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희생장 유족 장경자씨(80세) 여순 사건 희생자 중에 처음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장환봉씨의 딸이다. 여순사건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고령의 나이에 국립순천대학교 사학과에 진학 현재 4학년이다. 구석진 곳에 세워져 있던 여순사건 기념비를 잘 보이는 곳에 세워 달라고 총장실까지 찾아가 건의할 정도로 여순항쟁 바로 알리기에 열정을 쏟고 있다.
김양오
이날 방청석에는 특별한 유족 한 분이 함께 하고 있었다. 여순 사건 희생자 중에 처음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장환봉씨의 딸 장경자(80)씨다. 장씨의 아버지는 순천역에서 근무하던 기관사였다. 진압군은 불순분자 66명의 명단을 내라고 지시했고 부역장은 순천 사람이 아닌 직원들을 중심으로 명단을 제출했다. 장경자씨 아버지는 전북 남원 사람이었다. 어린 두 딸과 아내를 두고 잡혀가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
장경자씨는 그런 얘기를 마흔이 넘어서야 어머니한테 처음 듣고 가슴이 방망이질 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진실 규명을 위해 자료 조사를 하고 청와대와 국회 앞에서 '여순사건 특별법'을 제정하라며 1인 시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2020년 1월, 7차례의 재심 끝에 대법원에서 결국 아버지의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아냈다. 판결문에는 '순천 탈환 후 22일 만에 사형이 선고, 집행된 걸 보아 적법한 절차 없이 체포한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되어 있다.
"그 때 김정아 판사가 우느라고 판결문을 제대로 못 읽었어요. 판사 검사 할 것 없이 다 일어나서 정중하게 인사하면서 너무 늦어서 죄송하다고 해줬지요."
장씨는 지금도 그 때 장면이 눈에 선하다. 7년 동안 검찰의 항고를 넘고 또 넘으며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아버지는 죄가 없다'는 샛별같은 진실, 그것 하나 때문이었다. 그 뒤 장경자씨는 여순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검정고시와 수학능력시험을 거쳐 순천대학교 사학과에 진학했다. 여든 살인 지금은 4학년이다.
국립순천대학교 산하 '10.19연구소'에서 발간한 <10.19증언집>은 지금까지 일곱 권이 나와 있다. 희생자들의 유족 대략 130여 명의 이야기를 담은 구술 기록집이다. 책에 적혀 있는 그들의 목소리에는 한숨과 눈물이 너무나 진하게 배어 있다. '빨갱이 가족'이라서 억울한 사연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며 살았고 연좌제에 걸려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었던 사람들이 이제야 가슴 속 깊이 박혀 있던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다.
아직도 한반도에는 '빨갱이'라는 말이 도깨불처럼 돌아다닌다. 빨갱이는커녕 빨갱이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빨갱이 누명을 쓰고 평생 살아가는 나라다. 이제 눈 흐리고 귀 어두운 노인이 된 그들에게 1억, 2억의 배상금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될지 모르지만 국가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면 아직도 숨어지내는 한분 한분의 유가족들을 하루라도 빨리 모두 찾아내어 무죄 판결과 함께 보상금 지급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10.19증언집> 7권의 마지막 구술자는 '역사는 반복된다, 예전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죠. 오직 완전한 해결을 통해 반복될 수 없는 단계로 만드는 것이 역사의 반복의 고리를 끊어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2024년 12월 3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계엄령 선포'라는 나쁜 '역사의 반복'이 일어나고 말았다. 교과서에서나 봤던 '계엄령, 포고령'이 현실에서 발표된 것이고 총을 든 군인들이 국회를 침탈하고 장갑차와 군 헬기가 국회로 향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 시민들과 국회의원들이 몸을 던져 막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다시 1948년 제주도와 여순 지역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일을 다시 겪었을지도 모른다.

▲여순의 상징 동백꽃 여순사건의 상징은 붉은 동백꽃이다. 순천에는 가을부터 봄까지 붉은 동백꽃이 끝없이 피고 진다. 여순사건의 현장이기도 한 순천대학교 교정에 핀 동백꽃이다.
김양오
2024년 총부리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겨누지 않고 돌아갔던 군인들을 보며 안도했듯이 1948년 제주도민들에게 총을 쏘지 않으려고 배 대신 기차를 선택했던 여수 14연대 군인들에게 당시 사람들은 안도했을 것이다. 물론 14연대에게 죽임을 당한 민간인들도 있었다. 그런 모든 사실이 우리의 아픈 역사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공산주의자였는지 아니었는지 따지는 게 아니라, 반란인지 항쟁인지 다투는 게 아니라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분명한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가장 완전한 장치는 '통일'이다. 매우 거칠고 힘든 길이지만 동족상잔이라는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통일'이라는 정답을 향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렵다고 한쪽으로 치워 놓은 그 문제를 다시 꺼내어 풀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 여순사건의 상징인 붉은 동백꽃처럼 선명하게 다가오는 77년 전 한반도 역사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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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화를 쓰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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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는 무죄"...일흔 넘어 사학과 입학한 딸의 악전고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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