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8년 5.10선거가 끝난 후 하산하는 주민들
NARA / 제주4·3아카이브
냉전반공체제에서 '빨갱이' 또는 그 가족으로 분류된 사람들에 대한 폭력은 전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들은 1980년대 초까지 연좌제 적용을 받아 공안 당국의 감시와 사찰을 받았고, 취업·출국이 제한되며 지역사회에서도 배제되었다.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 아래의 유대인처럼, 이들은 수십 년간 비가시적인 '게토'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 가운데 특히 한국전쟁기의 '처형자', '행방불명자', '월북자'의 가족 여성들은 연좌제 성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담당 경찰이 주기적으로 성폭행한 경우, 남편을 간첩으로 몰고 간 뒤 아내를 협박하며 성폭행한 경우도 있다. 국민보도연맹원 아내가 경찰에게 강제 임신을 당한 후 살던 마을을 떠나야 했던 사례도 있다. 어떤 여성은 아버지 또래의 대한청년단 간부에게 강제로 시집 가 첩살이, 식모살이를 해야 했고, 아들을 낳았으나 호적에 자신의 앞으로 올릴 수 없어 평생 그것이 가장 사무친 한이라고도 하였다.
우선 사찰·관리 대상이던 일부 여성이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자신의 담당 경찰에게 성폭행당한 사례가 있다. 그리고 남편을 간첩으로 몰며 공안기관으로 끌고 간 뒤, 아내에게 남편의 신변 안전 문제로 위협하며 경찰이 성폭행을 한 사례가 있다. 전쟁 때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뒤, 그들의 아내 여러 명이 담당 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례도 있다. 이 사건으로 한 여성은 강제 임신을 하고 시가에서 쫓겨나 살던 마을을 떠나야 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거치며 시국 사건이나 간첩 조작 사건에서도 여성 피의자나 남성 피의자의 가족 여성들이 성폭행당했다. 5⸱18 당시 계엄군의 성폭력도 있었고, 미군 '위안부' 역시 국가가 제도화한 성폭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피해자들은 현재 고령에 이르러 여러 지병을 앓고 있다. 성폭행 후유증과 당시 가해진 신체적 폭력의 여파로 불임 등 만성 질환을 얻은 경우도 있다. 트라우마가 신체화되어 각종 증상으로 이어진 사례도 많다. 아직도 과거의 사건 때문에 악몽과 불면에 시달리는 생존자가 있고, 매년 특정 시기마다 트라우마성 발진을 겪으며 고통받는 이도 있다. 어머니와 함께 경찰에게 성폭행당한 한 생존자는, 밤마다 어머니가 이를 갈며 고통스러워하던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고 증언했다.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한 생존자도 있고, 오랜 우울증 끝에 세상을 등진 피해자도 있다. 그들이 겪는 트라우마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도 2차 가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피해를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한다. <벙어리새>(류춘도 지음)라는 책 제목처럼,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이 고통을 숨긴 채 수십 년을 마음에 감옥을 담고 살아온 것이다.
더 늦기 전에 국가가 답해야 한다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국가에 의한 성폭력(과거사 성폭력) 사건은 다양하게 있었다. 그러나 5⸱18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외에는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진상규명된 적이 없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진실화해법)에도 관련 규정이 없기 때문에, 과거사 성폭력 피해 조사는 현재로서는 어려운 실정이다.
나는 2021년부터 과거사 성폭력을 진실규명 과제로 명시하고, 피해자 치유 지원까지 포함하는 진실화해법 개정을 주장해왔다. 위원회 안에 전담조사팀을 꾸리고, 피해자가 2차 피해 우려 없이 증언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21대 국회에서는 윤미향 의원 등 11인이 이 내용을 담은 진실화해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의안번호 2115444) 임기 만료로 폐기되었다. 22대 국회에서 과거사 성폭력 사건 진실규명은 더불어민주당 임미애 의원 등 10인이 발의한 진실화해법 개정안(의안번호 2206535)과 정준호 의원 등 10인이 발의한 진실화해법 개정안(의안번호 2206649)이 있다. 그러나 이 안들은 아직 소관위 심사 중이며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한 상태다.
국제사회에서는 전시 성폭력과 젠더폭력에 대한 과거청산을 이미 오래전부터 제도화해 왔다. 1995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진실화해위원회를 시작으로,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진실화해위원회에 과거사 성폭력 진상규명을 법적으로 명시했다. 남아공과 시에라리온의 진실화해위원회는 여성 성폭력 피해자들이 신원을 보호받으며 증언할 수 있도록 여성 특별청문회를 열고, 증언 전후에 심리상담사가 지속적으로 상담을 지원하는 등 세심하게 배려했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위원회의 조사 내용은 최종보고서에 별도의 장으로 수록되었다. 페루는 위원회 내에 젠더 부서를 설치했고, 유고슬라비아와 르완다에서는 국제형사재판소를 통해 전시 성폭력을 처벌했다. 2000년 유엔 안보리는 '여성과 평화·안보에 관한 결의안 1325호'를 채택해, 분쟁 지역에서의 성폭력과 젠더폭력 예방을 위해 해당 사건을 조사하고 법적 제재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이후 국제사회에서는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젠더폭력에 대한 과거청산의 흐름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과거청산은 성 인지적 관점이 부족했고, 과거사 성폭력은 진실규명의 우선 과제로 인식되지 못했다. 과거사 성폭력은 반공주의, 권위주의, 가부장주의가 중첩된 지점에 있어 그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러나 이는 과거 정권이 저지른 범죄이기에, 국가기관이 책임지고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해야 한다. 특히 피해생존자들이 고령인 점을 고려할 때, 더 늦기 전에 국가와 사회가 이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치유를 위한 길을 함께 열어가야 한다.
무엇보다 과거청산 자체가 제대로 돼야 한다. 과거청산은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는 길이며, 역사 정의를 회복하고 민주주의의 뿌리를 지키는 길이다. 새 정부에서는 중단 없는 과거청산을 통해 12⸱3내란과 같은 사건이 이 사회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 방지를 제도화해야 한다.

▲<표1> 과거사 젠더폭력 사건의 범주와 주요 사건
김상숙
[관련기사]
"'팔자'라고 불리던 그녀들의 사연, 더이상 당연한 일이 아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2021407395470504
"과거사 진상 규명, 이젠 젠더 관점의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2021408510365761
참고문헌
김상숙(2021), "한국전쟁 전후 여성 민간인 학살과 전시 성폭력 — 1기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기록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제131집.
김상숙(2021), "젠더폭력 과거청산, 어떻게 할 것인가?: 남아공 TRC의 시도를 통해 본 한국 진실화해위의 과제", <NGO연구> 제16권 제2호.
김상숙(2022), "연좌제와 '대살(代殺)'을 중심으로 본 여성 민간인 학살과 전시 성폭력", <여성문학연구> 제57권.
김상숙(2024), "여성에 대한 국가 젠더폭력 과거청산과 치유 가능성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생존자와 유가족의 경험을 중심으로", <인권연구> 제7권 제1호.
김귀옥(2019), <그곳에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 : 식민주의와 전쟁, 가부장제의 공조>, 선인.
류춘도(2005), <벙어리새>, 당대.
박정미(2011), "한국전쟁기 성매매정책에 관한 연구: '위안소'와 '위안부'를 중심으로", <한국여성학> 제27권 2호
1기 진실화해위(2008), 남원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권 외 사건보고서들.
구술 증언 자료들(김상숙 면담자료 / 최태육 면담자료)
* 글쓴이 김상숙은 1기 진실화해위에서 조사관으로 일했다. 현재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국가에 의한 젠더폭력 과거청산'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10월항쟁 - 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돌베개, 2016), <민주노조, 노학연대, 그리고 변혁>(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공저), <한국현대사와 국가폭력>(푸른역사, 2019, 공저), <대구경북 민주화운동사>(선인, 2020, 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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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좌제 성폭력까지 있었는데... 국가는 왜 침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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