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는 유전자 책
심은혜
우리 유전자는 '밖에서 들어온 신호'를 감지하고 반응하며, 그 방식에 따라 건강이나 감정이 좌우된다고 한다. 마치 피아노 건반처럼,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이 닿으면 따뜻한 선율이 울리고, 무시와 무관심이 쌓이면 불협화음이 흐른다.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이것이었다.
"공감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경험되어야 한다."
공감을 잘하는 사람은 본래 착해서가 아니라, 공감받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어른을 만났던 사람은 타인의 감정에도 따뜻하게 반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없다면, 공감이란 감정은 낯설고 버겁게 느껴진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엔 공감을 배우고 연습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입장을 바꿔보는 훈련보다 정답을 맞추는 경쟁이 익숙했고,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기보다 감추는 법을 먼저 배웠다. 그래서 누군가가 "속상하다"고 말하면 "그건 네가 예민해서 그래"라고 반응하고, 진심을 꺼낸 사람에게 "오해한 거 아니야?"라며 마음을 덮는다.
한 번은 내가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았을 때, 상대가 조용히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해준 적이 있다. 그 짧은 말에 마음이 풀렸다. 공감은 때때로, 말보다 마음을 내어 주는 것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다름은 그저 관점의 차이일 뿐인데, 우리는 너무 자주 그것을 틀렸다고 판단해버린다.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기보다, 판단하고 규정하려는 마음이 앞섰다. 그렇게 마음의 문이 닫히고, 우리는 서로에게 점점 낯설어진다.
어쩌면 한국 사회는 특히 더, '다름'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오래 경쟁 속에 살아왔다. 타인을 공감하기보다 판단하고 비교하는 일이 익숙해졌다. 감정을 숨기고 드러내길 어색해하는 문화 속에서, 타인의 감정에도 서툴 수밖에 없다.
공감은 디지털 소통에서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빠르게 오가는 메시지 속에서 맥락은 생략되고, 말보다 감정이 먼저 반응한다. 얼굴을 보지 않고 주고받는 말은 때론 너무 쉽게 상처가 된다.
역사적인 기억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전쟁, 분단 같은 경험 속에서 '다르면 위험하다'는 두려움이 각인되었고, 우리는 무의식중에 '하나 되어야 안전하다'는 감각 속에 살아왔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공감받은 경험이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감정을 말하고 받아들여질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자라온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려면, 어쩌면 더 많은 연습과 따뜻한 경험이 필요하다.
감정 표현에 익숙치 않고, 경쟁이 일상인 사회. 그 안에서 "왜 그렇게 생각했어?"보다는 "그건 이상해"가 먼저 나온다. 그 순간, 공감의 출발선은 멀어지고 마음의 문은 닫히기 시작한다.
정치적 입장에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날을 세우는 우리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걱정이 앞선다. 특히 2025년의 지금, 나라 전체가 날 선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서로를 향한 의심은 깊어지고,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 공감이란 말은 너무도 멀고, 공허하게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 "그래,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하는 건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끝까지 반대편에 서서 살아갈 수 있을까?
공감은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어긋난 마음을 덜 멀어지게 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한 번쯤 생각해보려는 시도.
의견은 다르더라도, 상대를 완전히 밀어내지 않기. 물론 그런 시도는 어색하고,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괜찮다. 작은 시도라도 해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거대한 단절의 벽에 금을 내는 첫 걸음이 될 수 있다.
화를 내기 전에 한 번 더 물어보는 것. 다른 입장을 들었을 때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해보는 것. 그리고 때로는 이렇게 말해보는 것도 좋다.
"그래, 그럴 수 있어."
이 말은 상대방을 향한 작지만 따뜻한 배려다. 설령 마음속으로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라도, 일단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이상하게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 공감은 그렇게, 소란스럽지 않게 다시 살아나는 감정이다. 때로는 말보다 눈빛 하나로, 다정한 침묵으로, 혹은 "괜찮아, 네 말 이해돼"라는 짧은 문장으로.
우리는 다시 서로에게 말을 걸 수 있을까. 나와 다름을 틀림으로 여기지 않고, 그 차이를 이해하려 애쓸 수 있을까. 아직은 가능하다고 믿고 싶다. 우리가 타고난 유전자가 그 방향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이 책이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말해주었으니까.
사전엔 공감을 '남의 감정이나 의견에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라 정의하지만, 나는 이제 공감이란 정답이 아니라 함께 있으려는 의지, 상대의 감정을 받아들일 여백을 내어주는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라 믿는다.
공감하는 유전자 -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대하여
요아힘 바우어 (지은이), 장윤경 (옮긴이),
매일경제신문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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