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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의 온전한 삶이 존중되는 새로운 민주주의로

영국 대법원의 평등법상 성별 해석 판결에 대한 비평

등록 2025.04.29 14:45수정 2025.04.29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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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6일 영국 대법원은 2010 평등법(Equality Act 2010) 상 '여성'과 '성별'은 생물학적 여성과 성별만을 의미하며, 트랜스여성은 평등법상의 여성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해당 판결 이후 영국에서는 대규모 항의시위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28일 영국 평등위원회가 트랜스젠더의 화장실 제한을 권고하는 등 권리에서의 후퇴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으로 해당 판결에 대한 보도는 국내에서도 수없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대부분이 결론에 대한 요약과 격변예고 등의 다소 자극적인 헤드라인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영국 대법원 판결의 내용과 의미와 한국에서의 트랜스젠더 담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영국 판결은 성별 전반의 해석을 바꾼 것이 아니다

 2021. 3. 31. 진행된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 행동
2021. 3. 31. 진행된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 행동 무지개행동

이 사건의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18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공적 영역에서 여성 비율을 높이기 위한 법을 만들면서 여성에 트랜스젠더 여성을 포함하였다. 이에 대해 상원이 해당 법은 의회의 권한 밖에 있어 위법하다고 판단하자, 스코틀랜드 정부는 해당 법의 여성 정의는 평등법 상의 성별 정의에 따른 거라고 해석했다. 이에 대해 '포 위민 스코틀랜드'라는 여성 권익 단체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 영국 대법원은 일상 및 사회에서 쓰이는 성별에 대한 모든 일반적인 정의에 대한 해석을 내린 것이 아니다. 2010 평등법이라는, 차별금지와 평등에 관한 법률에서 사용하는 성별에 대한 해석을 한 것일 뿐이다. 판결문 첫머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2. 법원의 역할은 성 또는 성별에 대한 공개적 주장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며, 평등법에서 다루는 것 이상의 여성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도 아니다." - 영국 대법원 판결문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 영국이 성별에 대한 정의를 생물학적 성별로 바꾸었고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부정했다고 한다면 이는 틀린 이야기이다. 여전히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2004년 성별인정법(Gender Recognition Act 2004)이 있기 때문이다.

영국 대법원이 드러낸 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대한 무지


영국은 2004년 성별인정법을 제정하여 성별변경 절차를 규정했다. 해당 법에 따르면 만 18세 이상의 성인으로서 2년 이상 반대의 성별로 살아온 사람은 성별인정증명서(Gender Recognition Certificate, GRC)를 발급받을 수 있고, GRC를 받은 사람은 모든 경우에 변경된 성별로 인정받는다. 한국에서 법적 성별정정을 하여 주민번호를 변경하면 이후로는 정정한 성별로 인정받는 것과 동일하다.

다만 성별인정법 제9조 제3항은 관련 사항이 다른 법률에 의해 규정된 경우에는 예외로 본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영국 평등법은 성별인정법 이후인 2010년에 만들어졌지만, 1975년에 만들어진 성차별금지법을 이어받아 만들어진 법이다. 영국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1975 성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 대한 고려 없이 남녀를 생물학적 성별로만 규정했다는 것과, 이를 계승한 평등법이 임신, 출산에 대한 보호와 같이 생물학적 성별을 고려한 차별금지사유를 두고 있다는 점 등을 판단 근거로 제시했다. 이 부분은 기존의 개별적 차별금지법을 종합하여 만들어진 영국 평등법의 한계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판단에서 영국 대법원이 트랜스젠더만이 아닌 성소수자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판결문은 트랜스젠더 여성을 평등법상 여성으로 인정하면 레즈비언 커뮤니티에도 안 좋은 영향을 준다며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또 다른 핵심 조항은 성적 지향에 대해 규정한 평등법 제12조이다. 이 조항에서 성별에 대한 규정은 잘 읽어보면 생물학적 성별에 대한 것으로 읽힌다. 사람은 성별 증명서를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끌리지 않는다" - 영국 대법원 판결문

즉, 영국 대법원은 레즈비언은 생물학적 여성에게만 끌리는 사람이며 트랜스젠더 여성은 성별변경을 했든 아니든 생물학적 남성이기에 레즈비언의 성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성적지향이 법적 성별을 기준으로 정의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물학적 성별도 아니고 성별정체성을 기준으로 정의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에 대한 전혀 이해가 없는 이런 판결이 2025년에 나온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여전히 트랜스젠더는 평등법의 보호를 받는다

글의 첫머리에서 이야기했듯 해당 판결 이후 영국 평등위원회가 화장실 제한 권고를 하는 등 실질적인 트랜스젠더 권리가 후퇴되고 있다. 다만 판결문은 결코 트랜스젠더를 평등법 상의 보호대상에서 제외한 것이 아니다. 영국 평등법은 성별과 별개로 '성전환(gender reassignment)'을 보호하며, 트랜스젠더가 성전환 과정 중, 또는 성전환을 하였다는 이유로 차별받는다면 이는 평등법 위반이 된다.

나아가 아이러니하게도 영국 대법원은 트랜스젠더가 여성으로 보이는 경우에는 성차별로부터 보호받는다고도 이야기했다. 평등법이 금지하는 차별에는 특정한 차별금지사유를 '지닌' 경우만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경우에도 간주차별로 금지한다. 이에 따라 판결문은 트랜스젠더가 성별변경을 했는지와 무관하게 여성으로 보이는 외모를 갖고 있는데 이로 인하여 다른 남성적인 외모의 사람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았으면 이는 성차별에 해당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이 사건이 논란이 된 계기를 생각하면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이다. 여성을 생물학적 여성으로 정의하고 트랜스젠더를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 중 하나가 트랜스젠더는 과도하게 여성성을 흉내내어 성평등을 해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 일부 손을 들어준 영국 대법원이 차별을 받지 않으려면 트랜스젠더 여성이 '여성처럼 보여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면 여성적으로 보이는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누가 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여성성/남성성에 대한 사회통념은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해당 판단은 이번 판결이 가진 허술한 논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트랜스젠더의 온전한 삶이 존중받는 민주주의로

 2025. 1.. 5. 한남동 관저 앞 집회 발언
2025. 1.. 5. 한남동 관저 앞 집회 발언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

"저는 법적 성별이 아직 남성인 트랜스젠더 여성, 트랜스젠더 여성 변호사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공간에서 낯섦과 다름, 다양성과 평등을 함께 배워가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으면 좋겠습니다." - 1. 5. 한남동 관저 앞 집회 발언문

지난 1월 5일, 나는 한남동 관저 앞 철야농성장에서 민변 집회시위지원단으로 함께 하며 무대에 올라 위와 같이 이야기했다. 12.3 내란 사태 이후 수많은 성소수자, 트랜스젠더들이 무대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발언을 했지만 일부 혐오가 나오는 것에 대해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떨리는 발언을 마치고 박수를 받고 내려오며, 광장에 우리가 함께 하고 있음을 실감하였다. 그리고 함께 모인 시민들은 끝내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영국 대법원 판결이 한국에 미칠 영향은 어떠할까. 향후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에도 영향을 줄까.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영국과 달리 한국에서 지금까지 논의되고 발의된 차별금지법은 '성전환'이 아닌 '성별정체성'을 차별금지사유로 하고 있다. 법적 성별과 무관하게 개인이 인식하고 살아가는 성별을 보호하는 우리의 차별금지법은 성별에 대한 더 넓은 해석을 당초부터 예정하고 있다.

또한 법원에서도 이미 고 변희수 하사에 대해 성별정정 전에도 여성의 병역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판례,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자화장실 이용 거부는 성별정체성 차별로 본 판례 등이 있다. 이들 의미 있는 판례는 모두 용기있게 자신을 드러내고 문제제기를 한 당사자의 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힘이 만든 승리를 지난 4개월 광장에서 경험했다.

이제는 그렇게 함께 지킨 민주주의가 모든 사람이 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상관없이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실현하기를 바란다. 영국 대법원의 판결이 일시적 부침이 될지는 모르나 스스로가 드러낸 모순 앞에 결국 그 무리한 논리는 무너질 거라고 본다. 영국의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의 투쟁에도 응원을 보내며, 긴 겨울을 끝내고 다시 따듯한 봄을 맞이한 것처럼 트랜스젠더가 있는 그대로 존중받으며 사는 그 세상은 반드시 올 것임을 확신한다.



#트랜스젠더 #성별 #영국 #성소수자 #차별금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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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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