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고도 먼 여정을 걷는 모든 이들에 위로가 돼줄 시선

[서평] 정세환 시선집 <달팽이의 꿈>을 읽고

등록 2025.04.29 17:45수정 2025.04.2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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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의 꿈 정세환 시선집
▲달팽이의 꿈 정세환 시선집 정세환

시를 벗 삼아, 사진을 동무 삼아 살아온 정세환 시인의 시선과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긴 시선집 <달팽이의 꿈>이 최근 발간됐다(2025년 3월 출간).

이번 시선집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달팽이'라는 상징이다. 느림과 기다림의 대명사인 달팽이는, 시인이자 사진작가인 정세환이 바라본 삶의 속도와 방향,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숙명적 기다림을 함축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시인은 달팽이처럼 더디지만 끈질기게 꿈꾸고 나아가는 여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삶에 대한 깊은 애정과 통찰을 건넨다.

달팽이의 꿈 · 1 <사진시> 달팽이의 꿈 · 1
▲달팽이의 꿈 · 1 <사진시> 달팽이의 꿈 · 1 정세환

달팽이의 꿈 · 1

당신에게 가는 길
멀고도 멀어
눈멀고 귀먹어 닿는 길

아지랑이 같은 한 생(生)
혼곤한 베갯머리 흔들어
일렁이며 다가서는 불빛 서너 점

멈출 수 있을는지
머무를 곳, 마음이 흐려지는 경계선
그곳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을는지


오랜 세월의 저편
그 아득함의 무게만큼
당신에게 가는 길
멀고도 멀어

책의 첫머리에 실린 작품 '달팽이의 꿈 · 1'에서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인간 존재의 고독과 애틋함을 노래한다.


감각조차 흐릿해지는 막막한 길 위에서 작은 불빛을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은, 인생의 덧없음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시인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나를 위한 변명 · 6 <사진시> 나를 위한 변명 · 6
▲나를 위한 변명 · 6 <사진시> 나를 위한 변명 · 6 정세환

나를 위한 변명 · 6

살바람 젖히며 봄을 알리는
산수유 여린 몸짓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소생의 들판을 환희의 유채색으로 덮은
양지꽃 산철쭉의 행로는 어디를 향한 것인가

성하의 작열하는 태양 뜨겁게 받아
짙게 그늘 지우던 플라타너스도
봉평 너른 들녘 환하게 수놓던 메밀꽃도
소슬바람에 떨어지는 잎새 추스르지 못하지

계절은 바람의 옷 갈아입고 왔다 가는데
댑바람 이겨내고 강설 헤치며 피어난
동백은 춘분의 흙더미 위에서
매화의 속삭임 들으며 떠나려니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정처 없이 떠난 존재의 여정은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지나온 길 흔적처럼 남아
덧쌓인 사연은 저대로 떠나보내고
세월의 풍파에 흔들리며 흔들리며
흘러가리

95쪽에 수록된 '나를 위한 변명 · 6'은 자연의 순환 속에서 인간 존재의 덧없음과 방황을 비유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산수유, 산철쭉, 플라타너스, 메밀꽃, 동백 등 계절 따라 피고 지는 생명의 모습을 통해, 정처 없이 떠나는 삶의 여정과 그 불확실성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자세를 담아냈다. 특히, "세월의 풍파에 흔들리며 흔들리며 / 흘러가리"라는 구절에서는 삶의 흔들림마저 품어내는 시인의 담담한 체념과 따뜻한 수용의 태도가 잔잔한 울림을 전한다.

정세환 시인은 이번 시선집을 통해 "때로는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두렵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흔들리더라도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속도로 걸어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인생길 위에서 기다림 속에 희망을 찾고, 흔들리는 순간마다 자신을 다독이며 나아가는 삶의 태도를 일깨운다.

<달팽이의 꿈>에 담긴 시들은 마치 조용히 말을 건네듯 독자 곁에 다가와 "서두르지 말라"고, "기다림 또한 삶의 일부"라고 속삭인다. 이 시집을 펼치는 순간, 독자들은 느리지만 더욱 깊이 있는 시선으로 삶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느리고도 먼 여정을 걷는 모든 이들에게, <달팽이의 꿈>은 작은 위로와 따스한 등불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정세환 시인 정세환 시인
▲정세환 시인 정세환 시인 정세환




#정세환시선집 #달팽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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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소설가, 한국문예미디어 대표, 한국사진문학 발행인, 우리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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