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1월 24일 울산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고유제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영상을 통해 공식 사과하고 있다.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란 1950년 8월 군경에 의해 울산 지역 보도연맹원 등 407명이 10여 차례에 걸쳐 집단 총살된 사건으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로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졌다.
연합뉴스
"존경하는 울산 시민 여러분. 그리고 국민보도연맹사건 유가족 여러분! 58년 전, 국민보도연맹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입니다. 좌우 대립의 혼란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도연맹에 가입됐고, 6.25 전쟁의 와중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중략) 저는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해서 당시 국가권력이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후략)" ☞ 전체 발언 영상 보기
대통령의 사과
2008년 1월 24일 노무현 대통령이 울산국민보도연맹 희생자 추모식에 보도연맹사건 공식 사과문을 영상으로 보내면서 말한 내용이다. 국민보도연맹원 집단학살 사건이 발발한 지 58년 만의 일이다.
대통령의 사과는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반백 년 넘게 지속된 국민보도연맹원은 남로당이라는 인식하에 '빨갱이들 죽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는 공식이 깨진 것이다. 피해자 유족들은 그제서야 소리 내어 울 수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 아버지와 형, 오빠가 죽었을 때도 맘 놓고 울지 못했던 그들이다.
한국현대사의 최대 비극 한국전쟁, 그중에도 민간인학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인식이 180도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 성과 때문이다.
6.25 발발 직후 이승만 정부는 전국의 형무소 재소자들을 집단 학살했다. 그와 동시에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해 10만여 명을 학살했다. 서울과 경기도 일부 지역 보도연맹원들을 제외하고 강원도부터 제주도까지 말이다. 이는 북한군 점령 시절 북한군과 지방 좌익에 의한 학살로, 수복 후 부역혐의자에 대한 학살로 이어졌다.
소위 '톱질전쟁'이라는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과 북한, 좌·우,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은 최소 수십만 명에서 최대 100만 명일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극우반공체제가 확립된 대한민국 사회에서 빨갱이에 의한 우익인사 학살을 제외한 문제는 입도 뻥끗 못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유족들의 목소리가 경남·북 지역을 중심으로 잠시 일었으나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그 목소리는 역사의 수장고에 잠들었다.
2000년 들어 유족회, 시민사회단체, 역사연구자, 종교인들의 과거사법 제정 운동으로 2005년 5월 31일 과거사법의 제정과 그해 12월 1일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했다.
피해자 수치의 간극

▲조사 진도군 민간인 희생사건 참고인 조사. (2021.12.15. 진실화해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하면서 국민보도연맹 사건 피해자를 최소 5129명 이상이라고 발표했다. 역사학계에서 주장한 20만 명과는 엄청난 격차를 보였다. 왜 이런 차이가 노정됐을까?
우선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신고주의'에 기반한 조사를 했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가 당시 민간인학살 사건에 대한 자료와 관련자·단체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보다는 유족과 관련자들의 신고에 기반해 조사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2006년 직권조사를 결정했다.
하지만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보도연맹원 처형자 명부가 나온 울산과 청도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피해자 유족과 같은 마을에 살았던 이들에 대한 구술증언에 주로 의존했다. 또한 희생자를 확정하는 과정에서 제적등본 상의 사망일시, 시신 수습 여부가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했다. 이런 기준은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더욱 엄격하게 적용됐다.
국가가 해야 할 일, 즉 관련 자료의 수집을 통한 피해자 확정을 방기한 채 현실성 없는 잣대를 들이대며 유족들에게 아버지와 가족의 죽음을 증명하라고 겁박했다. 그나마 보도연맹 사건은 양호했다. 대부분 마을과 면 단위로 집단학살을 당했기에 이웃과 마을 사람들이 증언을 했기 때문이다.

▲유해 발굴 현장 공개 선감학원 유해발굴 현장 공개. 2023.10.25. 진실화해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문제는 형무소사건과 군경에 의한 사건이었다. 형무소 사건의 경우 제1기에서는 판결문이 나오면 대체적으로 희생자로 간주했으나 제2기에서는 그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수형인명부가 나와야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장기수는 진실규명 대상에서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 장기수는 '진짜(?) 좌익'이었다는 이유에서이다. 진실화해위원회 출범 취지에 어긋나는 일이다.
국가기관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아니 꼭꼭 숨어(숨겨져) 있을 처형자 명부와 신원조회(연좌제) 서류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 것이 진실화해위원회의 가장 큰 한계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국가에 권고한 사항이 거의 지켜지지 않는 것도 문제다. 국가의 사과, 위령사업 및 유해발굴 지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역사기록의 수정, 평화인권교육 강화 중 맨 마지막 두 가지는 전혀 시행되지 않고 있다.
교과서와 대다수 지방지에 민간인 학살사건이 전혀 수록되지 않고 있으며 군인·경찰을 위시로 한 평화인권교육 실시가 그것이다. 가장 중요한 권고사항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사항이 정치 상황에 휘둘리는 것도 문제지만,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과 주요 간부가 뉴라이트 성향이라는 게 보다 큰 문제다.
이같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이 대한민국의 역사를 진일보시키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와 결정문은 훌륭한 역사 교과서이자 인권지침서이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 일선 조사관들께 감사드린다.

▲진실규명신청서 접수 진실화해위원회 정근식 위원장이 5층 민원실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의 진실규명 신청을 접수받고 있다. 2020.12월. 진실화해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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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역사적 사과...그 이후 벌어진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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