘쳐나고 리얼리티 프로그램 등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도 먹방이 필수다. 외모에 대한 통제와 강요는 점점 더 교묘하게 우리 삶을 파고든다. 곳곳에서 위기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단체 이름에는 섭식장애 당사자들이 '잠수함 속 토끼'나 '탄광 속 카나리아'처럼 사회의 위기 징후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위해 만든 단체지만 단체 이름에는 '섭식장애'를 넣지 않았다. 우리가 '잠수함 속 토끼'지만 아픔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문제에도 반응하겠다는 뜻이자, 더 넓게는 섭식장애 당사자나 연구자뿐 아니라 가족들도 참여해서 여성·아동 등 다양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다짐이 담겼다.
단체명에 '섭식장애'를 넣지 않은 이유
- 섭식장애는 뭔가?
"19세기에는 히스테리에 섭식장애 증상이 있었다. 그때는 체중 감소나 외모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밥을 거의 못 먹는 증상이 나타났다. 체중이나 외모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시작한 건 1940년대부터였는데 그때까지도 드물었다. 1980년대부터 체중과 외모 이야기가 많아졌고 폭식증도 늘었다.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도 폭식증이 있었다. 연구자들은 '예전 같았으면 섭식장애가 아니었을 사람들까지 이 병이 모집하고 있다'는 표현을 쓴다.
섭식장애가 대부분 거식증과 폭식증이지만 오르토레시아(orthorexia), 즉 건강음식집착증이 최근에 많아지고 있다. 단백질 혼합물인 글루텐이 없는 글루텐프리 음식이나 유전자 변형 농수산물을 쓰지 않은 'Non-GMO'를 찾는 등 건강식만 찾다가 먹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증상이다. 계란을 못 먹었다는 분도 있고, 요리하면서 설탕·기름 등을 못써 맛이 없으니 가족들과 갈등을 겪기도 하더라. 2023년 1회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하는데 여성 관객 중에 오르토레시아가 너무 많았는데 이분들은 병원에서 진단을 받거나 그러진 않는다."
- 또 어떤 유형이 있나?
"당뇨병성 섭식장애, 다이아불리미아(Diabulimia)가 있다. 당뇨(diabetes)와 폭식증(bulimia)의 합성어로 당뇨 환자가 체중을 줄이려고 인슐린을 제대로 투여하지 않아 위험한 경우엔 생명에 위협을 받는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세계적으로 폭증한 건 주로 10세 미만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나는 회피적·제한적 음식 섭취 장애(AFRID, Avoidant·Restrictive Food Intake Disorder)로, 음식을 잘 삼키지 않는 증상이다. 그레타 툰베리 어머니가 쓴 책 <그레타 툰베리의 금요일>에는 툰베리가 어렸을 때 음식을 안 먹고, 가족이 엄청 고생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안주란 백상식이장애센터장은 이런 아이들을 이미 보고 있었다고 한다. 아직 이런 증상을 전문적으로 치료할 병원이 부족하다."
- 섭식장애에 대해 오해가 많다고 하는데 어떤 부분인가?
"보통 '잘 먹을 수 있도록' 하면 섭식장애가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전문가에게 지식이 있고 환자는 무지해서 고통받는다고 생각하면서 지식을 깨닫게 하려고 한다. 당사자들이 섭식장애에 대해 몰라서 걸리는 게 아니지 않나. 한 대학에서 섭식장애 치료 프로그램을 창업했다고 아이디어를 봐 달라고 하더라. 폭식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전문가에게 보내면 그걸 보고 코칭 내용을 당사자에게 보내주겠다는 프로그램이다. 속이 터진다. 섭식장애는 사회문화적 질환이라 과거와 지금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어서 원인도 정확하게는 다 알 수 없다."
- '잠수함토끼콜렉티브'를 왜 만들게 됐나?
"난 회사원이고 단체를 만들 생각이 애초에 전혀 없었다. 2021년에 책 <삼키기 연습>을 내고도 간혹 요청이 오면 인터뷰만 했다. 그러다 2022년에 섭식장애 관련 회사로 이직했는데 섭식장애에 대해 너무 무지한 곳이었다. 우연히 비만학회 관련 기사를 보면서 왜 섭식장애학회는 없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섭식장애에 관심이 있는 분이 별로 없어서 외국 학계와 교류하는 김율리 인제대 일산백병원 교수를 찾아가 섭식장애학회를 만들자고 했다. '외국에서는 2월 말에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를 하는데 우리도 이걸 하고 학회를 만들자'고 제안하더라.
그래서 2023년부터 시작했다. 당장 돈이 필요했는데 김 교수는 '공간이 없으면 백병원 강당에서라도 하자'고 했지만 병원에서 하고 싶지는 않았다. 1회 때는 한 기업에서 후원을 받았는데 그때 단체가 필요하다고 해서 '잠수함토끼콜렉티브'를 만들었다. 우선 이 행사를 위해 단체를 만들지만 더 넓게는 섭식장애 당사자나 연구자뿐 아니라 가족들도 참여해서 여성·아동 등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단체명에 '섭식장애'를 넣지 않았다."

▲ 박지니 활동가가 2021년에 낸 책 <삼키기 연습>
최세홍
- 이름만 들으면 어떤 단체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단체명을 이렇게 지은 이유도 궁금하다.
"은행이나 세무서 가면 '패션업을 하냐'고 물어본다.(웃음) '섭식장애 환자연대' 이런 식으로 짓고 싶지는 않았다. 섭식장애 당사자를 보통 '다이어트에 목 맨 젊은 여자들'이라고 보는데 사실 사회의 위기 징후가 있을 때 제일 먼저 감지한 사람들이다. 그게 '잠수함 속 토끼'이고 '탄광 속 카나리아'다. 우리가 '잠수함 속 토끼'지만 아픔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문제에도 반응하겠다는 뜻으로 단체명을 지었다."
"섭식장애, 생애주기에 맞는 치료가 필요하다"
-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당사자 내러티브가 옳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의료 전문가들이 모르는 지혜가 많다. 일본에선 섭식장애 자조 모임이 1987년부터 생기기 시작했고, 섭식장애에 대한 젠더 관점의 사회학적 연구도 90년대 말부터 활발히 진행됐다. 그전에는 개인 성장 과정의 문제라고 보고 특히 '엄마 탓'이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당사자들이 '성장환경 탓이니 내가 할 게 없다'고 생각해 회복이 안 되는 부작용이 있었다.
2010년대 들어와 섭식장애의 이유를 탐구하는 원인론에서 회복론으로 초점을 옮겨 갔다. 이게 당사자들 인터뷰 작업의 결과다. <유리를 삼키면 투명해질까>의 저자 이진솔, <또, 먹어버렸습니다>를 쓴 김윤아, 섭식장애와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사회학도 강의영 등 당사자 연구자도 늘고 있다."
- 장애 운동에서 의료 중심적 언어를 벗어나 당사자 언어를 만들자는 게 중요한 흐름이다. 그런데도 섭식장애는 역설적 위치에 있어 치료 시스템을 만들자고도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제가 한 얘기는 아니고 <주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유기훈 종로구 정신건강센터장이 말한 내용이다. '장애 운동에서는 의료화된 언어에서 벗어나자는 흐름이 주류인데, 섭식장애와 관련해선 아예 의료적 치료 체계 자체가 정립돼 있지 않아서 그것을 원하는 목소리가 주효하다'는 내용이었다. '의료 패러다임의 협소함을 지적하는 것이 다른 질환·장애 당사자의 주요 요구라면, 섭식장애는 그 협소한 체계나마 구축돼 있지 않은 상황'이라는 진단이다.
이번 '섭식장애 인식주간'에 이탈리아 의사도 강연자로 있었는데 발표 영상 자막을 작업하다 울컥했다. 이탈리아도 영국처럼 의료 비용이 무료인데 청소년들이 치료 서비스를 받다 스무 살이 되면 성인 치료로 넘어간다. 그 이행기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고민한다고 하더라. 섭식장애 당사자들에게도 하나의 정체성만 있는 게 아니라, 생애주기에 맞는 치료가 필요하다.
내가 2001년 입원할 때 두 달에 400만 원이었는데 지금은 얼마나 비싸겠냐. 의사들은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치료한다고 하는데 당사자들은 '입원비 많이 나오니 빨리 살찌워야 한다'고 느낀다. 죽고 싶을 수밖에 없다. 치료는 필요하지만 한국 시스템에서 섭식장애 치료를 정신과 의사가 주도할 수밖에 없어 당사자들이 관여할 수 있는 공간이 있을까, 고민이다."
- 섭식장애는 미디어의 영향이 크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급식을 안 먹는 학생들이 나온다. 이걸 먹게 만드는 걸 의사라고 할 수 있지는 않다. 일본에는 매뉴얼이 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고학년, 중학생 등 나뉘어있다. 학교와 협업하고 선생님, 부모 교육도 필요하다. SNS를 못하게 하거나 휴대전화를 뺏는 것도 답은 아니다. 몸매 얘기를 금지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나온다. 미디어 영향에서 벗어나더라도 위에 음식이 있는 느낌이 싫거나 자기 몸을 싫어하게 되기도 하는데 이런 예민한 부분을 케어할 필요가 있다."
- 언론에서 섭식장애를 다룰 때도 유의할 점이 있을텐데.
"구체적으로 숫자를 쓰지 않아야 한다. 프로아나(Pro-ana. 마른 몸을 추구하며 거식증 치료를 거부하는 사람)를 취재하고 보도할 때 최고 몸무게, 최저 몸무게를 묻고 하루에 구토 몇 번 하는지 묻지 말아 달라. 스펙터클로 소비해선 안 된다. 당사자가 방문을 닫고 들어갔는데 따라 들어가면 과자 봉지가 널려있고, 화장실로 가서 토하는 소리까지 들려주는 방송이 있다. 이런 방송으로 당사자들 위치가 더 이상해진다. 자살과 심정지 등으로 정신질환 중 사망자가 가장 많은데 가족들은 쉬쉬하게 된다. 섭식장애가 곧 불명예니까 유명인들도 발언하지 않는다. 언론에서 책임감 있는 보도를 해야 한다."
- 낮에는 회사 다니고 저녁에 기고나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대표로서 활동도 한다. 섭식장애 당사자라고 해도 이런 사회운동을 혼자서 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동력이 뭔가?
"지치긴 한다. 그래도 '섭식장애 인식주간' 1회와 2회 때는 당사자들에게 경험을 공유하고 경험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내가 20년 차 회사원으로 홍보 마케팅 기획 섭외 등 자잘한 건 다 혼자 할 수 있다. 물론 도와주는 분들도 있다. 동력은 분노다. 젊은 학생들이 정보가 없어서 고통받고 있고 더 어린아이들이 무방비로 방치되고 있는 건 화가 나서 못 보겠다.
의사들이 책임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최근 섭식장애 치료 시스템의 부재와 환자들이 방치되고 있는 상황에 관해 UN과 WHO에 메일도 보냈다. 헌법소원이나 입법청원도 생각하고 있다. 3회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로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결과물을 만드는 게 목표다."

▲ 섭식장애 인식주간은 올해로 3회차를 맞았다.
최세홍
글 장슬기
미디어오늘 기자 / 사진 최세홍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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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무게, 구토 횟수... 섭식장애를 '스펙터클'로 소비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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