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독서모임에서 김기태 소설을 권한 이유

[김성호의 독서만세 269]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등록 2025.03.17 08:24수정 2025.03.17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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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오늘, 한국인의 보편적인 교양을 위하여 소설 한 권을 골라 읽어야 한다면 어떤 책을 택하겠는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을 필두로 여러 이름들이 나올 수가 있겠다. 한국 문학의 결코 짧지만은 않은 역사 가운데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이들이 이제는 여럿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교양이란 최고의 무엇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편적인 교양이라면 더욱 그렇다. 교양은 학문을 넘어 사회와 문화 전반에 대한 폭넓고 품위 있는 이해며 지식을 뜻한다. 시대의 흐름과 경향을 충실히 반영한 작품이 위 질문의 답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매달 한 권의 책을 함께 읽는 어느 모임에서 내가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권한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은근하지만 분명하게 변화하는 한국 문학의 추세를 읽기에도, 또 작품이 반영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대면하는 데 있어서도 이 소설만큼 적합한 작품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책 표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책 표지 문학동네

한국 문학에 불어온 새로운 바람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2024년 젊은작가상과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일약 한국 문단이 주목하는 신성으로 떠오른 김기태다. <2022년 신춘문예 당선소설집>에 실린 일군의 작품 가운데 단연 돋보였던 '무겁고 높은'엔 '근래 보기 드문 강력하고 단단한 작품'이란 심사평이 붙어 눈길을 끌었다. 꾸준히 추락하는 신춘문예 당선작의 수준과 갈수록 비좁아지는 한국문학의 들판 가운데서 김기태의 출현은 평자와 독자, 쓰는 이와 읽는 이 모두가 반길 만한 소식이었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등단작을 포함하여 김기태가 발표한 아홉 편의 소설을 묶은 단편집이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 여러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을 문학동네가 순서와 상관없이 묶어놓았다. 첫 작품은 '세상 모든 바다'로, 여섯 번째 실린 '로나, 우리의 별'과 함께 K-POP 스타와 그를 좋아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원자력 발전소 건설 문제가 화두로 떠오른 소도시 해진 출신 백영록과 한국에 뿌리를 두었으나 국적은 일본인 재일교포 하쿠의 만남으로부터 이태원 압사 사고를 떠올릴 밖에 없는 충격적 사건으로 이어지는 작품이다.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 '세상 모든 바다(세모바)'는 사회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던지는 독특한 그룹이다. 적잖은 팬들은 제가 좋아하는 세모바의 활동에 화답해 역시 사회적인 활동을 하길 즐긴다. 인종차별, 성소수자 차별 등에 반대하고, 기후위기 등 환경문제에도 목소리를 낸다. 영록의 고향인 해진의 원전 건설 반대 또한 주요한 활동이어서 세모바의 팬들 사이에선 작은 도시 해진의 이름이 제법 알려져 있을 정도다.


소설은 일부 팬들이 기획한 사회적 퍼포먼스가 뜻밖의 사태로 이어지며 공연장 바깥의 팬들이 서로 깔려 죽는 압사사고로 이어지는 광경을 묘사한다. 하쿠는 제가 만났던 영록을 희생자 명단에서 발견한다.

소수자의 정체성과 지역 원전 문제, 그밖에 온갖 사회적 사안 등을 깊이 파고들지 않고 흘려보내는 듯 다루는 소설이다. 세상 모든 바다가 이어져 있다는 인식처럼 경계 없이 온갖 문제에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려 드는 팬들은, 그러나 진실로 그 모든 문제를 바꾸어낼 신념이며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일까. 제 가수를 향해 열광적인 응원을 퍼붓는 팬들의 근시안적 애정과 시공간을 넘나드는 관심 사이의 괴리를 이 소설은 성긴 문장으로 짚어나간다.


'세상 모든 바다' 속 하쿠가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란 표현으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표제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의 니콜라이는 러시아와 한국인 사이의 기묘한 위치에 서 있다. 200년 전 연해주로 건너갔다 스탈린 정권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고려인 3세, 니콜라이는 한국으로 들어와 한국학교를 다녔음에도 한국인이 되지 못했다. 귀화에 필요한 영주권 획득 조건을 맞추지 못해서다. 직전년도 한국인 평균 임금 이상의 소득기준을 요건으로 하는 기준을 한국인 노동자보다 못한 환경에서 일하는 니콜라이가 충족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비석에 연표를 새기듯이 건조하게 성큼성큼

하쿠와 영록의 관계가 일회적 마주침 이상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과 달리, 니콜라이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으나 마음 둘 곳 갖지 못한 진주와 가까운 관계로 발전한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사회가 조명하지 않는 기댈 곳 없는 청년의 현실부터 소수자가 마주하는 어려움까지를 지극히 평범하고 우연적인 사건의 결과로써 아무렇지 않게 적어 내린다. 시간 뿐 아니라 공간과 환경까지를 건너뛰며 서술하는 방식은 기존의 한국문학 가운데선 그리 흔한 방식이 아닌데, 비석에 연표와 연대기를 새기듯 압축하여 요약하는 듯한 모습이 이채롭게 다가온다.

가장 흥미롭게 읽은 '전조등' 또한 마찬가지다. 일곱 살 어린 소년의 일상으로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하루, 한 달, 일 년 씩을 아무렇지 않게 건너뛰며 단박에 대학으로, 사회로, 그리고 수차례의 연애와 운명적 만남, 청혼과 결혼, 출산으로 달음박질친다. 그리 뒤처지지 않은 보통의 가정에서 대단히 착하지도 그렇다고 못돼먹지도 않은 평범한 주인공의 변화를 작가는 건조하지만 호쾌하게 성큼성큼 그려낸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일 잘 하는 직장인은 제 속을 감추고 남을 속일 줄 아는 이의 몫일 수도 있겠다. 주인공 또한 그러해서 통계를 보기 좋게 매만져 회사가 낫게 보이도록 분칠하는데 도가 트고, 상사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적어도 미움을 사지 않는 정도의 사회생활을 할 줄을 알게 된다. 여자 또한 그렇게 만나지만 어떤 이유인지 깊어지는 일은 잘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찾아든 어떤 여성과 마침내는 사랑을 하고 청혼을 하고 차츰 깊어져 인생을 함께 하게 되는 일. 그 모두가 '세상 모든 바다'의 영록이 깔려 죽고,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속 니콜라이가 러시아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은 우연의 결과란 것을 이 소설은 은근히 짚어내고 있다.

누가 이를 현실이 아니라고 말할까

실린 소설들은 김기태 특유의 성실함으로 온갖 주제를 분방하게 오가면서도 나름의 세계관과 가치관의 반영을 포기하지 않는다. '전조등' 속 주인공의 성취 가운데서도 통계의 조작 같은 가진 자의 편법이, 또 벗겨진 신발 같은 불안이 상존하는 것처럼 등단작 '무겁고 높은'에서도 승패를 뒤바꾸는 심판의 불법과 타인과의 단절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사회의 수많은 불법과 편법, 교묘해진 탈취와 조작의 반영이란 사실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테다.

'보편 교양'은 제목처럼 김기태의 소설 가운데 가장 편한 마음으로 읽어낼 수 있는 단편이다. 고등학교 3학년 선택과목인 고전문학 교사의 한 학기쯤을 다룬 이 소설은 학생들에게 <자본론>을 지정도서로 읽히는 것과 관련해 들어온 민원을 두고서 벌어지는 한 편의 이야기다. 무엇이 지정도서여야 하고 무엇이 아니어야 하는지를 가르는 기준을 교사는 고민하지만, 그 고민이 무색하게 위협은 어처구니없이 사라진다.

그 난이도를 고려할 때 고등학생에게 <자본론>을 읽도록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보편 교양'은 꽤나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학생이 배움에만 충실할 수 없도록 하는 세상과 교사가 수업에만 신경 쓸 수 없도록 하는 현실, 낫고 못함으로만 가를 수 없는 인간의 가치에 대하여 독자는 나름대로 고심할 기회를 얻는다.

실린 대부분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처음과 끝에서 다른 무엇을 갖는다. 즉 변화한다. 때로는 성장이고 때로는 관계의 획득이며 때로는 단순한 변화인 순간들로부터 작가 김기태가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은근히 드러나는 듯도 하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믿음은 마침내는 사람이 변해야만 한다는 당위와 이어진다. 전혀 다른 영역에서 부딪고 깨어져 나가는 보통의 존재들로부터 변화를 시작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어떤 독자는 품게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 성기고 납작하다고도, 참신하고 성실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책이다. 나는 그 모두가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여긴다. 다만 나는 한국 문단 가운데 간만에 불어온 색다른 바람을 반갑게 느낀다. 내가 읽어낸 좋은 것이 훗날 더 나은 무엇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몇 편의 작품을 보자면 결코 무리한 기대는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은이),
문학동네, 2024


#두사람의인터내셔널 #김기태 #문학동네 #한국소설 #김성호의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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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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