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5.04.11 08:36수정 2025.04.1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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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깨닫는다.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운 시기라는 것을. 새벽이면 하루가 선물처럼 내 앞에 펼쳐진다. 누구의 엄마도, 딸도 아닌, 오롯이 나로서 살아가는 시간. 몸은 나이를 먹어가지만 마음은 제2의 청춘이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지금처럼 자유롭지는 않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두렵고 고된 두 번의 선택, 그 모든 순간은 이제 돌아보면 가장 의미있고, 후회없는 길로 남아 있다.
첫 번째 선택은 아이들과 함께 떠난 이민이었다. 남편없이 아이들만 데리고 나선 길, 낯선 도시의 하루는 늘 전쟁 같았다. 새벽같이 도시락을 싸고, 등교를 시킨 뒤 마트에 들어섰다. 한국에서 익숙하게 쓰던 물건을 찾기 위해 몇 바퀴씩 매장을 돌았다. 라벨을 들여다보고, 사전을 찾아가며 카트에 물건을 담았다.
병원 진료는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문진표를 앞에 두고 의학용어 하나하나를 찾아 적었고, 미리 준비한 영어문장을 손에 쥔 채 의사 앞에 섰다. 의사의 말은 총알처럼 빠르게 날아와 내 머리 위를 지나쳤고, 약국으로 가는 길엔 내가 과연 제대로 진료를 받은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방인의 몸과 마음은 치료받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아이들은 자랐고, 나는 그 속에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작은 가게를 열고 손님을 맞으며 바닥부터 다시 쌓아올리는 삶에 익숙해질 무렵,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이 모든 걸 뒤흔들었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말에 제대로 짐도 싸지 못한 채 비행기에 올랐다. 몇 주면 돌아올 줄 알았던 발걸음은 어느새 8년의 시간을 품게 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 입었던 옷의 색까지 기억하는 분이었다. 반찬 하나를 건네며 "이건 네가 열 살 때 좋아하던거다" 하시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어머니가 점점 작아졌다. 기억이 흐릿해지고, 말이 어눌해지고, 하루하루 몸이 굳어갔다. 나는 어머니의 손과 발이 되어야 했다.
하루 세 번 약을 챙기고, 밥을 떠 먹이고, 외출 땐 부축하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어야 했다. 함께 한 여덟 해는 늦은 봄의 빛처럼 아리고도 찬란했다. 때론 생기 있는 눈동자에 햇살이 들었고, 어떤 날은 고요한 비가 내렸다. 가끔은 홀로 눈물을 삼켰지만, 그 눈물은 아픔이 아니라 이별을 준비하는 사랑이었다.
어머니의 삼킴 기능 장애로 더는 집에서 모실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또 한 번 내려놓아야 했다. 요양원 입소 동의서에 서명하는 손이 떨렸다. 머리는 이해했지만, 마음은 끝내 설득되지 않았다. 삶을 접는 일은 익숙해졌지만 결코 가벼운 적은 없었다. 그 무게는 지금도 마음 한 귀퉁이를 조용히 누르고 있다. 인생은 이렇게 예고없이 우리를 길목에 세운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진심을 다해 선택한 것들은 시간이 지나도 아픔보다 더 깊은 빛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제, 모든 걸 비워낸 후에야 비로소 내게 돌아온 시간, 사계절을 지나 인생의 늦가을 햇살처럼 찾아온 여유를 나는 '인디안 썸머'라 부른다. 짧지만 눈부시고, 섬세하지만 뜨겁다. 내 삶의 마지막 선물처럼 다가온 이 계절 속에서 나는 오늘도 내 마음의 뜰에 햇살을 정성껏 담는다.
이제는 결과로 환산되지 않아도 좋다. 성공이라는 이름표도 필요없다. 어떻게 살았는가 보다, 무엇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내 안에 스며든 수많은 계절의 흔적을 품고 나답게 단단하게 나이 들어갈 것이다. 아이들과 후배들에게 건강하고 아름답게 나이 드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누군가의 삶에 따뜻한 그림자가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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