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튜브 채널 '정희원의 저속노화' 화면 갈무리
정희원의저속노화
'저속노화'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뜨겁다. 화제의 중심에는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에 재직 중인 정희원 교수가 있다. 저속노화의 개념을 알린 장본인이다. 지난 2023년 7월 12일 방영된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 출연을 계기로 저속노화의 개념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됐다.
이후 '정희원의 저속노화'라는 유튜브 채널이 탄생했다. 단순히 일회성 방송 출연에 그치지 않고 소통 채널을 따로 만들어 관련 정보를 지속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지난해 8월경 첫 영상이 업로드됐고 현재(4월 19일 기준) 구독자 41만 명을 보유한 채널로 성장했다. 불과 8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만큼 저속노화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저속노화' 외치던 의사는 왜 '과로'를 화두로 꺼냈나
해당 채널에 있는 대부분의 콘텐츠가 정 교수의 열정과 의지를 담고 있지만 특히 주목받고 있는 게 있다. 며칠 전 업로드 된 '과로가 내게 남기고 간 것들'이라는 제목의 영상이다.(관련 링크 :
https://youtu.be/fthMyBTNKlQ?si=13WMFs4kKsjNl3n1)
해당 영상에서 정 교수는 최근 과로사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는 그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했다. 지난해 2월 촉발된 의정 갈등으로 인해 정교수 역시 초과 근무를 피할 수 없었다. 전공의들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근 1년간 매주 60시간 가까운 진료를 했다고 한다.
진료는 기본이고 연구와 교육, 심지어 당직까지 떠안게 돼 심할 때는 한 주에 36시간 연속 근무를 3번 한 적도 있다. 최근 2~3개월 동안은 번아웃 증상까지 겪게 됐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지난해 연말 환경 보건 교육 이수를 위해 강의를 듣던 중 정 교수는 '과로사'라는 단어에 시선이 끌렸다. '과로'라는 말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전혀 낯설지 않은, 오히려 친숙하기까지 한 단어다. 그 역시 과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무리하게 추진된 의대 정원 정책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과로를 말려야 할 의사 본인이 도리어 과로사의 위험에 내몰린 상태. 안 그래도 그는 평상시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24시간 연속 무리한 근무로 인해 실수가 발생될 경우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정 교수가 영상에서 언급한 내용 중 특히 두 가지가 인상 깊게 다가온다. 첫째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가운데 한국의 연간 노동 시간은 1901시간으로, 멕시코, 코스타리카, 칠레에 이어 4위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세계 4강 수준의 장시간 근로를 자랑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된 지 벌써 20년째다. 당시 많은 갑론을박이 있었다. 노동계는 환영했고 기업들은 망한다고 난리였다. 그럼에도 일주일에 5일만 일하는 방식은 정착됐고 이제는 당연시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의 노동 시간이 세계 수준에 꼽힐 정도로 길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평범한 직장인이던 내가 퇴사한 이유
두 번째는 지나치게 긴 통근 시간에 대해 지적한 부분이었다. 정 교수는 이에 관해서도 여러 자료들을 근거로 이야기했다. 2023년 통계청 자료에는 국내 통근자 평균 출퇴근 시간이 72.6분, 그중 수도권은 83.2분으로 나와 있었다. 이는 하루 왕복 기준이며 편도 기준으로는 약 41분 정도다.
또한 2019년 실시한 경기에서 서울로의 왕복 출퇴근 시간이 무려 168분에 이른다는 국토교통부 조사 결과도 있었다. 물론 통근 시간까지 근로 시간에 산입하는 법은 없다. 하지만, 긴 출퇴근 시간이 과로사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두 가지 요인들은 복합적으로 얽혀 수면 부족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정 교수는 이야기한다. 너무 오랜 시간 일하면 수면 패턴이 불규칙해지기 십상이고, 거기에 긴 통근 시간으로 인한 스트레스까지 더해진다면 수면의 양과 질 모두 나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한 시간들이 지속될수록 일상도 무너질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필자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 근무 부서의 특성상 야근이 적지 않았고 크고 작은 행사도 많았다. 퇴근 시간은 들쭉날쭉이었고 스케줄의 변동도 잦았다. 굵직한 업무나 행사들이 일단락되면 대체 휴가가 주어져 며칠 쉴 수 있었지만 피로감이 풀리지 않았다.
한동안은 원거리 출퇴근도 해야 했다. 서울에서 살다가 아내의 이직으로 경기도 동두천으로 이사하게 돼 직장이 멀어졌다. 당시 회사가 용산에 있었는데 지하철 기준 편도로 빠르면 1시간 40분, 늦으면 2시간을 훌쩍 넘기곤 했다. 자도 자도 졸리고, 아무리 쉬어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만성 피로에 찌들 수밖에 없었고 면역력도 급격히 떨어졌다. 너무 힘들어서 다시 서울로 이사 왔지만 한번 생긴 잔병들은 쉬이 낫지 않았다. 기본 두세 군데 병원에 다니며 진료를 받았고 마음도 한껏 예민해졌다. 그로 인해 인간관계에 부딪힘도 증가됐다.
그럼에도 한동안은 내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차례로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미련하게 버텼지만 결국 우울증으로 퇴사했다. 나를 돌보는 것에 힘쓰고, 나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알려 잠깐이라도 쉬어가는 시간을 가져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든다.
회사 관리자들이 꼭 봐야 하는 영상
영상의 시작 부분에서 정 교수는 강조해 말한다. "과로는 사람을 밑바닥부터 서서히 파괴하게 만든다."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과로와 긴 통근 시간, 스트레스 상황에 장시간 노출된다면 일상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
과로로 인한 문제들은 결국 세 가지의 매커니즘 중 하나가 무너질 때 다른 것들도 연쇄적으로 함께 무너지면서 생긴다. 수면 부족, 스트레스 호르몬, 생활 습관. 이 세 가지 모두를 지켜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근로를 하더라도 과로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 해결도 함께 수반돼야만 한다. 사실상 이 부분이 더 중요하다. 개인의 노력보다 제도적 개선이 주는 효과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주 6일 이상 근무했던 시대에 비해 더 적게 근무하는데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자기 객관화다.
국가나 조직도 자기 객관화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노동, 의료, 복지 등 다양한 차원에서 검토를 통해 구조 자체의 변화를 꾀할 때다. 개인은 자기 돌봄의 실천을, 조직과 관리자들은 시대에 맞는 의식의 변화를 꾀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상은 정책 수립의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꼭 봐야 한다. 더 나아가 일을 하는 조직의 관리자들 역시 이 영상을 보길 바란다. 특히 댓글도 함께 꼼꼼히 훑어보시라.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베스트 댓글 한 문장은 이렇다.
"이 영상 우리 팀장님한테 보내주실 분?"
이 '웃픈' 댓글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조직이 변하지 않고 관리자가 결단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정 교수는 이달 초 휴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다한 진료와 당직으로 피로가 누적돼 스스로 내린 결단이다. 의사라는 직업상 피로 누적으로 인한 실수는 환자의 생명과 직결될 수 있기에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의 건강 악화를 피하기 위한 선택이면서 우리에게 전하는 자기 돌봄 메시지에 대한 실천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개인의 희생과 노력에만 의지하며 발전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가 절실하다. 조직원들을 갈아 넣어 성과를 내던 해묵은 방식은 버리자. 과한 노동이 없는 문화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거나 불안해하지 말자. 개인과 사회, 어느 쪽도 큰 손해보지 않고 함께 성장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과로사회'의 종말을 고할 때이다. 이것이야말로 개인과 조직이 조화롭게 양립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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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속노화' 의사가 휴직한 이유, 거기에 달린 촌철살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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