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기억하는 자가 없으면, 진실은 두 번 죽는다"

[인터뷰] 인혁당사건 사형수 8인의 약전 <다시, 봄은 왔으나> 저자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등록 2025.05.03 15:15수정 2025.05.03 15:19
0
원고료로 응원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은 최근 '인혁당재건위 사건 사형수 8인의 약전' <다시, 봄은 왔으나>를 펴냈다. 1975년 4월 9일,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8명의 젊은이가 사형대에 올랐다. 비극의 그날, 한국 현대사 한복판에 깊고도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새겨졌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흘러, 우리는 다시 묻는다. "그들의 봄은 정말 왔는가?" 이 책은 '잊힌 봄'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저자는 10여 년에 걸쳐 45인의 생존자, 유가족, 동료들의 증언을 모았다. 불태워진 기록 대신, 살아남은 기억의 조각을 꿰어낸 이 거대한 구술사작업은 단순한 추모가 아니다. 이 책은 "기억하는 자가 없으면, 진실은 두 번 죽는다"는 다짐이자 선언이다. 아래는 지난 24일부터 30일까지 저자와 이 책과 관련해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책표지
책표지 삼인

- 먼저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재단에 사료실장으로 입사할 때부터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다만 처음에는 각 개별 열사들의 평전을 만들려고 하다 여러 이유로 인해 그 작업은 어렵게 되었고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이 책이다."

- 이 책을 쓰면서 가장 안타깝고 어려웠던 일은?

"기록이 많이 유실되었다는 것이다. 우선 이 사건을 조작했던 주체인 공안기관들이 관련 사료를 많이 삭제한 것과 항상 위험을 감수하며 변혁 운동을 해야 했기에 보안에 철저할 수밖에 없었던 분들이기에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어려웠던 일은 50여 분 인터뷰를 하는 동안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았다. 그것을 다 책으로 옮길 수 없다보니 선별해야 했다. 그 과정이 제일 힘들었다."

 저자 이창훈
저자 이창훈 이창훈

-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 등을 골자로 하는 특별선언을 발표하며 1인 독재 집권을 영구화하기 위한 유신쿠데타를 일으켰다. 1974년 박정희는 유신독재에 대한 국민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인민혁명당'이라는 명칭에서부터 모든 내용을 고문조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75년 4월 8일,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사형이 선고된 지 채 18시간 만인 4월 9일 새벽에 사형을 집행했다. 왜 박정희는 이렇게 급하게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나?


"당시 박정희는 위급했다. 국제사회 압력이 대단했다. 그래서 1975년 1월에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을 대부분 풀어 주었는데, 풀려난 대학생들이나 지학순 주교와 같은 분들을 환호하는 인파를 보고 박정희가 분노했다. 실제로 신문기사에 박정희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자들이 마치 개선장군처럼 만세를 불렀다'고 말했다는 부분이 나온다. 10년 동안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자가 자신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고 참지 못했던 거다.

정의롭지 못한 세력은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기상천외한 짓거리들을 많이 한다. 게다가 대법원 판결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사형을 집행한 것은 이미 계획된 일이었다. 사형집행명령서를 보면 하루 전 8일에 있었던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작성된 흔적이 있다. 그것은 사형확정 후 또다시 벌어질 구명운동을 사전에 막아보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 이날 억울하게 사형당한 8분이 어떤 분들인지?

"이 분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성장기에는 혼란스러운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다가 4.19혁명이 난다. 이 시기 부산에서 결성된 고교생 사회과학 서클 암장 회원들은 드디어 화산 분출이라는 거대한 시작을 실천에 옮겼다. 또한 대구에서는 어느 지역보다 먼저 한국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국전쟁피학살자유족회 활동이라든지, 교원노조결성투쟁, 2대악법반대투쟁 등이 모두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투쟁의 중심에 있었던 20,30대 젊은 활동가들이 바로 인혁당 사형수들이었다. 이러한 투쟁경험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3선 개헌을 해서 대통령이 되고 유신쿠데타를 일으켜 종신집권을 하는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6.3항쟁때도 민청학련사건 때도 이들은 제2의 사월혁명을 꿈꿨으며, 그리고 나면 새사회 건설에 나서겠다는 꿈을 이어가고 있었던 분들이셨다. 이분들의 꿈은 자주독립국가 건설이었다. 해방이 되도 외세를 몰아내지 못하고, 그 외세에 의해 분단과 전쟁이 벌어진 상황을 너무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2007년 1월 23일 무죄판결을 받고 나서. (좌측 여성부터) 고 김진생(송상진선생 부인), 고 이영교(하재완선생 부인), 문정현 신부, 이정숙(이수병선생 부인), 강순희(우홍선선생 부인), 고 신동숙(도예종선생 부인), 유승옥(김용원선생 부인)
2007년 1월 23일 무죄판결을 받고 나서. (좌측 여성부터) 고 김진생(송상진선생 부인), 고 이영교(하재완선생 부인), 문정현 신부, 이정숙(이수병선생 부인), 강순희(우홍선선생 부인), 고 신동숙(도예종선생 부인), 유승옥(김용원선생 부인) 4.9재단

- 사형집행 당하기 직전 가족들이 이들을 구명하기 위해 벌인 활동 중 가슴 아픈 사연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남편들이 다음날 신문에 간첩으로 발표가 된 상황에서 어이없어 하던 부인들이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뜻 있는 목사님들과 신부님들이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시노트 신부님은 지인들 통해 인혁당재건위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가족들을 찾아가 위로하며 구명운동에 함께 해주셨다. 이 분들 도움으로 한국민주화를 위해 가졌던 '월요모임', '목요기도회'에 참석해 인혁당 사형수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을 전했다.

특히 하재완 선생의 부인 이영교, 도예종 선생의 부인 신동숙, 송상진 선생의 부인 김진생 님들은 대구에서 서울까지 오가며 숱한 시간을 거리에서 보내야 했다. 이렇게 사형수의 부인들이 종교계 정치계 등 사회 인사들을 만나며 구명활동을 벌여나가자 부인들을 연행, 협박하며 '더 이상 남편의 구명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하라고 강요했다. 특히 한 부인에게는 환각제를 탄 물을 주고 서명을 강요했다. 그 부인은 남편이 아직도 감옥에 있는데 서약서를 작성한 게 너무도 억울해 자식들과 함께 약을 먹고 죽으려 했다는 사연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구명운동보다 더 힘든 일은 어린 자식을 돌보는 일이었다. 구명운동을 위해 자주 집을 비우다 보니 어린 자식들을 돌 봐줄 사람이 없었고, 그런 아이들이 거리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빨갱이 자식'이라고 놀림을 받는 일이 자주 있었으며, 심지어 가짜 권총을 들이대며 사형 시킨다고 큰소리를 치는 못된 놈들도 있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 8분이 억울하게 어느 날 갑자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후 그 가족들은 어떤 삶을 살았나?

"남편을 잃은 이들에게는 더 무서운 천벌이 다가왔다. 연좌제다. '간첩가족'이라는 딱지는 잘 다니던 직장에서 잘리게 하고, 삯바느질을 하던 부인에게는 일감이 줄어들게 했고, 양장점을 하던 부인은 문을 닫게 만들었다. 가까운 친인척들도 도움은커녕 이들을 멀리했다.

가정살림을 하던 부인은 남편을 대신해 돈을 벌기 위해 학습지를 돌리러 거리로 나섰고, 조그마한 구멍가게라도 열어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했다. 이런 힘든 삶을 더 힘들게 한 것은 공안기관의 감시였다. 집 앞에는 경찰초소가 세워지고, 나라에 큰 행사나 외빈이 방문하면 외출을 금지 당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들의 아픔을 아는 이들의 도움이었다. 구명운동에 함께 했던 신부님들이나 목사님들은 명절이나 생일이 되면 이들을 찾아와 격려와 선물을 제공했으며, 직장을 구해주거나 자녀들 학자금을 보태 주기도 했다. 또 사형수가족들의 아픈 사연을 국제엠테스티에 알려 회원들이 스스로 나서 격려편지를 보내거나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이런 구원의 손길 덕에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자녀들은 잘 성장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녀들도 있었다. 아버지 죽음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자녀들은 그 트라우마에 갇혀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거나 심지어 생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아픔으로 인해 유가족들은 2007년 1월 법원에서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고 기뻐하기는커녕 '내 남편을 살려내라. 왜 죄 없는 사람을 죽였냐'며 통곡했다."

 대검찰청이 작성한 도예종씨의 ‘형 선고통지’. 사진 아래 두 개의 도장을 보면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가 접수한 시각이 '4월 8일 3시'이고, 서울구치소가 접수한 시각은 처음에는 '4월 8일 14시'로 찍혔다가 '9일'로 고쳐졌다. 즉 대법원 선고가 8일 오후에 있었는데, 그 전에 이미 사형선고통지가 있었고, 서울구치소에서는 8일이 맞다면 역시 대법원 선고가 진행되는 시각에 구치소에 벌써 통고가 된 것이고, 고쳐진 9일이라면 사형이 집행된 다음에 사형선고통지서가 도착한 것이 된다. 이렇게 실제 상황과 맞지 않은 공문이 작성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대법원 형확정 즉시 신속하게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법원절차를 무시한 채 명령을 하달하면서 빚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검찰청이 작성한 도예종씨의 ‘형 선고통지’. 사진 아래 두 개의 도장을 보면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가 접수한 시각이 '4월 8일 3시'이고, 서울구치소가 접수한 시각은 처음에는 '4월 8일 14시'로 찍혔다가 '9일'로 고쳐졌다. 즉 대법원 선고가 8일 오후에 있었는데, 그 전에 이미 사형선고통지가 있었고, 서울구치소에서는 8일이 맞다면 역시 대법원 선고가 진행되는 시각에 구치소에 벌써 통고가 된 것이고, 고쳐진 9일이라면 사형이 집행된 다음에 사형선고통지서가 도착한 것이 된다. 이렇게 실제 상황과 맞지 않은 공문이 작성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대법원 형확정 즉시 신속하게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법원절차를 무시한 채 명령을 하달하면서 빚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4.9재단

- 박정희 독재의 대표적 '사법살인' 희생자인 8분에게 '무죄확정'을 시켜 준 명예회복은 사건발생 1975년부터 32년이 지난 2007년 1월에야 뒤 늦게 이뤄졌다. 그동안의 진상규명과정은 어떠했나?

"아픈 이야기지만은 87년 6월 항쟁이 터지고 우리사회 곳곳에서 민주화바람이 불었다. 항쟁 직후 87년 7, 8월 노동자대투쟁이 있었고 대통령은 직선제로 선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88년에는 분단올림픽을 반대하는 통일운동도 거세게 일어났다. 광주민중항쟁도 국회에서 진실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그리고 박정희 전두환 정권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이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투쟁도 벌어졌다. 이때 인혁당 사형수의 부인들도 남편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나섰다. 그런데 '간첩의 부인들'이 이곳에 왜 왔냐며 냉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처럼 메카시즘이 6월항쟁 이후에도 우리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8년 '소위 인혁당재건위사건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진실을 바라는 유족들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다행이 당시 김대중 정부는 과거 의문사 사건들을 조사하는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고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게 된다. 그리고 2005년에 가해자였던 중앙정보부의 후신 국가정보원에서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었다고 발표하고 재심이 개시되었다."

 지난 2025년 4월 9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4.9통일열사 50주기 추모제' 광경.
지난 2025년 4월 9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4.9통일열사 50주기 추모제' 광경. 4.9통일평화재단

- 윤석열이 지난 해 12월 탄핵 직전 임명한 현재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 위원장 박선영은 박정희가 "독재 안 했다고 할 수 없다. 유신도 했고. 그런데 왜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나라가 달라져야겠다, 제대로 된 국가가 들어서야겠다는 목표가 있었던 것"이라며 평소 박정희 독재를 옹호하고 이에 대한 책도 써서 진화위 직원들에게 배포해 큰 물의를 빚었다. 이렇게 박정희 독재를 열렬히 옹호하는 박선영씨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조언할 생각이 없다. 박씨는 당장 진화위 위원장에서 사퇴해야 한다. 박씨는 대통령에서 탄핵당한 윤씨가 헌법재판관 친인척이라 탄핵을 모면해보고자 임명한 것이다. 박씨는 박정희 전두환을 칭송하는 사람인데 그 정권에서 자행된 인권탄압사건을 조사하는 진화위 위원장으로 임명된 자체가 부당한 것이다. 이제 윤씨도 탄핵된 마당에 뭘 더 기대하나. 조언을 하라면 바로 사퇴하라는 말밖에 없다."

- 이제 6월 3일이면 새로운 정부가 탄생할 것 같다. 새 정부에 인혁당사건과 관련해 바라는 바가 있나?

"1975년 4월 9일을 국제법학자협회에서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칭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불명예스런 그 단어를 그대로 둔 채 단지 그 위에 '무죄'라는 단어를 적어 놓은 꼴이다. 독일 정부는 지금도 나치잔당을 추적해 단죄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인혁당 사건을 무죄로 하고도 그 가해자들을 단 한 명도 처벌하지 않았다. 이는 비겁한 행위다. 국가는 진실화해법을 만들면서 인권침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배상은 물론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적어 놓고 있다. 그런데 배상만 하고 그 외의 명예회복을 위한 일은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 들어설 새 정부는 억울한 죽임을 당한 이들을 위한 명예회복을 위해 나서야 한다."

 4.9통일평화재단 이사장인 문정현 신부가 직접 서각한 재단
4.9통일평화재단 이사장인 문정현 신부가 직접 서각한 재단 4.9재단
저자 이창훈은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 충북 제천에서 성장해 경희대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경희총민주동문회에 몸담으면서 민족민주운동에 참여해 왔다. 지난 2011년부터는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으로 일하면서 박중기 선생, 시노트 신부, 권양섭 선생, 박정기 선생, 권재혁 선생 등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전기 자료집 백서 등을 펴내는 일에 참여했다. 지난 2015년에는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2020년에는 <김말룡 평전>를 폈다.

다시, 봄은 왔으나 - 인혁당재건위 사건 사형수 8인의 약전

이창훈 (지은이),
삼인, 2025


#인혁당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이 기자의 최신기사 다문화는 먼 나라 이야기일까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고속도로 휴게소 '가득 주유' 결제 피해, 해결 못하는 진짜 이유 고속도로 휴게소 '가득 주유' 결제 피해, 해결 못하는 진짜 이유
  2. 2 윤석열, '부정선거 영화' 관람... 이영돈 "이번 대선도 조작 확신, 불복운동" 윤석열, '부정선거 영화' 관람... 이영돈 "이번 대선도 조작 확신, 불복운동"
  3. 3 백만명이 넘게 본 '우글우글 황어'...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백만명이 넘게 본 '우글우글 황어'...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4. 4 충청 이기면 대통령 보인다...이재명 우세 흐름, 부동층 '주목' 충청 이기면 대통령 보인다...이재명 우세 흐름, 부동층 '주목'
  5. 5 개혁신당 공동선대위원장 "50대 이상 남성, 성직자 빼고 다 룸살롱 가" 개혁신당 공동선대위원장 "50대 이상 남성, 성직자 빼고 다 룸살롱 가"
연도별 콘텐츠 보기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