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김복환 증언상황 (사진 맨 왼쪽-영동군 용산면 가곡리)
충북역사문화연대
"월성이 나왓!" 양강면 죽촌리 외함마을에 들어선 경찰들은 보도연맹원 명부를 들고 다자고짜 월성이를 외쳤다. 마을 초입에 살았던 오월성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영문도 모른 채 사립문을 나섰다.
경찰들은 고샅길을 훑으며 중함마을과 내함마을에서도 보도연맹원들을 붙잡아 들였다. 죽촌리를 포함한 양강면 보도연맹원들이 GMC 트럭에 실려 영동경찰서로 이송된 것은 1950년 7월 18일. 이들은 이틀 후 영동읍 어서실과 설계리 석쟁이에서 군·경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외함마을 오월성은 사실 보도연맹원이 아니었다. 같은 마을 이월성이 보도연맹원이었는데, 경찰이 성을 부르지 않고 '이름'만 불렀기에 학살대열에 합류된 것이다.
황당한 사건이 발생한 지 58년 만에 오월성의 아들 오운영 집을 찾았다. 아버지가 죽은 사연을 이야기하는 오운영의 이야기에 나는 기가 막혔다. 아버지의 초상화를 들고 이야기하는 오운영의 눈매는 서글프기만 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유족들의 진실규명 신청 여부와는 상관없이 민간인 피해실태를 조사하기로 했다. 2007년부터 실시한 '시·군별 피해자 실태 조사사업'이 그것이다. 충북에서는 2007년도에 청원군이, 2008년도에는 영동군이 선정됐다. 2008년 8월 5일 영동군청에서 조사단 발대식을 가졌다. 영동군 내 401개 자연마을에 대한 전수조사가 시작됐다.
영동군 곳곳에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가 깃들어 있다. 그만큼 일제강점기 농민운동과 사회주의운동·협동조합운동이 충북에서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다. 그렇기에 해방 후 영동사회는 신생조국 건설을 둘러싼 좌·우익 투쟁이 격렬했으며, 한국전쟁기에는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이 자행됐다.

▲발대식 영동군 피해실태 조사사업 발대식
충북역사문화연대
영동의 모스크바로 불린 양강면 양정리는 영동군과 충청북도의 최고 좌익지도자 장준의 고향이다. 장준과 그의 친척은 해방 전후 영동군의 사회운동에 지도자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 청년운동부터 1946년 추수봉기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러다 보니 전쟁 직후 보도연맹 사건과 형무소 사건으로 줄초상을 치르게 되었다. 장준 집안의 족보를 구해 장준 일가의 희생도를 그렸다.
황간면 신흥리와 남성리 사이에 있는 다리는 소위 '황간의 3.8선'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만큼 좌우익 투쟁이 격화했던 곳이다. 황간면은 영동읍·양강면과 더불어 사회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다. 2008년 황간면을 조사할 때만 하더라도 마을 노인들이 한국전쟁 때의 상황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었다.
한 집안에서 7명이 학살된 김영옥(1936년생)은 아버지, 숙부, 누나 등이 학살된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의 증언을 통해 '희생자 가계도'를 그렸다. 또한 그는 신흥리 피해 상황을 구체적으로 증언해 주었다. 다른 이의 복수증언을 통해 황간면 신흥리에서만 36명이 학살되었음을 조사했다.
코발트광산에서 죽은 사연
"용화면 청년방위대원들을 인솔해서 경산 중앙국민학교로 데려갔어요. 거기서 군인에게 인계했는데..." 영동군 피해실태조사단 발대식에서 강태석(1929년생)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속울음을 씹었다. 그는 자신이 용화면 청년방위대원 중 보도연맹원들을 저승사자 앞으로 데리고 갔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한국전쟁 직후 영동 CIC(특무대)와 영동경찰서는 청년방위대원을 소집했다. 이들을 일정 기간의 훈련을 거쳐 현역에 편입시키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청년방위대원 중 일부가 국민보도연맹원이었다. 보도연맹원들은 영동읍에서 명부가 확인되었다. 각 지역 소대장의 인솔을 받은 이들은 경북 경산면 중앙국민학교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청년방위대원 중) 보도연맹원들은 집으로 보내 줄테니 나와!"라는 소리에 운동장 한가운데로 나섰다. 그들은 모두 인근에 있던 코발트광산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이곳에서 영동군 보도연맹원 89명이 죽임을 당했는데, 천만다행으로 2명이 살아났다. 양강면 가동리 정관택과 학산면 서산리 이규승이다. 그런데 2008년 조사 당시 이규승이 생존해 있어 코발트 광산의 비극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제2, 제3의 노근리

▲미군폭격 양강면 구강리 미군폭격 현장 증언 모습
충북역사문화연대
노근리사건은 미군 폭격에 의한 사건을 뜻하는 대표적인 용어이다. 그런데 영동군 내에 제2, 제3의 노근리 사건이 다수 있음을 뒤늦게야 알았다. 영동읍 매천리와 양강면 구강리 사건이 대표적이다. 북한군이 영동군을 점령했던 시절 미군은 영동읍내를 폭격했다. 1950년 9월 3일 영동역부터 매천리 일대에 폭격이 가해지면서 매천리 주민 70여 명이 불길에 휩싸이고 기총소사에 생을 달리했다. 한 할머니는 불을 끄기 위해 초가지붕에 똥물을 끼얹기도 했다. 생존자 임복희(1922년생)는 폭격에 불타던 마을 모습을 '불꽃밭' 같다고 회상했다.
매천리 사건보다 빠른 1950년 7월 27일 양강면 구강리에서 미군 폭격이 있었다. 19명이 죽임을 당한 이 사건을 2008년 8월 마을 주민들은 어제 일처럼 상세히 증언해 줬다.
약 100일간의 현장조사와 6개월간의 문헌자료 조사를 통해 영동군에서만 727명의 희생자를 파악했다(노근리 사건 제외). 이 조사에는 임두환(1939년생) 영동군 회장이 최전선에 나섰다. 청주에서는 필자를 포함해 이은규, 한귀자, 최현지, 김순애가 조사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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