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낙선재
김병모
궁궐 입구 돈화문이 공사 중이라 옆문으로 들어서자 수백 년 수령의 회화나무들이 똬리를 틀고 삼정승이나 되는 듯 필자를 금천교(禁川橋) 다리로 안내하는 것 같다. 재밌게도 금천교 다리 위 서수(瑞獸) 두 마리가 고개를 살짝 틀어 앉아 해학적으로 바라본다. 금천교는 풍수에 좋다는 배산임수(背山臨水)를 구현하고 궁궐과 외부의 잡 귀를 막는 경계이기도 하다.
금천교 앞 진선문을 지나 인정문에 이르자 넓지 않은 공간이 보인다. 이곳에서 연산군의 왕 즉위 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인정문 문 간에서 왕의 즉위 식을 거행했다니 뜻밖이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선왕 성종이 상(喪)을 당한 상황에서 성대한 왕의 대관식이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태종은 1405년(태종 5년)에 창덕궁을 창건한 후 1418년(태종 18년)에 재건한다. 재건 과정에서 창덕궁 건축 토목공사 감독 업무를 맡은 박자청(1357~1423)이 등장한다.
그는 창덕궁을 이궁(離宮) 형태를 취하면서 자연의 경치를 빌린 차경(借景)의 멋을 낸다. 이와 같은 궁궐의 아름다움과 역사성을 인정받은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한다.
왕의 생활공간 희정당 뒤편으로 한 발 더 들어가니 대조전(大造殿)이 보인다.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 한 내전으로 다른 지붕들과 달리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梁閣) 지붕이다. 왕의 후계자가 태어나는 곳이라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고 한다.
창덕궁은 반듯한 사각 모형의 인위적인 경복궁과 달리 세계 문화유산답게 산 자락을 따라 자연이 내준 대로 차경의 미학을 발휘한다. 태종은 1차 왕자의 난으로 피의 냄새가 진동한 경복궁을 좋아할 리 없다.
광해군 역시 어떤 연유(緣由)인지 모르지만,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궁궐 중 창덕궁을 가장 먼저 재건하였다고 한다. 조선 역대 왕들이 270여 년을 창덕궁에서 통치하였다니, 조선 왕들의 창덕궁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창덕궁은 그야말로 역사의 부침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특히 조선 24대 문예 군주 헌종의 창덕궁 사랑은 남다른 것 같다. 헌종은 창덕궁 옆에 낙선재(樂善齊)를 짓고 '유재(留齋)'란 추사 김정희의 현판을 한때 내걸었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는 이 편액을 통해 욕심에 눈이 멀어 온갖 무리한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고자 한다. 그는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기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고(留不盡之巧以還造化, 유불진지교이환조화),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기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留不盡之福以還子孫, 유불진지복이환자손)는 등 유재 현판에 부제를 달아 남김의 미학을 보인다.
헌종 역시 유재의 미학을 실천이라도 하듯 낙선재를 단청(丹靑) 하지 않는다. 장락문(長樂門)을 통해 낙선재에 들어서자 누마루 밑 아궁이 주변에 얼음이 깨지는 듯한 방화벽 문양이 이채롭다. 현대적 감각으로도 손색없는 빙렬(氷裂) 문양이다. 궁궐의 잦은 화재를 경계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창덕궁 낙선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왕조 마지막 왕세자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말년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조선 선왕들이 즐겨 찼던 낙선재 뒷동산을 거닐며 조선의 마지막 왕조를 정리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창덕궁 후원의 봄기운으로 싹튼 자연의 섭리와 옥류천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조선 왕들을 넘어 진정한 창덕궁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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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들이 가장 선호했다는 이 궁... 이유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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