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막 하나의 집 원두막 건축 모습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조지송이 제2의 삶의 보금자리를 물색한 것은 1983년 여름부터였다. 개인 별장이나 전원주택 자리를 찾는 것이 아니었다. 민중선교에 종사하는 이들과 노동자들의 쉼터이자 회원들의 수양처 역할을 할 공간이었다.
운영은 뜻을 함께 하는 조지송, 정진동, 조순형, 김용복(한일장신대 총장), 이삼열(숭실대 교수), 한완상(서울대 교수), 손덕수(이화여대 교수), 박영해(어린이집 원장), 고애신(기독여성민우회 회장) 등이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제일 먼저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정진동 목사를 찾았다. "목사님, 수양원 자리 좀 알아봐 주세요" 그날부터 정진동은 충청 지역의 물 좋고 공기 좋기로 소문난 곳을 찾아다녔다.
1983년 6월 16일 청원군 문의면 강가의 외진 곳을 답사했다. 회원 모두 좋다고 해서 공인중개사 사무실로 계약을 하러 갔다. "청남대 때문에 안 돼요." 개축을 하려 한다고 하니, 공인중개사가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 때문에 개축이 안 된다고 한 것이다. 그냥 땅 매매만 가능하다고 했다.
1983년 8월 8일 청주 봉명교회 한사석 목사의 소개로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로 답사를 갔다. 이후 충남 연기군 남면 양화리 땅도 봤으나 청주에서 가까운 옥화리를 택했다.
1984년 7월 17일 옥화리 141-4번지를 구입했다. 계약은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조순형 전도사 명의로 했다. 조지송은 수양원을 지을 옥화리의 자연경관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더욱 마음이 든든했던 것은 정진동과 가까이 지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건축이 시작되면서 기초공사를 하는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목사님. 집 방향을 잘못 그린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묻는 이의 의도를 짐작한 조지송이 시원스레 답변했다. 보통 집은 남향이나 남동향으로 짓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런데 조지송이 직접 설계한 집은 북향이었다. 집의 현관 출입구가 마을로 향한 게 아니라 정반대였다. 외지인이 시골에 새집을 짓고 그곳에 여러 사람이 드나드는 모습이 자칫 원주민에게 위화감을 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일은 기술자에게 일당을 주고 맡겼지만 나머지는 주로 청주도시산업선교회 교인들이 자원봉사로 했다. 1985년 7월 완공된 수양원은 강희남 목사의 서체로 만든 <하나의 집>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하나의 집>은 조지송 개인 별장이 아니었다. 민중선교에 종사하는 이들과 노동자들의 쉼터이자 회원들의 수양처로 출범한 <하나의 집>은 원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월회비로 각종 공과금을 해결했다. 이용자들이 내는 자발적인 이용료는 실제 운영비에 턱없이 모자랐다. 더군다나 <하나의 집> 원장(?)이자 집사 역할을 한 조지송의 월급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옥화리 <하나의 집>에는 언제나 웃음과 꿈이 넘쳤다.
비밀스러운 투쟁의 수신호

▲현판식 하나의 집 현판식. 간판 아래가 정진동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코를 만지면?" "일을 천천히 해라" 강사 방용석이 묻고 수강생들이 큰 목소리로 답했다. 방용석의 얼굴이 활짝 폈고 수강생들은 폭소를 터트렸다. 1970년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민주노조였던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투쟁사례를 듣는 자리였다.
당시 지부장이었던 방용석은 구체적인 사례 중심으로 이해하기 쉽게 강의를 했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는 죽음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임했다. 하지만 모든 투쟁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휘어지지 않는 나무는 꺾어지기 마련이다. 자본가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가장 강력한 투쟁 수단은 파업이지만 태업을 포함한 준법투쟁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방용석은 현장을 순회하면서 각종 준법투쟁을 진두지휘했다. '코를 만지면 일을 천천히 해라!'도 사전에 조합원들과 입을 맞춘 것이다. 방용석이 현장을 순회할 때마다 새로운 전술과 지침이 떨어졌다. 그가 입도 뻥끗하지 않았지만 그 효과는 확성기를 켜놓고 동네방네 떠드는 것보다 수백 배였다.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투쟁사례는 민주노조운동의 시금석이나 마찬가지였다. 후일 김대중 정부 때 노동부장관을 하게 되는 방용석은 1992년 봄 정진동의 요청으로 <하나의 집>에서 배이산업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열정적인 강의를 했다. 스포츠 공을 생산하던 배이산업은 충주에 소재한 중소기업체였다.
이날 교육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예닐곱 명에 불과했지만 방용석의 강의에 감동했다. 노동운동의 전설이라 불리는 조지송을 1박 2일 동안 접하면서 그의 성품에 절로 감탄이 일기도 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는 충청지역의 민주노조들이 <하나의 집>을 주로 이용했다.

▲입주식 하나의 집 입주식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정 목사 나오슈"
정진동과 조지송의 첫 만남은 1961년에 이뤄졌다. 장로교신학대학(장신대) 동기생이었다. 하지만 이때는 특별한 교유가 없었다. 장신대 졸업 후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걸었다. 정진동은 농촌선교의 길을, 조지송은 예수교장로회 국내전도부 산업전도국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가 이들이 다시 만난 것은 1972년 청주에서였다. 조지송의 특강 자리였다. 이 강의를 계기로 정진동은 도시산업선교의 길을 걷기로 작정했다.
1980년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회관을 신축하는데 독일재단의 지원금을 이끌어내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이도 조지송이었다. 1970년대 청주시청 청소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보수적인 교단에서 일자리를 잃은 후 넝마주이를 하고, 유신시대 내내 고난의 십자가를 스스로 진 정진동을 지켜봤다. 조지송은 정진동과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이러한 관계가 <하나의 집>에 정진동과 조순형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이유이다.
<하나의 집>이 완공된 후 회원들은 자주 그곳을 이용했다.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피는 뒷동산을 산책하고, 여름에는 옥수수를 쪄 먹고, 가을에는 밤을 줍고, 겨울에는 고구마를 구워 먹었다. 계절과 상관없이 밤에는 삼겹살 잔치를 벌였다. 그럴 때마다 조지송이 직접 담은 자두술과 솔잎주가 나왔다.
삽겹살 파티는 한편으로 즐거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지했다. 노동운동의 전망과 방향에 대한 의견 개진이 이뤄졌다. 조지송은 "노동자 속에서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위로 갈수록 사람이 없고 아래로 갈수록 사람이 있다. 그렇기에 항상 민중 속으로 들어가 활동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노동자와 민중 속에서 생활하며 그들을 교육하고 조직하는 길만이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길이라고 했다. 조지송의 의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용복은 "미국은 지는 해"라며 천민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산업선교회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원들은 한결같이 교회의 개혁과 거듭남을 강조했다. 결론은 가난한 자, 소외된 자, 핍박받는 자들을 위한 선교와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열띤 토론은 밤새 이어졌다. 꼬박 밤을 지새웠다.
조지송은 미원면 옥화리에 내려와 있을 때 주일예배는 항상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서 드렸다. 이렇게 끈끈한 관계가 청주산선 교인들이 <하나의 집> 건축에 전념한 이유다. 청주산선 교인들이 <하나의 집>으로 여름 수련회를 갔을 때이다.
앞의 개천에서 올갱이를 잡아와 국을 끓였다. 그때 조지송이 "정 목사 나오슈!"라고 했다. 조지송과 정진동은 사이 좋은 친구처럼 손으로 빚은 수제비를 솥에 넣었다. 올갱이국 요리를 조지송과 정진동이 도맡았다. 양성평등의 시각은 조지송이 정진동보다 한 수 위였다.

▲휴식 하나의 집 원두막에서 쉬고 있는 조지송, 조순형, 정진동(좌로부터)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하나의 집>은 애초에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노동자의 재충천을 위한 쉼터이자 교육장으로서의 역할 말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하나의 집>이 지리적으로 외진 곳이고 공간이 협소한 탓이다. 물론 더욱 큰 이유는 1987년 이후 성장한 민주노조운동이 새로운 그릇을 필요해서 일 것이다.
어쨌든 수십 년을 도시산업선교 활동에 몸바친 조지송과 정진동에게 <하나의 집>은 정서적 위로의 공간이었다. 조지송이 정진동에게 1986년 가을에 보낸 시 <새벽>은 그것을 확인케 한다.
새벽
어두움이 먹물처럼 드리운 밤 / 새벽을 보며 이 밤을 걷는다
천년을 두고 기다려도 / 기다림은 오지 않는 것 /
오히려 너와 내가 기다림에로 가자 /
한 알의 씨앗을 심고 / 백배의 열매를 거두는 농부의 땀으로 /
새벽을 보며 이 밤을 걷는다(1986년 가을 밤. 옥화리에서 조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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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북향으로 집을 지어요? 목사가 내놓은 답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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