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로주변에는 야생화가 봄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오문수
필자가 별량면 소재지를 찾아가는 이유가 있었다. <소록도의 구술 기억> 1권에 등장하는 김정호(가명)씨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자는 취지다. 함경북도 여흥 출신인 김정호씨는 올해 나이 100세로 소록도에 생존해 계신다.
<소록도 구술기억>1권에는 김정호씨가 고향을 떠나 소록도를 찾아가는 여정과 유랑생활하면서 겪었던 이야기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그의 구술기록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이다. 이들의 애환을 이해하고자 일부 소개한다.
중학생이던 시절 한센병이 발병한 그는, 당시 주위 사람들이 보내는 불편한 시선을 피해 교복을 입은 채 집을 나섰다고 한다. 형님이 가르쳐준 '전라남도 다도해 소록도'라는 주소만 가지고 목포에 도착했다.
목포경찰서에선 담당 순경이 "소록도는 힘드니까 여수 애양원이라는 데가 있으니 그곳으로 가라. 거기 가면 훨씬 좋다"며 애양원을 찾아가라고 권했다. 애양원에 갔지만 "받아줄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단다. 실망해서 순천으로 돌아와 정류장에서 벌교행 표를 사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우연히 승하차를 돕는 빨간 모자 쓴 사람과 실랑이가 발생했다.
"야! 너 보따리 싸가지고 가라"
"벌교행 표 끊었고 지금 벌교에 갈 겁니다."
"벌교로 가든지 말든지 그건 네 자유고. 차는 못 타니까, 걸어가라"
차표를 샀는데도 차를 못 타게 하는 게 분했던 그는 파출소를 찾아가 순경한테 억울한 사연을 말했다. 순천 정류장에 전화를 걸어 전후사정을 확인한 순경은 "손을 펴봐라"고 말했고 김씨의 오그라진 손가락을 확인한 순경은 "아, 그렇구나. 그러면 할 수 없다. 걸어가라"고 했단다. 억울한 마음으로 파출소를 나와, 밤 열시 경 벌교를 향해 걸어가던 김씨는 노변에 가마니를 깔고 있던 할아버지를 만나 할아버지한테 사정했단다.
"할아버지, 나 오늘 밤 같이 잘 수 없습니까?"
"아, 잘 수 있다. 그런데 어디 가느냐?"
"고흥에 우리 누나가 살고 있는데 자형 되는 사람이 철공소 일을 한대요."
"고흥에는 철공소가 없다. 나는 얻어묵고 댕기니까 빠삭하게 다 안다."
둘이 가마니를 깔고 잠들 무렵,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노인은 가마니를 들고 가버렸단다. 서러움에 울면서 남의 집 처마 밑에서 하룻밤을 지샌 김씨는 다음날 아침 별량면 용두리 마을 뒷길에 기진해 쓰러져 있었다. 그때 김씨 옆을 지나던 한센인 환자 한 분이 울면서 말했단다.
"너, 소록도 가지야(가는 거지)? 나도 지금 병들어서 집에서 나오는 길이다. 내 고향이 전남 벌교인데 오늘 아침에 밥먹고 걸어서 순천 가는 길이다. 소록도 가면 일이 심하고 일본 사람들이 먹을 것도 적게 주고 고생을 시키니까 가지 말고 날 따라서 가면 배도 고프지 않다. 그러니까 나 따라와라"
유랑자들에게도 계급이 있었단다. 맨 아래는 똘마니, 그 위로는 왕초, 대장은 수동무라고 불렀다. 김정호씨는 그날부터 걸인의 똘마니가 된 셈이다. 똘마니는 밥을 얻어오고 자질구레한 심부름까지 도맡았다.
그 걸인은 "순천군 별량면 척동이라는 동네 부잣집에 오늘 제사가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해 따라갔다. 김정호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먼저 부잣집에 도착한 걸인이 밥 좀 달라고 부탁했다.
"학생이 하나 병들어 집을 나왔는데 사흘을 굶어가지고 밥도 못 묵고. 배고파 기진해 있으니 밥 좀 주세요."
"아이고, 얼마나 배고프겠나. 학생 거기 앉아서 먹어. 적으면 더 줄테니까. 부족하면 말해."
그런 서글픈 생활을 하고서야 소록도에 왔다는 이야기였다.
걸으면서 본 별량... 아직도 비옥한 토지가 많았다
지난 22일 도보여행 때 느낀 점. 예전에 승용차를 이용해 별량을 지나다닐 때는 바닷가 마을이라 농토가 얼마 되지 않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걸으면서 보니, 의외로 넓은 농지가 많다.
농수로에서 헤엄치며 물고기 잡던 오리 몇 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날아간다.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는 농부한테 별량면사무소 가는 길을 물어보니 가는 길을 가리키며 "거기까지 걸어가려고요?"하며 놀란 표정이다.
별량면 사무소에 도착하니 정확하게 오후 두 시다. 점심 때가 넘어 '욕보할매' 집에 들렀더니 아직도 손님이 바글바글하다. 식당을 내게 소개했던 지인은 "식당 주인 할매의 나이가 86세이니 한센인 환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설명했다. 할매와 대화하고 싶어 할매를 찾자, 종업원한테서 "할매는 요즈음 나이가 많아서 은퇴했어요. 안 나와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맛있는 짱뚱어탕을 먹은 후 도로변 아래 농로를 따라 걷는데 밭에 심어놓은 두릅에 비닐이 씌워져 있었다.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한테 이유를 물으니 "처음 심은 두릅 새싹에는 비닐을 씌워야 마르지 않아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화창한 봄날이라 날씨가 더워 잠바 자크를 풀고 걸었다. 바닷가에 나가 꼬막 채취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만 갈길이 바쁘다. 이정표를 보니 벌교까지 4㎞ 남았다. 해가 저물어갈 무렵 벌교가 보이는 휴게소에서 주스를 사러 가게에 들렀더니 주인이 말을 걸었다.
"나이도 드신 분 같은데 왜 배낭을 메고 걸어요?"
"차비가 없어서 순천역에서 걸어왔어요."
"예끼 여보쇼. 차비가 없어서 순천에서 여기까지 걸어왔다고 하면 욕해요. 나이 든 것 같은데 추접스럽다고 그래요."
"하하하, 실은 옛날 한센인들이 걸었던 길을 체험해보고 싶어서 벌교역까지 걷고 있습니다."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라며 화를 삭이는 듯한 가게 주인과 헤어져 별교시내에 접어들자 조정래의 '태백산맥문학관'이 보인다. 시내 곳곳에는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된 유적들이 남아있다.

▲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서 염상구가 깡패 왕초와 담력 겨루기 시합을 벌였던 벌교 '철다리' 모습
오문수

▲ 벌교역 모습. 소록도를 가려는 한센인들이 벌교역에서 내려 소록도까지 걸었다고 한다.
오문수
때마침 벌교역에서 순천역으로 가는 경전선 위로 열차가 기적소리를 내며 벌교' 철다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벌교 '철다리'는 1930년 무렵 경전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소설의 배경이었던 시절은 물론 1970년대 후반 국도 2호선 도로가 선형을 바꾸기 전까지만 해도 홍교 소화다리(부용교)와 함께 벌교 포구의 양안을 연결하는 세 개의 교량 가운데 하나였다. 소설에서는 염상구를 가장 인상적으로 각인시켜 준 곳이다.
일본 선원을 죽이고 도망쳤다가 해방과 함께 벌교로 돌아와 일본 놈을 처치한 독립투사로 변신한 염상구가 장터거리 주먹패와 주도권 쟁탈전에서 땅벌이라는 깡패 왕초와 철교 중앙에서 기차가 가까이 올 때까지 누가 더 오래 버티나 담력 시합한 철다리다.

▲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인 벌교시내 곳곳에는 소설 <태백산맥>을 기리는 기념물이 조성되어 있었다.
오문수
벌교는 꼬막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시내 상가에는 꼬막과 해산물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 갈길이 바쁜 나는 사진만 찍고 벌교역으로 갔다. 시간을 보니 오후 6시 20분이다. 역무원에게 순천으로 가는 기차를 물으니 오후 5시 반 기차는 금방 지나갔고 밤 9시가 넘어야 있다고 한다.
갑자기 장거리를 걸었더니 발바닥도 약간 아프고 오금도 아파 벌교에서 하룻밤 자기로 했던 계획을 바꿔 집으로 되돌아기로 했다. 불현듯 먹을 것도, 잠잘 곳도 없어 구걸하다 들판에서 잠자던 한센인들의 처지가 생각나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충분한 상황이다. 집도 먹을 것도 모두 갖추고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더 바랄 게 아니라 더 겸손해져야 하겠구나, 그렇게 다시 초심을 확인하게 하는 도보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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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의 눈물 어린 발자취길, 거기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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