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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진상규명, 진실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약속

세월호참사 10년 하고도 1년... 우리는 왜 진상규명을 외쳤는가?

등록 2025.05.02 09:09수정 2025.05.02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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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이 약속과 노란 리본은 단순한 애도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분명한 물음과 요구가 담겨 있었다.

"왜 아무도 구하지 않았는가?" "왜 침몰했는가?"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답답한 물음 끝에 시민들이 외친 구호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었다. 이 구호는 세월호참사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다. '진상규명'이라는 구호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일이 벌어질 때마다, 슬픔이 길어질 때마다 등장하곤 했다. 용산, 강정, 쌍용, 그리고 5.18과 4.3 등, 한국 사회의 여러 국가폭력 사건 속에서 반복되며 쌓여온 시민들의 절박한 외침이었다.

그러나 세월호참사 초기에는 국가폭력 사건과 달리 용의자나 가해 주체가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구호였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이 참사 초기부터 외쳐졌다는 사실은 다소 의아할 수 있다. '누가 잘못했는가'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저없이 진상규명을 외쳤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세월호 관련 집회에서 시민들이 촛불과 피켓을 들고 있다. 세월호 관련 집회에서 시민들이 촛불과 피켓을 들고 있다.
▲세월호 관련 집회에서 시민들이 촛불과 피켓을 들고 있다. 세월호 관련 집회에서 시민들이 촛불과 피켓을 들고 있다. 4.16연대

진상규명, 정치적 선택이 되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는 '재난, 인간의 존엄을 묻는 시간'이라는 안내서를 발간하며, '사고'와 '사건'을 넘어 세월호참사에 '참사'라는 이름을 붙은 과정과 진실의 연관성을 설명한다. '사고'라는 말은 어쩌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의미를 내포함과 동시에 사실의 확인이 초점이 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사건'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의미를 동반하는 동시에 진실의 추출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참사'는 그 사건에 대한 해결 혹은 그 사건을 가능하게 한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운동 주체가 구성될 수 있는가에 따라 이름 붙여질 수 있으며(정원옥) 그러므로 모든 참사는 사회적 참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세월호 '사고'를 '사건'으로, '사건'에서 '참사'로 명명한 것은, 너무나 비통한 사건이 다시 되풀이 되지 않도록 중대한 사회변화를 이끌어 낼 정치적 선택을 요구하겠다는 선언이며, 진실의 추출을 중요한 과제로 삼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즉 우리는 사회를 바꿀 '정치적 선택'으로서 '진상규명'을 외친 것이었다.

불분명한 것들 속에서 확실한 한가지는 '국가가 구하지 않았음'을 우리가 목격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꿔야 할 대상 또한 분명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재난참사 앞에서, 우리는 국가와 사회를 바꾸기 위해 '진상규명'을 외쳤다.


세월호참사 11주기, 박근혜 7시간 대통령기록물 정보공개청구 기자회견 세월호참사 11주기를 맞아 대통령기록물에 대한 정보공개청구를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김순길 사무처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
▲세월호참사 11주기, 박근혜 7시간 대통령기록물 정보공개청구 기자회견 세월호참사 11주기를 맞아 대통령기록물에 대한 정보공개청구를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김순길 사무처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 4.16연대

반면, 국가는 진실을 감추며 끝내 국가폭력을 자행했다. 특조위를 방해하고 피해자를 불법사찰했으며, 수사외압과 당일 컨트롤타워의 행적을 대통령기록물로 30년간 봉인하는 등 직접적인 진실은폐에 나섰다. 이는 '진실을 요구하는 피해자를 억압한 권력'을 마주한 순간이었고 세월호참사가 참사를 넘어 국가범죄, 국가폭력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 요구는 국가폭력에 맞선 역사적 저항의 연장선에 있다. 우리는 '진실을 알 권리'를 침해한 국가폭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경험을 통해, 자연스레 '피해자의 알 권리', '국민의 알 권리'를 체득하게 되었다.어쩌면 '진실을 알 권리'는 4.16운동의 결실 중 가장 귀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진실을 찾는 과정은 생각보다 느리고 복잡했고, 자주 멈춰 섰다. 그럼에도 이 길을 걸어온 이유는, 진실이 밝혀져야 그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지난 10년간 수많은 국민이 함께해온 거대한 법제화 운동, 조사활동들을 모두 정리하기는 어렵다. 다만 굵직한 흐름 중심으로 안내하려고 한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운동

 2014년 11월 14일 오전 서울 광화문 세월호희생자 농성장 앞에서 세월호참사진상규명을위한 범국민서명호소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2014년 11월 14일 오전 서울 광화문 세월호희생자 농성장 앞에서 세월호참사진상규명을위한 범국민서명호소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이희훈

참사 직후부터 참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여정은 시작되었다. 참사 한 달 만에 겸겅합동수사본부는 납득할 수 없는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두 달간 수사 끝에, 국가의 책임보다 주로 선사와 감독기관에 맞추어진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경합동수사본부는 승객을 버리고 탈출한 승무원들, 수익을 우선하여 침몰의 징조를 외면한 선사, 과적 운항과 고박 불량을 방조한 화물하역 관계자, 뇌물을 수수하고 운항 검사와 관리를 부실하게 한 한국선급, 운항관리자 등 총 38명을 기소했다. 하지만 당시 박근혜 정권의 수사외압으로 참사 당일 현장에 출동했던 123정장 외에 해경지휘부는 기소되지 않았다. 중간수사결과를 통해 세월호참사 당시 승객들이 긴급 대피해야 할 시간에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이 울려 펴졌다는 것이 알려지자, 피해 가족들과 시민은 참사의 온전한 진실을 밝혀야 할 필요성을 가슴깊이 느꼈다.

가족대책위는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논의하고 2014년 5월 6일 안산에서 세월호 특별법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5월 22일에는 600여 개 단체가 함께하는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가 출범하여 전국적인 서명운동을 진행했고, 서명을 시작한 지 한달여만에 서명인원이 100만명을 돌파했다. 피해자들의 국회 농성, 전국순회버스 등을 거쳐 350만명의 서명을 모으고 '세월호참사 특별법'을 청원 입법하게 된다(서명을 종료한 11월에는 최종 650만 명에 달했다. 이는 시민사회가 주도하고 기록이 분명히 남아있는 서명 운동 중에서 가장 많은 수가 참여한 운동이며 아직 기록이 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야 합의는 지진했다. 이틀 뒤인 7월 12일 가족대책위는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국회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유민아빠 김영오씨는 광화문에서 46일간의 단식을 결행했다. 시민들의 릴레이 동조단식 참가자 수는 점차 확대되어 9월 말까지 5000여명이 참가했고 8월 30일 마무리된 온라인 동조단식 참가자 수는 총 2만7000명으로 집계되었다. 결국 국회는 여야합의안을 수용하기로 결정하여 11월 7일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기소권과 수사권한을 가지진 못했지만 최종적으로는 특별검사 요청 권한을 지닌 독립적인 특별조사위원회였다. 또한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단일 재난참사를 다루는 독립조사위원회였다. 참사 206일, 가족대책위의 국회 농성 119일, 광화문 농성 117일만이었다. 피해자와 시민의 노력으로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는 첫걸음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특별법에 따라 출범한 세월호 특조위는 발족 초기부터 정부의 조직적 방해에 직면했다. 시행령 개악, 예산·인력 차단, 자료 미제출이 이어졌고, 이에 맞서 시민들은 416시간 농성, 도보행진, 촛불문화제를 통해 저항했다. 발족 준비 9개월만인 2015년 9월 14일에야 비로서 조사사건 신청을 접수하기 시작했지만 11월 23일 대통령 업무 적정성 조사를 의결한 후 정권의 사주('해수부 지침 문서)를 받은 여당 특조위 의원들의 집단사퇴행동 등으로 조사활동 기간 내내 파행을 겪었다. 결국 특조위는 3차례의 청문회만 개최한 후 2016년 9월 30일 사실상 강제종료되었다.

탄핵과 세월호의 인양

 인양 된 세월호가 2017년 3월 31일 오전 전남 목포신항에 반잠수정에 실려 정박해 있다.
인양 된 세월호가 2017년 3월 31일 오전 전남 목포신항에 반잠수정에 실려 정박해 있다.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그러던 중,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태가 드러나면서 전국에 촛불이 타올랐다. 박근혜 세월호 7시간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하던 언론들이 참사 당일 비선진료의혹을 시작으로 최순실 PC, 블랙리스트, 이대 미래라이프 대학 등을 고발하며 국정농단을 밝혀낸 것이다. 2016년 10월부터 시작된 광장에서, '세월호'는 광장의 중요한 키워드였다. 유가족과 시민들은 광장을 가득 메우며 '진상규명'과 '박근혜 하야'를 외쳤다. 한편에서는 그 구호를 실천하기 위해, 특조위 종료로 중단된 진상규명을 이어가기 위해 4.16국민조사위원회가 자발적으로 구성되었다.(2017년 1월) 참사 피해자, 시민단체 활동가, 연구자, 특조위 조사관 출신들이 모여 전 특조위 활동의 자료와 판례들을 수집, 정리, 분석하면서 민간 차원의 진상규명 노력을 이어갔고 약 1년 2개월간 활동 뒤 사참위 발족을 앞둔 2018년 3월에 종료했다.

2017년 3월, 박근혜 파면 후 새정부 탄생과 함께 세월호는 인양되었다. 전 박근혜 정권이 인양을 약속했었으나 인양방식이 변경되며 미루어지다가, 3년 만에 이루어진 인양이었다. 2016년 4월 총선으로 새롭게 구성된 국회는 2017년 3월 2일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이하 선체조사특별법)>를 통과시켰고 선체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세월호 인양과 함께 미수습자를 수습하고 선체 침몰 원인을 조사하기 위한 작업을 착수했다. 세월호 가족들은 인양작업과 그 이후의 미수습자 수습 및 선체조사 과정을 현장에서 집중 감시했다.

선체조사위원회는 1년 1개월 간 조사활동을 통해 세월호 내 모든 수밀문이 열려 있었다는 점을 찾았고, 차량 블랙박스를 복원하여 이를 통해 쇠사슬의 기울기로 급선회 등을 발견했다. 2018년 8월, 선조위는 짧은 조사기간으로 인해 침몰원인을 종합하지 못하고 여러 가능성을 열어둔 채 내인설과 열린안으로 나뉜 결과보고서 발표하며 조사를 종료했다. 미수습자 수습은 선체조사위원회가 활동을 마친 후까지 지속되다가 2018년 10월 19일 공식종료되었다. 최종적으로 단원고 조은화, 허다윤, 고창석 교사, 이영숙 등 미수습자를 찾았다. 그러나 단원고 남현철·박영인, 양승진 교사, 권재근·혁규 부자 등 5인의 흔적은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2022년 사참위 활동종료에 따른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기자회견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종료에 따라 4.16가족이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2년 사참위 활동종료에 따른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기자회견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종료에 따라 4.16가족이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4.16연대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선조위의 미완된 진상규명 과제는 2018년에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로 이관됐다. 가습기살균제참사와 세월호참사를 함께 조사하기 위해 꾸려진 사참위는 2018년 12월에 조사 활동을 개시하여 2022년 6월까지 3년 6개월간 조사 활동을 펼친 후 진상규명, 피해지원, 안전사회 건설에 관한 세 권의 보고서와 종합보고서를 발간하고 정부와 국회가 이행해야 할 권고사항을 발표했다. 이때 '왜 구하지 않았는가', 해경의 구조방기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참사 직후 국가에 의해 피해자에 대한 탄압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도 상세히 다뤄졌다. 다만 마찬가지로 침몰원인에 대해서는 결론내리지 못했다.

국민고소고발운동과 세월호 특별수사단 구성

해경의 책임에 대한 조사는 사참위에서 이뤄지고 있었으나, 참사 초기 수사외압으로 인해 그들의 책임을 묻는 수사나 재판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세월호 5주기를 맞은 2019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 주요 책임자들에 대한 책임을 묻는 세월호 특별수사단 구성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20만명을 돌파했다. 5년이나 지났음에도 진상규명 뿐만 아니라 책임자처벌에 대한 열기는 뜨거웠으나 청와대는 아직 특수단을 얘기할 단계가 아니고 사참위 활동을 지켜보자고 국민청원에 답변했다.

그러나 핵심책임자인 해경지휘부 등에 대한 기소는 더이상 늦춰져서는 안될 일이였다. 2019년 11월 4.16가족협의회와 4.16연대는 민변 세월호TF 소속 변호 사로 구성된 소송대리인들과 더불어 전면재수사를 요구하는 국민고소고발운동에 착수했다. 피해자 가족 377명의 고소인과 국민 5만4천39명이 고발인으로 참여하여, 박근혜·황교안·김기춘 등 정부 책임자 5명, 현장 구조 및 지휘 세력 16명, 세월호 참사 조사 방해 세력 10명, 세월호 참사 전원 구조 오보 보도 관련 8명, 세월호 참사 피해자 비방 및 모욕 관련자 3명 등 총 40명을 검찰에 고소·고발했다.

이런 노력은 검찰 세월호참사 특별수사단 구성으로 결실로 이어졌다. 검찰 특수단은 1년 2개월의 수사를 벌여 해경지휘부 11명과 특조위 활동을 방해한 9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그외 언론 외압, 수사 외압,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 등에 대해서는 모두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해경지휘부 2심 무죄선고에 대한 4.16연대와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입장발표 기자회견 2025년 2월 7일 해경지휘부 2심 무죄선고에 대한 4.16연대와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입장발표 기자회견이 고등법원 앞에서 열렸다.
▲해경지휘부 2심 무죄선고에 대한 4.16연대와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입장발표 기자회견 2025년 2월 7일 해경지휘부 2심 무죄선고에 대한 4.16연대와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입장발표 기자회견이 고등법원 앞에서 열렸다. 4.16연대

미완된 책임자 처벌

이 때의 기소를 포함하여 당시 해경/청와대 주요 책임자들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졌지만, 그 결과는 대부분 무죄로 끝이 났다. 2023년 11월, 해경이 퇴선 지시를 하지 않은 데 대해 대법원은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는 이유로 전원 무죄를 내렸다. 세월호참사 당시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에, 재난상황시 청와대가 컨트롤타워라는 부분을 불법으로 삭제한 김기춘에 대해서도 무죄가 판결됐다. 세월호 특조위가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청와대 세력들 또한 2인(조윤선, 윤학배) 외에 전원 무죄로 대법원이 진행중이다. 기무사의 유가족 사찰 사건에서는 주요책임자에게 2023년 실형이 내려졌으나, 2024년 초 상고 취하 후 곧바로 사면이 단행되었다. 현재 진행 중인 재판으로 세월호 특조위 조사방해 세력에 대한 대법원 판결과 임경빈 군 해경구조지연 건에 관한 민사소송 건, 국정원 자료 비공개에 대한 행정소송 건 등이 남아있다.

10년의 진상규명, 역사를 쓰다

세월호 참사 이후, 진실을 찾는 여정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초기 정부 수사와 조사는 핵심 책임자들을 비켜갔고, 중요한 증거는 사라지거나 공개되지 않았다. 대통령 기록물은 봉인되었고, 해경의 레이더 영상과 같은 핵심 자료는 끝내 열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피해자 가족과 시민들이 힘을 모아 만들어낸 독립조사기구는, 기대와 달리 수많은 방해에 부딪혔다. 1기 특조위는 예산과 인력, 권한이 제한된 채 출발했고, 활동 기간조차 충분히 보장받지 못한 채 종료되었다. 이후 활동한 사참위는 자료 제출 거부와 공소시효 등에 시달려야 했다.

진상규명을 방해하기 위해서 혐오가 동원되었고 그 부담은 오롯이 피해가족이 감당해야 했다. 진상규명은 반복해서 '정쟁'으로, '세금낭비'로 몰렸다. 사법부의 판단 역시 피해자 시선보다는 보수적인 법 해석에 머무른 경우가 많았고, 민사상 일부 국가 책임은 인정되었지만, 형사상 책임을 묻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진실이 있다. 우리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함께 열어가며, 재난 참사의 진실을 찾아가는 방법을 꽤나 멋지게 개척해왔고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갈 것이라는 점이다.
유례 없는 규모의 서명운동, 국내 최초로 세 차례나 만들어진 재난참사에 관한 특별조사기구, 피해자와 시민이 함께 시도한 국민조사기구와 국민고소고발운동, 그리고 10주기를 맞아 출범한 진실책임포럼까지. 만약 '재난참사 진상규명'이라는 역사책이 있다면 가장 밑줄치고 별표쳐야 할 역사의 순간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쓰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세월호참사 이후 다양한 전문가와 시민들의 재난참사 조사역량이 크게 성장해왔고, 이는 이후 반복된 재난참사들에 대한 국가조사나 민간조사를 가능하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 최근 박근혜 전 대통령의 7시간과 관련한 대통령기록물 공개 취지의 대법원 판결은, 오랜 시간 피해자 곁을 지켜온 시민들의 노력이 결국에는 의미 있는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그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의 접근권이 보장되는 것을 우선한다는 점도 중요한 변화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국민 모두에게 '진실을 알 권리'가 있으며 그 권리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게 된 것은 4.16운동의 커다란 결실이다.

노란리본이 바닷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노란리본이 바닷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노란리본이 바닷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노란리본이 바닷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4.16연대

진실찾기는 나선형이다

되돌아 보면, 진실을 찾기위해 시작한 길에서 만난 연대는 상상치 못할만큼 컸고, 그 연대는 지금도 변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렇다면 10년 이후 다시 맞이한 1년, 우리가 앞으로 해나가야 할 진상규명은 무엇일까?

앞서 '진상규명'이라는 구호가 과거를 밝히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정치적 선택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우리가 진상규명을 통해 나아가야 할 사회는 결국 모든 생명이 존중받는 '생명안전사회'일 것이다. 사실을 바탕으로 진실을 구성하고, 거기서 교훈을 도출해내는 진상규명운동은 곧 생명안전사회 건설운동의 전제이자, 핵심이다.

최근 생명안전기본법이 재발의되며 '생명존중 안전사회 건설'이 구호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법·제도 개혁이나 풀뿌리 지역사회 운동의 실천으로 구체화 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서 '진실을 다 밝히기 전인데, 안전사회를 이야기해도 되는 걸까?'는 질문이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한다. 아직 침몰 원인이나 해경 대응의 구체적 사실도 충분히 확인되지 않았고 대통령기록물도 열람되지 않았다. 이 질문은, 시민으로서 온전히 진실을 밝히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더 이상 피해자의 고통을 축소하거나 조급하게 다루지 않으려는 책임감 있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진실을 찾고, 합당한 책임을 물음으로써 안전사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참이다. 그러나 꼭 반드시 순차적이고 직선적인 흐름으로만 이뤄져야 할까? 이를 답하기 위해 우리는 '온전'한 '진실'이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말하는 '진실'은 단순히 '사실의 총합'만을 뜻하지 않는다. 진실은 사실에 대한 주관적 해석과 관점을 통해 구성되므로, 절대적이고 온전한 진실에 도달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특히 '온전함'은 도달할 수 있는 상태라기보다는 우리가 끊임없이 지향해야 할 가치에 더 가깝다.

만약 언젠가 모든 기록들이 공개되어 '이제 모든 진실이 밝혀졌다'고 생각되는 그날을 떠올려보자. 그때 우리는 진상규명을 멈출 수 있을까? 아니라고 답한다면 그것은 진상규명이 단순히 사실을 밝히는 데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진상규명은 '어떻게' 사건이 벌어졌는지 사실들을 확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왜' 그러했는지 분석하고 사회적 교훈을 구성해내는 해석의 작업이다. 그리고 그 해석은 시대와 맥락이 변화함에 따라 당사자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구성될 것이다. 따라서 시대가 요구하는 교훈을 재창출해내며 진상규명은 지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모든 사실이 다 밝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미 밝혀진 사실에 대한 실천과 변화의 시도를 유보해도될까? 진상규명의 목적을 다시 되짚어보면, 진상규명의 의미는 객관적인 사실을 하나하나 확보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이미 밝혀진 사실들을 토대로 해석하고, 그 해석을 통해 사회를 바꾸는 교훈을 도출하는 것이야말로 진상규명의 본질이다. '사회를 변혁하겠다는 정치적 선택'으로서 진상규명을 외쳤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무엇이 구조적으로 바뀌지 않았는가?"라는 물음은 일부 사실에 대한 해석의 과정을 통해 지금도 시작될 수 있다. 적어도 '국가는 구하지 않았다', '피해자 권리를 침해했다'는 진실을 우리가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국가에게 안전권이라는 책임을 지우고 피해자 권리를 확립하기 위한 해석을 만들어나가는 일과 꾸준히 문제제기하는 일이 가능하다. 객관적인 사실을 찾는 것 뿐만 아니라, 기존에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진실을 구성하고 사회의 부조리한 부분을 들춰내고 더 썩은 지점까지 찾아내어 고발하는 것 또한 진상규명이며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손을 맞잡고 있는 4.16시민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있고 그 사이 노란리본이 있다.
▲손을 맞잡고 있는 4.16시민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있고 그 사이 노란리본이 있다. 4,16연대

물론 아직 대통령기록물 및 군/국정원 등 미공개 자료의 공개를 통해 기록을 찾고 사실을 확인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이는 운동을 시작하고 지속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운동이다. 하지만 10년 동안 수많은 피해자와 시민들의 노력으로 밝혀낸 사실들 또한 적지 않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의 사실을 지속해서 찾음과 동시에, 이를 넘어 '왜'라는 구조적 질문으로 나아가고, 그 물음에 대한 해석을 통해 어떤 사회로 나아가야 할지를 모색하는 것을 함께 하는 것이다. 이는 10년 그리고 다시 맞는 1년에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진상규명운동과 생명안전운동은 선형적인 관계라기보다는 나선형처럼 서로를 확장시키는 구조에 가깝다. 진실을 밝히는 노력과, 밝혀진 진실을 바탕으로 실천을 시도하는 일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함께 갈 때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된다.

그 실례로 생명안전기본법 내에는 상설적인 중대재해조사기구 설치 조항이 담겨 있다. 이는 '우리같이 길 위에 서는 피해자가 없었으면'하는 세월호 가족들의 마음을 담은 제도적 정책이다. 진상규명의 과정이 안전사회운동의 핵심이 되었으며, 그 운동의 결과로 진상규명을 지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안전사회운동은 진상규명의 끝이 아니라, 그 진실을 일상의 변화로 연결하겠다는 확장된 실천이다. 세월호참사 11주기,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밝혀야 할 것들을 밝히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이미 밝혀진 진실을 바탕으로 해석하고, 기억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게 진상규명은 과거를 밝히는 일에 그치지 않고, 미래를 바꾸는 힘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난 10년이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커다란 연대의 힘으로, 더 넓은 방식으로, 진상규명을 지속해나갈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4.16연대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다.세월호참사 11주기를 맞아, 10주기에 발행된 <4.16운동 중장기전망보고서>를 바탕으로 지난 11년간 우리가 함께 만들어 온 운동과 가치는 무엇이었는지 그 의미를 되돌아 보려 합니다. 이 글은 4.16연대 사무처 활동가들이 함께 작성하였습니다.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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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약칭 4.16연대)는 세월호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생명이 존중받는 안전사회 건설을 위해 세월호 피해자와 시민들이 함께 만든 단체입니다. 홈페이지 : https://416ac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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