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겹게 예술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응원의 송가

[서평] 만화가 마영신의 신작 <(락)이>

등록 2025.03.14 10:11수정 2025.03.14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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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보기엔 우리가 미쳐 보이겠지만, 세상이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뿐!

<(락)이> 241쪽.

2010년에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할머니 미자가 문화센터에 방문해 시가 무엇인지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아픈 시 한 편을 힘겹게 완성해 나가는 과정을 담는다. 어떤 예술이건 간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미자 할머니 역시 한 편의 시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 참으로 힘겹다.

여기서 힘든 과정이란 사랑하는 손주가 저지른 죄와 관련이 있다. 자신이 사랑한 손주가 친구들과 모의해 한 소녀(박희진)를 낯선 공간(과학실)에서 성폭행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소녀는 강물에 몸을 던지게 되고 더는 이 계절에 없는 존재가 된다.


영화 <시> 포스터 영화 <시> 포스터
▲영화 <시> 포스터 영화 <시> 포스터 이창동

미자는 이런 상황에서 다른 학부모들처럼 소녀의 엄마와 합의해야 할지, 손자에게 죄를 물어야 할지를 고민한다. 결국, 미자가 선택한 것은 죄를 묻는 방식이었고 미자는 이 과정에서 소녀의 상처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성찰의 시간은 미자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정직하게 이 과정을 통과했던 탓에 미자는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얻게 된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고 부끄럽지 않은 시 한 편을 얻게 된 것이다.

시적 동기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 글에서 시가 창작되는 계기나 과정에 대한 시론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목하려는 것은 주연의 차분한 목소리가 아닌 조연의 술주정이다.

이 영화에선 이미 고인이 된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 2005)의 황병승 시인이 출현하는데, 그는 시가 쓸모없다고 말하는 여러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술에 젖은 상태에서 시는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도 유용하지도 않다고 간곡히 말한다.

그의 말처럼 정말로 시는 쓸모없는 것일까. 영화에서 미자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고 값진 시 한 편을 얻게 되었는데, 이 과정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시의 쓸모를 너무나 쉽게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궁금증에 대해 여러 이유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시가 죽었다거나 쓸모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시인들의 시를 읽어줄 독자가 없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 그러니까 '시'를 탐닉하는 독자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다.


잊지 않고 끝까지 기억하려는 문학의 순기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가 공존하는 이 시기에 독자가 여러 매체로 분산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의 쓸모 없음에 관한 이야기가 문학의 세계관에서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장르의 영역에서도 종종 등장한다. 서두에 문학 이야기를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가깝게는 애디 왓슨의 〈북투어(The Book Tour)〉(이숲, 2022)에서 주인공 프렛웰은 자신이 출간한 책 〈사라진K〉를 홍보하기 위해 여러 서점을 돌며 북콘서트를 하게 되는데, 그의 신간이 팔리지 않았을 때, 서점 주인은 "별일이네요. 보통 그래도 한 권은 파는데, 시집이라도 말이죠"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잘 팔리지 않은 시집보다 〈사라진K〉가 더 안 팔리고 있다고 서점 주인이 프렛웰에게 농을 친 것이다. 이처럼 시집은 잘 팔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시집이 팔리지 않거나 시 읽는 독자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부의 유명한 시인이나 시집만을 독자들이 탐닉한다고 볼 수 있다. 다양한 색을 지닌 수많은 예술가(시인)들의 고백이 읽히지 않는 시대인 것이다.

시의 쓸모없음으로 예술을 논하는 〈(락)이〉

 <(락)이> 표지
<(락)이> 표지 송송출판사

이런 맥락에서 오늘 소개할 만화가 마영신의 신작 〈(락)이〉(송송 출판사, 2025)〉도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마영신 특유의 유머와 재치가 주인공들의 이름이나 연출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그의 스타일을 탐닉하는 것도 신간을 즐기는 재미일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작품을 단순히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시인과 같은 예술가와 예술적 행위에 대해 마영신 표 스타일로 진지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의 위치를 "1950년대에 미국에서 발생한 대중음악인 흑인 특유의 리듬 앤드 블루스와 백인의 컨트리 음악의 요소를 곁들인 강한 비트의 열광적인 음악"인 '락(Rock)과 동일한 위치에 놓음으로써 대중에게 소외되고 있는 예술 장르의 현주소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마영신의 의도는 제목을 정하는 것에서도 반영되는데, 책 제목에 괄호를 써넣는 것. 그럼으로써 동시대에 소외된 다양한 예술의 표정도 비슷하지 않냐고 질문한다. 괄호 안에 '락'이라는 글자를 사용함으로써, 락을 사랑하는 음악가의 이야기임을 강조하는 것과 더불어 괄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수많은 예술적 행위와 형태 역시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냐고 의도적으로 반문한다.

이런 만화가의 명백한 의도는 작품 속에서 직접 시를 쓰는 한 인물(심 빛)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반영된다. 그는 시를 써서 동료들에게 진실을 보여주게 되지만 아무도 그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의 시를 온전히 느끼는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영신은 동시대에 애써서 자신의 예술을 짓는 존재들의 목소리가 독자들에게 온전히 와 닿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양한 만화적 장치들로 그려내고 있다. 이런 설정 역시도 아웃사이더들의 삶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락)이> 242~243쪽.
<(락)이> 242~243쪽. 송송출판사

중요한 것은, 작품에서 모든 것을 걸고 예술하는 예술가들이 비겁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마영신은 여러 인물을 통해서, 아류가 아닌 삼류의 삶은 그래도 멋진 예술가라는 것을 전달한다.

누군가의 것을 훔치거나 베끼는 아류 예술가들보다는 자신의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언젠가 와 닿기를 믿으며 온전히 밀고 나가는 창작자들이 더 값지다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색을 지닌 개성 있는 예술가들에게 포기하지 말고 조금은 더 즐겁게 예술 하자는 의미로 들린다.

이 텍스트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가장자리에 있는 예술 전반의 소외를 다루는 영역까지 확장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텍스트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둡고 침침한 곳에서 힘겹게 예술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응원의 송가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독자들의 경우, 작가의 의도가 어떻게 만화적으로 표현되고 있는지 따져보며 읽으면 더 깊게 만화를 느낄 수 있다. 스포일러는 여기까지다. 그러니 너무 만화책을 빨리 넘기지 마시기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릴 수 있습니다. 문종필은 평론가이며 지은 책으로 문학평론집 〈싸움〉(2022)이 있습니다. 이 평론집으로 2023년 5회 [죽비 문화 多 평론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밖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만화평론 공모전 수상집에 「그래픽 노블의 역습」(2021)과 「좋은 곳」(2022)과 「무제」(2023)를 발표하면서 만화평론을 시작했습니다.
#문종필평론가 #문종필의오늘만화 #마영신 #송송출판사 #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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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필은 평론가이며 지은 책으로 문학평론집 〈싸움〉(2022)이 있습니다. 이 평론집으로 2023년 5회 [죽비 문화 多 평론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밖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만화평론 공모전 수상집에 「그래픽 노블의 역습」(2021)과 「좋은 곳」(2022)과 「무제」(2023)를 발표하면서 만화평론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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