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충북본부 민주노총 충북본부 창립대회
민주노총 충북본부
현장에서 분출하는 민주노조운동과 이를 지원하는 노동운동단체의 화학적 결합은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했다. 1990~1991년도에는 자본과 권력의 탄압에 공동대응하는 수준이었다면 그 이후에는 일상적인 연대 활동이 이뤄졌다.
청주공단 내 대규모사업장인 맥슨전자에서 민주 후보가 당선된 시기에 AMK, 한국야금 3개 사업장 노동조합이 노동자 여름캠프, 공동간부교육, 연합 풍물패를 만들었다. 연합 풍물패인 해방굿패는 이후 참소리패로 이름을 바꾸고 지역 노동조합 행사에 분위기를 돋구는 역할을 독톡히 했다.
이러한 일상적인 민주노조 연대 활동은 비단 3개 사업장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중간노조의 조합원들도 적극 참여해 10여 개 사업장이 교류하게 됐다. 그런데 1992년부터 총액임금제라는 암초가 나타났다. 정권은 총액임금제, 노동조합 업무조사권 발동으로 민주노조의 목줄을 죄었다. 비슷한 시기에 전자와 섬유업종의 도산과 폐업, 산업구조조정이 잇따랐다. 그 결과 민주노조 진영의 조직력이 상당히 약화되었다. 충북지역에서는 청주의 AMK, 충주의 배이산업 만이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이에 노동운동 진영은 위기 탈출 방안으로 적극적인 연대를 취했다. AMK, 배이산업, 참소리패, 한라중공업, 롯데햄, 럭키(현재의 LG)의 현장 활동가들이 청주노동자의 집을 중심으로 '충북민주노동자회'를 결성했다.
그 성과로 정식품, 럭키, 한국야금, 심텍, 한라중공업 등에서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또는 노조결성팀이 결성되었다. 또한 청주노동자의 집과 함께 노민추 연대모임인 '좋은 친구들'이 조직돼 현장조직력을 복원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청주지역 택시노조와 의보(현재의 사회보험), AMK, 배이산업 4개 노조가 '충북지역노동자문화제와 전국노동자대회 준비를 위한 노조대표자모임'을 구성했다. 그 결과 '충북지역노조대표자회의'가 7개 노조로 결성(1994.10.11.)돼 약 1년 6개월 동안 지역 최초의 공식적인 노조연대조직이 출범했다(유영주, '지역노동운동사', <충북지역 사회연구 제8집>, 1999).
이러한 민주노조운동을 향한 투쟁과 연대는 1996년 3월 23일 민주노총 충북본부 설립으로 그 결실을 맺었다. 이러한 결실에는 민주노총 충북본부 초대위원장을 맡게 되는 배창호(사회보험노조)와 이영섭(정식품), 정기영(배이산업), 오범진(한국야금), 오현식·최수희(LG) 등이 주춧돌 역할을 했다. 청주노동자의 집 대표 김재수와 상담소장 유영주는 민주노조 연대체 설립에 디딤돌의 역할을 했다. 민주노총을 만드는 과정에서 지역 노동자들은 정진동을 수시로 찾아 자문을 받았다.
우진교통 투쟁 막전막후

▲연대사 시청 앞에서 우진교통 투쟁에 연대사하는 정진동
우진교통
몇몇 우진교통 노동자들이 2004년 7월 청주산선 문을 두드렸다. "월급은 밀리고 회사는 망할 지경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한국노총에 가서 도움을 청하세요." 노동자들의 하소연을 들은 정진동의 답이었다. 노동자들은 우진교통 문제를 정진동이 직접 맡거나 민주노총을 소개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와 당황했다.
하지만 정진동 목사의 뒤이은 답변을 듣고서야 그의 본심을 이해했다. "한국노총은 분명히 외면할 겁니다. 그러면 민주노총을 찾아가세요." 당시까지 우진교통의 상급노조는 한국노총이었다. 그렇기에 정진동은 노동자들의 분열을 막기 위해 일차로 한국노총에 찾아갈 것을 주문한 것이다.
2004년 충북지역 노동계의 핫이슈는 우진교통 투쟁이었다. 원래 우진교통은 2001년 1월 8일, 기존의 대화운수와 동원교통을 통합해 만든 청주 최대의 시내버스 업체였다. 하지만 그 직후부터 약 4년 동안 노동자들이 제날짜에 임금을 받은 것은 겨우 두 번밖에 되지 않았다. 2004년 7월 파업 전까지 매년 15억~20억 원씩 적자였고, 자본금을 포함해 60여억 원이 증발됐다.
그 와중에 회사가 차고지까지 매각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노동자들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기존 경영진의 부실한 운영으로 회사는 결국 부도가 났고, 2004년 봄을 지나면서 두 달 동안 240명이 넘는 직원(노동자)들 임금 60여억 원이 체불됐다. 더 큰 문제는 직원들의 퇴직금조차 한 푼도 적립되지 않아 30여 년 근무한 직원의 경우 1~2억 원의 퇴직금을 날릴 상황이었다(<오마이뉴스> 2017.8.4, "1년 안에 망할 뻔한 회사~").
노동자들은 무책임하고 문제점 투성이인 회사와 싸움을 하면서 투쟁의 대상이 바뀌어야 함을 직감했다. 회사가 임금과 퇴직금 해결 그리고 버스운영을 정상화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싸움 주 타깃을 청주시로 향했다. 지방자치단체가 대중교통인 버스회사의 관리·감독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진교통 창립 14주년 기념식 우진교통 창립 14주년 기념식
우진교통
우진교통 노동자들의 청주시를 향한 투쟁은 고난의 길이었다. 청주시는 우진교통의 "면허를 취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청주시는 '면허 취소'라는 협박에 노동자들이 백기를 들 줄 알았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면허 취소가 되면 노동자들이 재입찰에 응하겠다는 배수진을 쳤다.
171일간 투쟁의 백미는 청주시청 앞 농성이었다. 야간에 도로를 점거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생존권을 보장을 향한 처절한 고투였다. 여기에 정진동이 마이크를 잡았다. 청주시의 외면과 경찰의 폭력적인 대응 속에서 노동자의 가슴을 울리는 정진동의 연설은 '울림' 그 자체였다.
정진동이 또 한 번 우진교통 노동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것은 저상버스 시승식에서였다. 우진교통은 충북 도내에서 최초로 저상버스를 도입했다. 2005년 4월 일 19일 저상버스 시승식에 충북 도내 언론이 총출동했다.
당시 뇌졸중으로 쓰러져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던 정진동은 저상버스 시승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왔다. 우진교통 대표이사 김재수의 장애인과 노약자를 위한 저상버스 도입 취지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이어서 정진동의 소감이 있었다. "회사 운영은 노동조합보다 운영이 어렵습니다. 앞으로 한마음으로 노동조합을 잘 운영하세요. 저상버스 도입에 감사드립니다." 정진동의 어눌한 말투에 언론사의 사진기 플래시가 연신 터졌다.
전태일·이소선·정진동

▲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벽면에 걸린 전태일(가운데), 이소선 어머니(오른쪽) 그리고 정진동 목사(왼쪽).
박만순
2025년 현재 민주노총 충북본부 사무실에는 3명의 사진이 걸려있다. 사진의 주인공은 전태일 열사와 그의 어머니 이소선 그리고 정진동이다. 정진동 목사를 존경하고 뜻을 잇고자 하는 민주노총 충북본부 조합원들의 마음이 단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정진동의 운명 후 2008년도에 '정진동 추모사업회'가 구성됐다. 추모사업회는 2021년부터 추모식을 '정진동 목사 정신 계승 충북 민중대회'로 변경했다. 추모사업회는 매년 호죽노동인권상과 장학금, 연대기금을 수여하고 있다.

▲윤석열 정권 퇴진 2024 충북민중대회에서 윤석열 정권 퇴진 팻말을 들고 있는 조순형
민주노총 충북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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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이소선 어머니와 어깨를 나란히 한 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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