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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는 무죄"...일흔 넘어 사학과 입학한 딸의 악전고투

[방청기] 77년 전 제주4.3과 여순사건이 말하는 것... 여순사건 유족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

등록 2025.04.03 20:57수정 2025.04.0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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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7일 오전 10시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316호 법정. 방청석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로 가득 찼다. 판사들을 기다리는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세 명의 판사가 입장한 뒤 판사들과 방청객들이 머리를 숙여 서로 맞인사를 했다. 판사가 재심 청구인들의 출석을 확인했다.

"망 방OO의 재심 청구인 방OO 오셨습니까?"
"네."
"망 강OO의 재심 청구인 강OO 오셨습니까?"

이쪽 저쪽에서 두 사람이 손을 든다.

"아니. 저기여, 저기."

옆 사람이 손을 잘못 든 분의 팔을 잡아 끌어내린다.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어두운 노인들이 재판정을 가득 메운 것이다. 판사는 11개 사건 스물 네 명의 피고인들에 대해 한꺼번에 판결하고 선고를 내리겠다고, 그래도 괜찮겠냐며 동의를 구했다. 청구인들이 모두 동의했다. 젊은 판사가 선명한 목소리로 판결문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무죄 판결 후 단체사진 24명의 여순사건 희생자들의 유족들이 순천 법원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무죄 판결 후 단체사진 24명의 여순사건 희생자들의 유족들이 순천 법원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김양오

"피고인들은 1948년 10월경 여수 14연대 군인들에게 가담, 협조했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재판 절차 없이 즉시 사형 또는 호송 수감 되었다가 사형된 사람들입니다. … 미군정 시기 포고령 제2호에 적용받은 것인데 포고령 제2호는 포괄적이고 추상적이라 국민들이 무슨 뜻인지 판단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현대의 법치주의와 대한민국 헌법에 위배됩니다. … 청구인들은 모두 희생자의 유족들입니다. 어린 아이만 남겨 놓고 젊은 부부가 잡혀가 희생된 경우도 있습니다. … 반세기가 지나 정부의 과거사 정리위원회를 통해 부모와 가족이 그렇게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돼 길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이 법정에 서셨습니다. 재심 청구인들이 겪었을 고통을 우리 재판부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사법부는 진심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판결문을 다 읽은 뒤 판사는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함께 '무죄'를 명확히 선고했다.


"망 유OO 무죄, 망 김OO 무죄, 망 방OO 무죄..."

중간에 박수를 치며 "고맙습니다!"하고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묵묵히 선고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지난 3월 6일 재심에서 검사가 "검찰 역시 깊은 책임을 통감하며 무죄 선고를 요청합니다"라고 했을 때 이미 환호성을 지른 바 있었기 때문이리라.


여순사건 희생자 유족 이숙자씨 만 한 살 때 잡혀가 돌아가신 부모의 무죄 판결 통지서를 받고 기뻐하고 있다.
▲여순사건 희생자 유족 이숙자씨 만 한 살 때 잡혀가 돌아가신 부모의 무죄 판결 통지서를 받고 기뻐하고 있다. 김양오

재판이 모두 끝나고 법정 밖으로 나온 유족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등을 토닥이며 기쁨을 나눴다. 판사가 '어린 아이를 두고 젊은 부부가 잡혀갔다'며 언급했던 그 어린아이는 머리 허연 할머니가 되어 "내가 만 한 살 때 부모님이 잡혀 갔어요. 우리 엄마가 나를 업고 잡혀가니까 외할머니가 따라와 애기를 받아 키운 거지"하며 사연을 풀어냈다.

외가에서 자란 이숙자씨는 여덟 살 때부터 남의 집살이를 했다. "힘들었던 걸 말하려면 한도 끝도 없어요. 무죄 판결 나니까 부모님(이동찬, 강인례) 명예 회복하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기뻐요."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나와 말을 잇지 못한 이숙자씨는 10년 가까이 부모님의 기록을 찾아다닌 끝에 이제야 부모님 이름 앞에 '빨갱이'이라는 주홍 글씨를 지우게 되었다.

1948년 10월 여수와 순천 지역을 중심으로 광양, 벌교, 구례, 곡성까지 번졌던 한국 현대사의 비극. 오랫동안 '여순반란'으로 불렸고 지금은 '여순항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많지만 공식적으로는 '여순 사건'이라고 표현한다. 무엇으로 불리든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 시작은 1948년 4월 3일 제주도였다. 해방 이후 북에는 소련이 남에는 미국이 들어와 좌우익의 끝없는 갈등이 평행선을 달리던 중 이승만이 남한에서 단독으로 선거를 치르고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 하자 제주도에서 미군정 철수와 단독 총선 반대를 외치며 봉기를 한 것이다.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은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제주도 봉기를 강력하게 진압하기 시작했고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군인들에게까지 제주도 진압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14연대는 출병을 거부했다. 당시 14연대가 여수 지역에 붙인 벽보의 내용은 이러하다.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
1. 동족상잔 결사 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우리는 제주도 애국 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순천 장대다리 여수 14연대가 제주도 출병을 거부하고 기차를 타고 순천으로 들어와 진압군과 첫 교전을 벌인 곳이다.
▲순천 장대다리 여수 14연대가 제주도 출병을 거부하고 기차를 타고 순천으로 들어와 진압군과 첫 교전을 벌인 곳이다. 김양오

14연대는 배가 아닌 기차를 타고 주둔지인 여수를 떠나 순천으로 향했다. 14연대가 떠난 뒤 여수는 끔찍한 일을 겪게 된다. 미군정이 육해공군을 동원해 여수를 총공격한 것이다. 14연대는 경찰하고만 교전했지만 이승만과 미군정은 여수 시민 전체를 공격했다. 여수 사람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 속을 뛰어 도망 다니는 모습은 지금도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순천에 도착한 14연대는 동천 '장대 다리'에서 진압군과 첫 교전을 벌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순천에서 같은 나라 군인들끼리 서로 총을 쏘기 시작한 것이다.

순천 지역 민간인들의 비극도 14연대가 빠져 나간 뒤 시작되었다. 10월 22일 순천에도 첫 번째 계엄령이 내려졌다.

여순평화공원 기록 사진 순천의 동천 장대 다리 옆에 조성된 여순평화공원에 여순사건 기록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순평화공원 기록 사진 순천의 동천 장대 다리 옆에 조성된 여순평화공원에 여순사건 기록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김양오

계엄령이 내려진 다음날인 23일부터 민간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계엄령 지역의 법관은 군인이고 군인의 말과 손짓이 판결이었다. 총을 든 군인과 경찰의 말 한마디와 손가락질 하나로 생사가 갈렸다. 일제 강점기 일본의 경찰이었던 사람들이 거의 그대로 미군정의 경찰로 이어졌던 터라 경찰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일본도를 휘둘러 참수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들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기로 결정하는 잣대는 매우 황당한 것들이었다. 머리를 짧게 깎은 사람, 흰고무신을 신은 사람, 손에 총을 쥐었던 흔적이 있는 사람, 손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사람, 군용 팬티를 입은 사람...

그런 어처구니없는 기준으로 어린 남자 아이들도 잡혀가서 죽었다. 마을 사람 모두를 학교 운동장에 집합시켜 손가락질 하나로 너는 이쪽 너는 저쪽 하며 갈라놓았고 한쪽 사람들을 모두 학교 건물 뒤로 끌고 가 죽였다. 마을 동산으로 끌고가 나무에 묶은 뒤 총살하고 구덩이에 묻어 버리기도 하고 태워 버리기도 했다. 배에 태워 바다 한가운데에 던져 버리기도 했다. 그들의 손가락질은 '손가락총'으로 불렸고 그렇게 죽은 사람들은 수천 명에서 만 명에 이른다. 이렇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최근까지도 '빨갱이'로 몰렸고 여수와 순천은 아주 오랫동안 '반란의 도시'로 낙인찍혀 있었다.

여순사건 희생장 유족 장경자씨(80세) 여순 사건 희생자 중에 처음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장환봉씨의 딸이다. 여순사건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고령의 나이에 국립순천대학교 사학과에 진학 현재 4학년이다. 구석진 곳에 세워져 있던 여순사건 기념비를 잘 보이는 곳에 세워 달라고 총장실까지 찾아가 건의할 정도로 여순항쟁 바로 알리기에 열정을 쏟고 있다.
▲여순사건 희생장 유족 장경자씨(80세) 여순 사건 희생자 중에 처음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장환봉씨의 딸이다. 여순사건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고령의 나이에 국립순천대학교 사학과에 진학 현재 4학년이다. 구석진 곳에 세워져 있던 여순사건 기념비를 잘 보이는 곳에 세워 달라고 총장실까지 찾아가 건의할 정도로 여순항쟁 바로 알리기에 열정을 쏟고 있다. 김양오

이날 방청석에는 특별한 유족 한 분이 함께 하고 있었다. 여순 사건 희생자 중에 처음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장환봉씨의 딸 장경자(80)씨다. 장씨의 아버지는 순천역에서 근무하던 기관사였다. 진압군은 불순분자 66명의 명단을 내라고 지시했고 부역장은 순천 사람이 아닌 직원들을 중심으로 명단을 제출했다. 장경자씨 아버지는 전북 남원 사람이었다. 어린 두 딸과 아내를 두고 잡혀가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

장경자씨는 그런 얘기를 마흔이 넘어서야 어머니한테 처음 듣고 가슴이 방망이질 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진실 규명을 위해 자료 조사를 하고 청와대와 국회 앞에서 '여순사건 특별법'을 제정하라며 1인 시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2020년 1월, 7차례의 재심 끝에 대법원에서 결국 아버지의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아냈다. 판결문에는 '순천 탈환 후 22일 만에 사형이 선고, 집행된 걸 보아 적법한 절차 없이 체포한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되어 있다.

"그 때 김정아 판사가 우느라고 판결문을 제대로 못 읽었어요. 판사 검사 할 것 없이 다 일어나서 정중하게 인사하면서 너무 늦어서 죄송하다고 해줬지요."

장씨는 지금도 그 때 장면이 눈에 선하다. 7년 동안 검찰의 항고를 넘고 또 넘으며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아버지는 죄가 없다'는 샛별같은 진실, 그것 하나 때문이었다. 그 뒤 장경자씨는 여순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검정고시와 수학능력시험을 거쳐 순천대학교 사학과에 진학했다. 여든 살인 지금은 4학년이다.

국립순천대학교 산하 '10.19연구소'에서 발간한 <10.19증언집>은 지금까지 일곱 권이 나와 있다. 희생자들의 유족 대략 130여 명의 이야기를 담은 구술 기록집이다. 책에 적혀 있는 그들의 목소리에는 한숨과 눈물이 너무나 진하게 배어 있다. '빨갱이 가족'이라서 억울한 사연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며 살았고 연좌제에 걸려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었던 사람들이 이제야 가슴 속 깊이 박혀 있던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다.

아직도 한반도에는 '빨갱이'라는 말이 도깨불처럼 돌아다닌다. 빨갱이는커녕 빨갱이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빨갱이 누명을 쓰고 평생 살아가는 나라다. 이제 눈 흐리고 귀 어두운 노인이 된 그들에게 1억, 2억의 배상금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될지 모르지만 국가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면 아직도 숨어지내는 한분 한분의 유가족들을 하루라도 빨리 모두 찾아내어 무죄 판결과 함께 보상금 지급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10.19증언집> 7권의 마지막 구술자는 '역사는 반복된다, 예전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죠. 오직 완전한 해결을 통해 반복될 수 없는 단계로 만드는 것이 역사의 반복의 고리를 끊어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2024년 12월 3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계엄령 선포'라는 나쁜 '역사의 반복'이 일어나고 말았다. 교과서에서나 봤던 '계엄령, 포고령'이 현실에서 발표된 것이고 총을 든 군인들이 국회를 침탈하고 장갑차와 군 헬기가 국회로 향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 시민들과 국회의원들이 몸을 던져 막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다시 1948년 제주도와 여순 지역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일을 다시 겪었을지도 모른다.

여순의 상징 동백꽃 여순사건의 상징은 붉은 동백꽃이다. 순천에는 가을부터 봄까지 붉은 동백꽃이 끝없이 피고 진다. 여순사건의 현장이기도 한 순천대학교 교정에 핀 동백꽃이다.
▲여순의 상징 동백꽃 여순사건의 상징은 붉은 동백꽃이다. 순천에는 가을부터 봄까지 붉은 동백꽃이 끝없이 피고 진다. 여순사건의 현장이기도 한 순천대학교 교정에 핀 동백꽃이다. 김양오

2024년 총부리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겨누지 않고 돌아갔던 군인들을 보며 안도했듯이 1948년 제주도민들에게 총을 쏘지 않으려고 배 대신 기차를 선택했던 여수 14연대 군인들에게 당시 사람들은 안도했을 것이다. 물론 14연대에게 죽임을 당한 민간인들도 있었다. 그런 모든 사실이 우리의 아픈 역사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공산주의자였는지 아니었는지 따지는 게 아니라, 반란인지 항쟁인지 다투는 게 아니라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분명한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가장 완전한 장치는 '통일'이다. 매우 거칠고 힘든 길이지만 동족상잔이라는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통일'이라는 정답을 향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렵다고 한쪽으로 치워 놓은 그 문제를 다시 꺼내어 풀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 여순사건의 상징인 붉은 동백꽃처럼 선명하게 다가오는 77년 전 한반도 역사의 가르침이다.
#제주43항쟁 #여순사건 #통일 #계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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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화를 쓰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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