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석 조정숙(정진동의 아내)과 나경석(정진동의 사위이자 정광옥의 남편)
청주도시산업선교회
박카스병
평소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을 것 같은 학생들이 청주시 북문로에 있는 이탈리아 경양식식당에 앉았다. 웨이터에게 식사를 주문한 김희식이 입을 열었다. "민정당(민주정의당)을 점거해 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기폭제가 되자." 김희식(충북민주운동협의회 문화분과장) 의 제안에 정세영(성균관대 83), 장원덕(충북대 82), 유수남(청주대 83), 김창유(청주대 81), 최승영(청주대 82)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거사 4일 전인 1985년 9월 5일 오전 11시였다.
9월 7일 오후 5시 내덕동 중국음식점 진풍루에서는 민정당 점거 농성의 구체적 요구를 정리했다. '학원안정법 제정 철회', '대통령 직선제 실시', '민중 생존권 보장'이었다. 이들은 자리를 옮겨 진풍루 인근에 있는 신라장 여관 308호실에 투숙했다. 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밤을 새워 성명서를 작성했다.
'우리는 왜 민정당사에 들어왔는가'라는 제목의 성명서에는 학원안정법 철회와 민중생존권 보장 및 전두환 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상세한 내용이 담겼다. 논의과정에 참여했던 김창유는 점거 농성에 빠지고 입대하기로 했다. 김창유의 입대일은 거사 다음날인 9월 10일이었다.
밤을 새운 이들은 8일 오전 7시 30분경부터 남문로 1가에 있는 충북민주운동협의회 사무실에서 '우리는 왜 민정당사에 들어왔는가'라는 제목의 성명서 200매를 만들었다. 장원덕과 정세영은 우암동에 있는 북부시장에서 현수막에 이용할 광목, 붓, 페인트를 구입했다.
이들은 사창동 장원덕 집에서 현수막 3개를 작성했다. 그런 후에 정세영과 유수남은 북문로 2가에 있는 민주정의당 충북 제1지구당사를 사전답사했다. 오후 3시 30분에 모충동의 일신장여관 305호실에 투숙해 최종점검을 했다. 점거 농성 때 경찰의 진압에 대비해 박카스병에 시너를 넣어 화염병을 만들었다(청주지방법원 <김희식 등의 판결문>, 1985).
핸드마이크
D-day(디데이), 9월 9일 월요일 낮 12시 30분 김희식 등은 민정당사를 향해 돌진했다. 사무실에 들어간 김희식은 안에 있던 사무원 2명을 내쫓고 핸드마이크로 유리창을 깨고 현수막을 내걸었다. "학원안정법 철회하라" "민중생존권 보장하라" 다른 이들은 책상과 사무실 집기로 출입문에 바리게이트를 설치했다.
그때부터 경찰에 의해 강제 진압되기 전까지 40분 동안 농성자들은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불렀다. 유인물이 뿌려지자 지나가는 시민들이 너도나도 유인물을 주웠다. 버스 안의 승객과 주변의 상인과 시민들의 이목이 민정당사에 집중됐다. 농성 시작한 지 5분도 채 안 돼 경찰이 출동했다.
농성장 밖에는 충북대·청주대학교 학생 약 30명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농성장 안에서 외치는 구호에 밖의 대학생들이 복창했다. 경찰들은 농성장을 진압하는 것이 시급했기에 농성장 밖의 대학생들을 상대할 여유가 없었다.
'펑' 하는 최루탄 터지는 소리를 신호로 경찰의 진압 작전이 시작되었다. 바리게이트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경찰들은 농성자들을 몽둥이찜질부터 했다. 주먹과 발길질이 이어졌다. 정세영은 이때부터 청주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될 때까지 정신이 없었다. 무자비한 구타에 코피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청주경찰서에서는 본격적인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다. 눈알을 쑤시고 각목을 무릎 안쪽에 대고 구둣발로 짓밟았다. 그나마 정세영은 고문을 오래 당하지 않았다. 신원조회 결과 정진동 목사 아들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에 대한 구타와 고문은 계속됐다. 이날 농성으로 김희식, 장원덕, 최승영, 정세영이 구속됐다. 유수남이 공동모의 혐의로 추가 구속됐다. 연행과정에서 경찰에 항의하던 청주대생 이용규는 연행돼 7일간 구류를 살았다.
피오줌
1985년 12월 2일 초겨울 바람은 매웠다. 충북 민정당사 점거 농성 사건 재판이 열리는 청주지방법원 앞에는 가족과 학생들이 운집했다. 그런데 이들보다 훨씬 많은 경찰 수백 명이 재판정 입구를 지켰다.

▲방청권 충북민정당사 점거 농성 사건 관련 재판 방청권
청주도시산업선교회
"방청권을 한 가족에 3개만 준다는 게 말이 돼요?" "민주재판 실시하라" 항의하는 가족들에게 경찰들이 달려들었다. 무자비한 폭행과 연행이 행해졌다. 경찰들은 정세영의 외할아버지 조춘흥(당시 76세)의 목을 조르고, 머리채를 휘어잡고 머리를 짓이겼다. "이 늙은이 죽여버리겠다"며 사정없이 구타했다. 정세영의 어머니 조정숙과 이모 조순옥·조순형, 외삼촌 조기형에게도 폭력이 가해졌다. 조순옥은 목이 졸리고 경찰의 주먹과 발길질에 입술이 터지고 이가 뿌리채 솟아났다. 방광을 주먹으로 맞아 피오줌이 나왔다.
최승영의 아내 전인희는 머리를 채이고 구타를 당해 전신에 타박상을 입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의 폭행을 당했다. 이외에도 최인숙(최승영 동생), 강경숙(정세영 이종사촌), 정지성(충북민주운동협의회 상임위원)은 경찰에게 폭행을 당했고 서부경찰서에 도착할 때까지 경찰버스에서 숱한 폭행과 수모를 당했다.
재판정 밖의 웅성거리는 소리의 내용을 알고 김희식 등은 재판을 거부했다. 피고들이 퇴정한 재판정에서 검사는 피고들에게 징역 5년을 구형했다. 이후 진행된 선고 공판에서 김희식은 징역 1년 6개월, 장원덕, 최승영, 정세영, 유수남은 1년을 선고받았다.
김희식은 항소이유서에서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정당행위이며 일종의 저항권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원심소송 과정이 공포 속에서 이뤄졌음을 제기했다.
자발적 고난
"아버님 어머님께. 밖에는 눈물처럼 비가 쏟아지고 저의 마음은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으로 한없이 젖어들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최승영의 편지는 민정당사 점거농성 이유가 담겨있다. 그는 광주시민 홍기일이 "광주항쟁 5년이 되도록 살아있는 것이 부끄럽다"며 분신한 것에 충격을 받고 불의한 정권에 저항한 거라고 밝혔다.
정진동 아들 정세영도 형 정신영에게 보낸 편지에서 큰형 정법영의 민주화운동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참여한 것이라고 했다. 정진동의 큰딸 정광옥이 남양만에서 공동체 운동에 참여한 것이나 셋째 아들 정세영이 민정당사 점거 농성에 참여한 것 모두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자발적 고난'의 길이었다. 민정당사 점거 농성에 참여한 대학생들도 자발적 고난, 자발적 십자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판결문 충북 민정당사 점거 농성 사건 판결문
청주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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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 헌신한 목사, 그 아들딸이 벌인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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