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득 개운한 김치 한 젓가락이 간절했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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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은 1년 농사였다. 어머니는 이른 봄부터 김장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셨다. 김치 맛을 좌우하는 건 젓갈이었고, 어머니는 인천포구까지 가서 싱싱한 생멸치를 한 바구니 사 오셨다. 아직 눈이 반짝이는 멸치를 커다란 독에 담고, 굵은 소금을 켜켜이 뿌려 절였다.
몇 달이 지나면 멸치에서 국물이 배어 나와 윤기가 돌고, 비릿하면서도 짜릿한 감칠맛이 올라왔다. 어머니는 국물이 우러나올 때마다 독을 열어 잘 섞어 주셨다. 손끝으로 살짝 찍어 맛을 보며 "아직 덜 삭았네" 하시곤 했다. 그렇게 계절을 지나면 쿰쿰한 젓갈 내음이 내가 놀던 골목길까지 풍겼다.
소금도 천일염으로 사서 여름 내내 간수를 뺀다. 고추가루 역시도 시골에서 고추를 사와 마당에 펼쳐놓고 직접 말렸다. 혹시나 비를 맞힐까 고추를 말리는 동안은 집을 비우지 않으셨다.
하루에도 몇 번씩 뒤집어주며 몇 날 며칠 계속 말린다. 다 말린 고추는 하나하나 먼지를 닦는 작업을 거친다. 그런다음 드디어 방앗간에 가서 빨간 고추가루로 완성된다.
드디어 김장 날, 우리 식구와 동네 아주머니들까지 총출동해서 150포기를 1박 2일동안 절인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노란 배추는 덜 절여지지도 더 절여지지도 않아야 했다. 어머니는 그 절묘한 시점을 감별사처럼 잡아내셨다. 어머니 지휘 아래 마당 수돗가에는 절인 배추가 척척 쌓였다.
어머니는 마늘을 미리 믹서로 갈아 두는 법이 없었다. 바로 찧어야 진짜 마늘 맛이 난다는 이유였다. 절구에 빻은 마늘은 매운 기운이 살아있고, 향도 강렬했다. 그 향이 고추가루와 버무려질 때 비로소 김치 양념다운 맛이 났다.
알이 꽉찬 작은 새우를 골라 싱싱한 채로 넣었고, 해조류의 일종인 청각을 잘게 썰어 넣었다. 갓 버무린 김치는 바다 향이 났다. 한 입 먹으면 아삭한 배추 속에서 새우의 감칠맛이 톡 쏘듯 퍼졌다.
청각의 짭조름한 바다 내음도 혀끝에 감돌았다. 새우는 익을수록 더욱 부드럽고 깊은 맛을 냈고, 청각은 감칠맛을 더해 주었다.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김치 맛은 점점 더 오묘해졌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파킨슨 병이 찾아오면서 이제는 그 맛을 다시는 맛볼 수 없다.
옛 시절 김장하던 날, 환한 얼굴로 나를 부르며 갓 버무린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어주던 그 손길이 그립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당연했던 장면들이 이제는 가슴 저리게 다가온다. 골목을 채운 쿰쿰한 멸치 젓갈향이 60년을 지난 지금까지도 내 안에 남아 그리움이 됐다.
김치는 '만든다'가 아니라 '담근다'고 한다. '만든다'는 즉각적인 결과를 떠올리게 하지만 '담근다'는 시간을 품고 있다. 갓 담근 김치는 아직 온전한 맛을 내지 못한다. 양념이 시간을 두고 서서히 스며들어야 한다. 젓갈이 깊은 풍미를 더해가며, 공기 속 미생물이 천천히 발효해야 김치는 비로소 제 맛을 찾아간다. 기다림이 있어야 한다.

▲ 김치를 '담근다'는 말에는 그런 시간의 무게가 담겨있다.(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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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른다고 깊어지지 않고, 억지로 빠르게 익힌다고 제 맛이 나는 것도 아니다. 김치를 '담근다'는 말에는 그런 시간의 무게가 담겨있다. 재료를 버무려 항아리에 꼭꼭 눌러 담고, 적당한 온도에서 익기를 기다리는 그 과정이 우리의 삶을 천천히 삭여 가는 일과도 닮았다.
좋은 것들은 시간이 필요하다. 금방 익힌 김치는 겉돌고, 단번에 얻은 지식은 쉽게 잊힌다. 어머니가 절구에 찧어 넣은 마늘처럼, 삶도 부딪치고 찧이면서 진짜 맛을 낸다. 생멸치가 젓갈이 되기까지 긴 기다림이 필요하듯, 경험도 쌓이고 삭아야 비로소 깊어진다.
어머니의 김치는 그 자체로 삶의 비유였다.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마음, 공들인 것이 결국 더 큰 보답을 준다는 믿음, 정성이 깃든 것이야말로 오래 남는다는 진리를 어머니는 김치로 가르쳐 주셨다.
어머니는 이제 절구를 들지 못하지만, 그 손끝에서 전해진 시간의 맛과 기다림의 의미는 내 안에 남아있다. 언젠가 어머니가 그리운 어느 날, 나는 다시 김치를 담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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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까지 손수... 세상에 더는 없을 엄마의 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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