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령골 미국에서 발견된 1950년 대전 산내 학살 당시 사진. NARA
NARA
대전형무소 특경대장 이OO은 7월 초 재소자들을 실은 GMC 트럭을 인솔해 산내 골령골로 갔다. 거기에는 헌병 중위 심용현이 있었다. 재소자들을 인계한 이OO이 뒤돌아서려고 하는데, 심용현 중위가 불렀다. "어이, 특경대장 이리 와."
이OO이 심용현 중위 근처로 가니 사전에 파놓은 커다란 구덩이가 여러 개 있었다. 인근 지역 주민과 청년방위대원들을 시켜 파놓은 세로 1m 80cm, 가로 50m의 구덩이였다. 제일 먼저 학살의 희생양이 된 이는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이었다.
심용현 중위가 "어이~ 이관술. 너 죽는 마당에 대한민국 만세 부를 수 없냐?"고 하니, 이관술은 "대한민국 만세는 모르겠고, 조선민족 만세를 부르겠소"라고 답변했다. 이관술이 "조선"이라고 외침과 동시에 '서서 총' 자세를 취하고 있던 헌병과 경찰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탕탕탕! 이관술은 '악' 소리 한번 못하고 고꾸라졌다.
이 구술이 있은 지 11년 후 울산을 향해 승용차를 몰았다. 이관술의 외손녀 손옥희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손옥희는 외할아버지 이관술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다행히 찾아가기 1년 전에 이관술은 진실규명 결정이 되었다.
손옥희씨가 기자를 데려간 곳은 이관술의 생가에서 가까운 이수환(1936년생) 집이었다. 이수환은 "관술 형님이요, 얼매나 똑똑했는지 모릅니다. 모든 일을 자기가 직접 하지 않고,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일을 시키는 꾀돌이에요"라고 했다. 또한 이관술이 "양반·상놈 가리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베풀고 더불어 사는 호인이었다"고 설명했다.

▲공덕비 반곡초등학교에 세워진 토지기부 공적비. 토지 기부자에 이관술이 있다.
박만순
구술수집 과정에서 1946년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은 이관술이 옥중에서 반곡초등학교 설립하는데 542평(1788㎡)을 기부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관술의 신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전 산내사건 인터뷰는 주로 대전·충남지역, 여수·순천, 제주도, 서울에서 이루어졌다. 산내 피학살자가 대전·충남지역 보도연맹원들과 여순사건, 4.3사건 관련자들이 포함된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만다라> 작가 김성동을 만나러 경기도 양평을 찾았다. 그의 아버지 김봉한이 산내에서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산내학살 사건에는 2사단 헌병대가 깊숙이 개입했다. 특히 1950년 6월 28~30일경 산내 보도연맹원 1400여 명 학살과 1950년 7월 초에 형무소재소자 1800여 명 학살이 심용현의 현장 지휘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심용현은 살아생전 산내학살 사건에 대해 사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죄는커녕 군 예편 후 교육자로 변신했다. 성신학원 이사장을 네 차례나 역임했고, 2011년 4월에는 성신여자대학교에 그의 흉상이 세워지기도 했다(현재 철거 상태). 상부의 명령에 국가폭력이라는 씻을 수 없는 경험을 했던, 6.25 당시 충남도경찰국 사찰계장였던 변홍명이 말년에 학살에 참여했던 것을 후회하거나 괴로워했던 반면 심용현은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현수막에 가슴 쿵쾅거리던 시인, 전국 누빈 사연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