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전쟁, 땅속에서 계속된다

등록 2025.04.07 14:31수정 2025.04.0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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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오스 불발탄 제거 장면
라오스 불발탄 제거 장면 UNDP

매년 4월 4일은 지뢰와 불발탄으로 고통받는 전 세계 민간인을 기억하고, 이들을 위한 국제사회의 연대와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 유엔이 지정한 '지뢰 인식과 지뢰 제거 활동 국제 지원의 날'이다.

전쟁은 하지 않았지만, 폭탄은 남았다

라오스는 이 날을 누구보다 깊이 체감하는 나라다. 전쟁을 겪은 적 없지만, 전 세계에서 1인당 가장 많은 불발탄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북베트남군의 보급로인 이른바 '호찌민 루트'를 차단하겠다며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라오스 전역에 약 2억 7천만 발의 폭탄을 퍼부었다. 이는 전투기 한 대가 9년 동안 하루 24시간, 8분마다 폭탄을 투하한 양이다. 당시 미국은 의회 승인 없이 작전을 진행했고, 이를 '비공식 작전구역'이라 불렀다.

투하된 폭탄 중 약 30%인 8천만 발은 터지지 않고 불발탄으로 남았다. 베트남 전쟁 이후 라오스에서 불발탄으로 인한 사상자는 최소 5만 명이며, 이 중 사망자만 3만 명에 달한다.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매년 수십 명이 불발탄으로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는다.

"우리 땅이 왜 전쟁터였나요?"

 케오 씨와 손자 캄(왼쪽 위), 라돈(오른쪽 위), 빅(왼쪽 아래), 불발탄 발견 모습 (오른쪽 아래)
케오 씨와 손자 캄(왼쪽 위), 라돈(오른쪽 위), 빅(왼쪽 아래), 불발탄 발견 모습 (오른쪽 아래) UNDP

피해자의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취약한 지역의 농민과 어린이다. 전쟁의 공포 속에서 지하 대피소를 전전하며 살아왔던 케오씨는 이제 손자 캄과 함께 평화롭게 지내고 있지만, 그 평화는 불안 위에 놓여 있었다. 집 주변 땅에 불발탄이 남아 있어 농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최근 노르웨이 인민 원조(NPA)팀이 불발탄 제거를 시작하면서 그녀는 처음으로 안전한 일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라돈(35세, 시엥쿠앙)은 2010년 밭을 넓히기 위해 잡초를 태우다 불발탄 폭발 사고로 왼쪽 눈은 실명했고 오른쪽 눈도 심하게 다쳤다. 국제기구의 도움으로 두 차례 각막 이식 수술을 받은 그는 겨우 빛을 되찾았다.

빅(29세, 시엥쿠앙)은 10살 때 불발탄 사고로 한쪽 눈을 잃고 중학교 1학년을 끝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어린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는 국제기구의 금융 리터러시 프로그램을 통해 자립의 기술과 자금을 얻었다.


이들처럼 도움을 받는 사례도 있지만, 아직도 많은 피해자가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UNDP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에만 시엥쿠앙(10건), 살라완(3건), 사반나켓(2건), 후아판(2건), 캄무안(2건)에서 22건의 사고로 11명이 숨지고 36명이 다쳤다.

제거된 불발탄 그리고 남은 땅

 라오스 불발탄 탐지 모습
라오스 불발탄 탐지 모습 UNDP

2023년 한 해 동안 제거된 불발탄은 8만 3,238개, 면적은 6,263헥타르에 달한다. 서울시 면적의 10%에 이르는 규모지만, 전체 오염 면적의 1%도 안 된다. 지금의 속도로는 라오스 땅 전체가 안전해지기까지 100년이 넘게 걸릴 것이다.

현재 라오스는 외교부 산하 불발탄제거청(NRA)을 통해 불발탄 제거와 피해자 지원, 위험 인식 교육 등을 국제기구 및 공여국과 긴밀히 협력하며 통합 관리하고 있다.

불발탄 제거는 UXO Lao, Unit 58, NPA 등 전문팀이 금속탐지기와 폭발물 처리 장비로 오염 지역을 정밀 조사한 뒤 수작업으로 제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땅 한 뼘을 정화하는 데에도 몇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라오스에 떨어진 불발탄
라오스에 떨어진 불발탄 ACN아시아콘텐츠뉴스

예방을 위한 교육 사업 역시 필수적이다.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불발탄 위험 교육은 사고 예방의 핵심이다. 클러스터탄이 테니스공이나 음료 캔처럼 생겨 어린이들이 장난감으로 오인해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라오스 정부는 마을 방송, 학교 교육, 그림책 보급 등을 통해 인식을 높이고 있으며, 최근에는 11개 소수민족 언어로 교육 자료를 제작해 배포 중이다.

불발탄 제거와 교육뿐 아니라 피해자 지원도 병행된다. KOICA, UNDP, USAID 등 국제기구는 피해자의 재활, 직업 훈련, 보조기기 지원을 통해 자립을 돕는다.

2022년 캄무안 주 마학사이 지역에서는 학교 건립을 위해 불발탄 제거 작업이 이루어졌다. 총 34개의 불발탄이 제거된 후, 기숙학교를 포함한 초·중등학교와 직업교육 시설 건설이 시작돼 5개 지역의 약 3,800명이 입학할 예정이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은 라오스의 불발탄 제거 역량 강화를 위해 지금까지 약 2천만 달러를 지원해왔다. 이는 UNDP 불발탄 분야 신탁기금에서 단일 공여국으로는 최대 규모이다.

마틴 테러 UNDP 라오스 사무소장은 "불발탄 제거는 단지 땅을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에게 희망과 미래에 대한 새로운 자신감을 주는 일이다. KOICA와의 협력을 통해 라오스의 농촌 공동체가 빈곤에서 벗어나 경제적 안정을 얻고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2025년 1월,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해외 원조를 전면 중단하며 불발탄 제거 사업은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전직 미국 대사 16명이 원조 복원을 촉구하는 공동서한을 발표했지만, 지원 재개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라오스 현장에서는 제거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제는 국제사회의 새로운 파트너들이 이 생명의 작업을 이어가야 할 시간이다.

불발탄은 단지 과거의 잔재가 아니다. 지금도 생명을 위협하는 현재형 위험이며, 불발탄 제거는 라오스가 미래를 되찾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평화 구축 과정이다. 지금은 '잊혀진 전쟁'을 함께 지워내야 할 시간이다. 우리가 지워야 할 것은 땅속의 폭탄뿐 아니라, 그들을 외면해 온 침묵의 역사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ACN아시아콘텐츠뉴스에도 실립니다.
#라오스 #불발탄 #코이카 #UNDP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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