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현수막에 가슴 쿵쾅거리던 시인, 전국 누빈 사연

대전 산내 골령골 진실규명 - 희생자 명예회복 위해 동분서주한 전미경씨 이야기

등록 2025.04.10 17:12수정 2025.04.16 14:19
0
원고료로 응원
2002년도부터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을 했습니다. 20여 년간 활동하면서 활동 계기와 소감,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의 성과와 한계, 향후 과제를 9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왜 기억전쟁인가'라는 주제의 <기억전쟁 단상> 9편을 포함해 <박만순의 기억전쟁> 연재는 총 280회로 마무리합니다.[기자말]

달빛마저 푸르른 1950년 광풍이 몰아치던 / 그 여름밤 대학살의 현장 막고개재 /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대학살 / 내려보던 북두칠성마저 통고하던 밤 (중략) 김병묵 형님 원통해 녹아내리는 저 가슴을 / 하늘이시여 땅이시여 ~~ / 어찌 하오리까~~?

2018년도 청주에서 열린 충북합동위령제에서 낭송된 전미경의 <그 여름밤의 광풍> 시의 일부다. 이날 시인 전미경은 충북지역 민간인학살을 연상케하는 시어(詩語)를 토해내 참석한 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렇다면 전미경은 어떤 시인이기에 이런 시를 썼을까?

전미경(1948년생)은 2002년 7월 대전에 사는 아들 집에 가다가 우연히 대전산내사건 합동위령제라는 현수막을 발견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위령제가 열린다는 산내초등학교를 찾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위령제 날짜가 지났기 때문이다. 그가 과거와의 만남을 이루기에는 4개월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대전참여연대 연락처를 수소문해 산내 유족회 임원과 만난 것이 그해 11월이었다.

전미경 2024년 산내 합동위령제에서 인사말하는 전미경 회장
▲전미경 2024년 산내 합동위령제에서 인사말하는 전미경 회장 임재근

전미경은 그때부터 아버지 전재흥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2010년 아버지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문을 받았지만 그의 활동은 끝나지 않았다.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회장을 하면서 전국에 발품을 팔았다. 시(詩)로 다른 지역의 유족들을 위로하고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부터 유해발굴 사업을 시작했다. 유해발굴단에는 발굴팀과 인문사회연구팀으로 구성됐다. 인문사회연구팀은 학살 사건과 관련된 피해자, 유가족, 목격자, 가해 집단 구성원들과 인터뷰를 해 사건을 재구성하는 일이었다. 기자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유해발굴단 인문사회연구팀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2007년에는 분터골과 대전 산내, 2008년에는 진도 갈매기섬, 2009년도에는 전남 영광의 불갑산 유해발굴 사업에서다.

그런데 이때의 구술수집사업은 대상이 10명이었고 수박 겉핥기식 조사였다. 어차피 자세한 조사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들이 할 일이지만 그래도 뭔가 개운하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2019년도에 심규상 <오마이뉴스> 기자에게 대전 산내 골령골 구술수집을 본격적으로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심규상 기자는 전폭적인 응원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만 1년 동안 오마이뉴스에 <박만순의 기억전쟁 - 대전편>이라는 제목으로 48회 연재했다.

이관술의 최후


골령골 미국에서 발견된 1950년 대전 산내 학살 당시 사진. NARA
▲골령골 미국에서 발견된 1950년 대전 산내 학살 당시 사진. NARA NARA

대전형무소 특경대장 이OO은 7월 초 재소자들을 실은 GMC 트럭을 인솔해 산내 골령골로 갔다. 거기에는 헌병 중위 심용현이 있었다. 재소자들을 인계한 이OO이 뒤돌아서려고 하는데, 심용현 중위가 불렀다. "어이, 특경대장 이리 와."

이OO이 심용현 중위 근처로 가니 사전에 파놓은 커다란 구덩이가 여러 개 있었다. 인근 지역 주민과 청년방위대원들을 시켜 파놓은 세로 1m 80cm, 가로 50m의 구덩이였다. 제일 먼저 학살의 희생양이 된 이는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이었다.


심용현 중위가 "어이~ 이관술. 너 죽는 마당에 대한민국 만세 부를 수 없냐?"고 하니, 이관술은 "대한민국 만세는 모르겠고, 조선민족 만세를 부르겠소"라고 답변했다. 이관술이 "조선"이라고 외침과 동시에 '서서 총' 자세를 취하고 있던 헌병과 경찰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탕탕탕! 이관술은 '악' 소리 한번 못하고 고꾸라졌다.

이 구술이 있은 지 11년 후 울산을 향해 승용차를 몰았다. 이관술의 외손녀 손옥희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손옥희는 외할아버지 이관술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다행히 찾아가기 1년 전에 이관술은 진실규명 결정이 되었다.

손옥희씨가 기자를 데려간 곳은 이관술의 생가에서 가까운 이수환(1936년생) 집이었다. 이수환은 "관술 형님이요, 얼매나 똑똑했는지 모릅니다. 모든 일을 자기가 직접 하지 않고,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일을 시키는 꾀돌이에요"라고 했다. 또한 이관술이 "양반·상놈 가리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베풀고 더불어 사는 호인이었다"고 설명했다.

공덕비 반곡초등학교에 세워진 토지기부 공적비. 토지 기부자에 이관술이 있다.
▲공덕비 반곡초등학교에 세워진 토지기부 공적비. 토지 기부자에 이관술이 있다. 박만순

구술수집 과정에서 1946년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은 이관술이 옥중에서 반곡초등학교 설립하는데 542평(1788㎡)을 기부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관술의 신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전 산내사건 인터뷰는 주로 대전·충남지역, 여수·순천, 제주도, 서울에서 이루어졌다. 산내 피학살자가 대전·충남지역 보도연맹원들과 여순사건, 4.3사건 관련자들이 포함된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만다라> 작가 김성동을 만나러 경기도 양평을 찾았다. 그의 아버지 김봉한이 산내에서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산내학살 사건에는 2사단 헌병대가 깊숙이 개입했다. 특히 1950년 6월 28~30일경 산내 보도연맹원 1400여 명 학살과 1950년 7월 초에 형무소재소자 1800여 명 학살이 심용현의 현장 지휘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심용현은 살아생전 산내학살 사건에 대해 사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죄는커녕 군 예편 후 교육자로 변신했다. 성신학원 이사장을 네 차례나 역임했고, 2011년 4월에는 성신여자대학교에 그의 흉상이 세워지기도 했다(현재 철거 상태). 상부의 명령에 국가폭력이라는 씻을 수 없는 경험을 했던, 6.25 당시 충남도경찰국 사찰계장였던 변홍명이 말년에 학살에 참여했던 것을 후회하거나 괴로워했던 반면 심용현은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골령골 #전미경 #심용현 #이관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나 빼고 다 잤다"는 고2 딸의 하소연, "수업 들어줘서 고맙다"는 교사 "나 빼고 다 잤다"는 고2 딸의 하소연, "수업 들어줘서 고맙다"는 교사
  2. 2 2년간 싸운 군의원 "김건희 특검, 양평군 도시건설국장 주목해야" 2년간 싸운 군의원 "김건희 특검, 양평군 도시건설국장 주목해야"
  3. 3 구치소에서 버티는 윤석열...이럴 때 판례는? 구치소에서 버티는 윤석열...이럴 때 판례는?
  4. 4 원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막힌 일... 눈물 나는 24명 '최후진술' 원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막힌 일... 눈물 나는 24명 '최후진술'
  5. 5 '김건희' 묻자 기자 밀치고 다급히 떠난 양평군수, 김선교 의원도 묵묵부답 '김건희' 묻자 기자 밀치고 다급히 떠난 양평군수, 김선교 의원도 묵묵부답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