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예의는 '포기하지 않는' 사랑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이 들려주는 제주 4·3 이야기 <작별하지 않는다>

등록 2025.04.16 08:07수정 2025.04.16 08:07
2
원고료로 응원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는다. 그 속에는 기쁘고 행복한 기억들도 있지만,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원치 않는 이별을 맞이하기도 한다. 떠나간 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꼭 거창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잊지 않고 살아가는 마음, 어쩌면 그것이 떠난 이들을 향한 최고의 예의일지도 모른다. 한강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런 지긋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 표지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 표지 교보문고

이 소설은 주인공인 경하가 꾼 꿈으로 시작된다(이 꿈은 실제로 한강 작가가 꾼 꿈이다). 경하는 학살과 고문을 당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현실에 괴로워한다. 그래서 자신의 오래된 친구인 인선에게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피해자들의 고통을 담은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하고, 인선은 이를 수락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프로젝트가 잊힐 무렵, 인선에게서 연락이 온다.

경하는 인선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곧바로 병원을 찾는다. 병원에서 경하는 인선에게 한 가지 부탁을 받는다. 자신의 제주 집에 가서 혼자 있는 앵무새를 구해달라는 것이다. 경하는 힘겹게 인선의 집에 도착하지만, 앵무새는 이미 죽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경하는 인선이 계속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인선의 어머니 '정심'이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던 도중 갑자기 나타난 인선을 통해 경하는 정심의 안타까운 사연과 제주 4·3 사건 피해자 인터뷰를 듣게 된다. 그리고 인선은 경하에게 '우리 나무들을 심을 땅'을 보여주겠다며 경하를 이끌고 눈보라가 치는 바깥으로 나선다. 경하는 인선이 죽은 혼이 아닐까 의심하고, 인선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성냥에 불을 붙인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불꽃이 솟아오르며 소설은 끝이 난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인물들의 생사 여부가 명확하지 않아,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듯한 전개 속에서 자주 혼란을 느꼈다. 분명 병원에 있어야 하는 인선이, 어느 순간 경하 곁에 나타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경하 또한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이 몇 번 있었지만, 부자연스럽게 그 위기를 넘긴다. 심지어 죽어 있던 앵무새마저 어느새 살아나 경하가 건넨 먹이를 먹고 있다. 이처럼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듯한 전개는 독자에게 끊임없이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인물들의 생사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히려 그들이 생사를 넘나들며 들려주는 제주 4·3 사건 피해자들의 얘기가 유해조차 찾지 못한 이들의 아픔을 더욱 생생하고 절실하게 전해준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 표지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 표지 옥윤서

이 책은 또한 한강 작가 특유의 표현 방식이 돋보인다. 그녀의 시적인 문장과 이미지 표현은 책의 분위기를 더욱 섬세하고 깊이 있게 만들어줬다. 특히 '눈'을 표현하는 방식이 인상 깊었다.

한강은 눈을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또한 수많은 결정들이 결속되어 하나의 눈송이를 이루는 특성을 이용해 인물들 간의 정서적 연결을 드러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차가움'이라는 눈의 감각을 통해 죽음과 상실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처럼 '눈'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다양한 감정과 의미를 끌어올리는 한강 작가의 표현력은 단연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죽음이 이렇게 생생할 수 있나.
뺨에 닿은 눈이 이토록 차갑게 스밀 수 있나"
- 작별하지 않는다. p.323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은 총상을 입은 동생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동생의 입에 넣어준다. 인선은 제주 4·3 사건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목공 작업을 하던 도중 손가락이 잘린다. 경하는 인선이 위험에 처한다면 자신도 손가락을 이로 갈라 피를 주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세 인물 모두 비슷한 고통을 마주하지만, 그 시점은 각각 다르다. 정심은 과거에 이 고통을 겪었다. 인선은 피해자들의 아픔을 이해하고자 애쓰는 과정에서 비슷한 고통을 겪는다. 경하는 자신도 이러한 고통을 감내하겠다 다짐한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고통의 대물림 속에서 세 인물이 각자의 방식으로 그 아픔을 감내하며 의지를 연결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 깊었다.

"눈을 허물고 기어가 네 얼굴에 쌓인 눈을 닦을 거다.
내 손가락을 이로 갈라 피를 주겠다."
- 작별하지 않는다. p.324

한강이 마지막에 남긴 "이것이 지긋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라는 말은 제목과도 연결된다. 사랑에는 큰 고통도 뒤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겠다는 마음, 이들과 작별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야말로 작가가 말하는 지긋한 사랑이 아닐까. '작별하지 않는 마음'을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한 번쯤 읽어보길 추천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은이),
문학동네, 2021


#작별하지않는다 #제주43사건 #지긋한사랑 #한강 #유네스코기록유산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다양한 이야기를 하는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테슬라는 우리 생각보다 위험하다" 어느 교수의 일갈 "테슬라는 우리 생각보다 위험하다" 어느 교수의 일갈
  2. 2 검찰 조사만 25번... 등골 서늘하게 만든 검사의 한 마디 검찰 조사만 25번... 등골 서늘하게 만든 검사의 한 마디
  3. 3 '장관 후보 용혜인 14일'이 남긴 것 '장관 후보 용혜인 14일'이 남긴 것
  4. 4 '1987년엔 풀이 먼저 일어났는데 지금은 왜 안될까' 정의당 대표의 질문 '1987년엔 풀이 먼저 일어났는데 지금은 왜 안될까'  정의당 대표의 질문
  5. 5 '서울의 맨해튼'... 대통령 지시로 시작된 광기 '서울의 맨해튼'... 대통령 지시로 시작된 광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