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성 촉석루에 이르려 주변 따라 걷다 보면 의기사(義妓祠)가 눈에 띈다.
김병모
의기사는 촉석루 앞 의암(義巖)에서 적장(敵將)을 껴안고 남강으로 투신한 논개(1571~1593) 사당이다. 의기사로 가는 길목엔 동백꽃이 논개 입술 되어 피어있는 듯 유난히 붉다. 꽃보다 아름다운 의기(義妓) 논개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일행을 반긴다.
1593년 6월, 진주성 2차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자 진주성 총사령관 격인 황진 장군이 성 밖 상황을 점검하다 왜군 총탄에 맞았다는 비보가 성 안으로 퍼진다. 졸지에 지휘 장군을 잃은 진주성의 조선군은 전세가 급속도로 약화 되고 설상가상으로 북문과 동문이 무너진다.
그 틈을 노린 왜군들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자 후일을 도모하자는 부하들 제안을 뿌리친 창의사 김천일 장군(1537~1593)은 아들과 함께 남강으로 뛰어들고 최경회 장군(1532~1593)도 뒤따른다.
남편 최경회 장군이 남강으로 몸을 던지자 전북 장수 출신으로 알려진 논개는 스스로 관기(官妓)가 되어 적장을 촉석루 연회장 밖 의암(義巖)으로 유인한다. 분노한 논개는 적장을 껴안고 남강으로 투신한다. 그녀는 장군의 여인으로 끝까지 적장을 노린 것이다.
역사는 그녀를 의기(義妓)라 하고, 투신했던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한다. 조선 조정은 촉석루 옆 의기사(義妓祠)를 세우고 그녀의 의로움을 역사에 남긴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1762~1836)도 논개 사당을 보수하는 중수기를 짓고, 매천 황현(1855~1910) 역시 논개의 의기(義妓)를 시(詩)에 담아 새긴다.
발걸음을 멈추고 논개 사당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산홍(山紅)의 시(詩)가 눈에 띈다. 그녀는 진주 관기로서 경남도 관찰사 이지용(1870~1928)이 첩이 돼 줄 것을 종용하자 단호히 친일 매국노의 첩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 시(詩)를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
- 산홍
천추분진의(千秋汾晉義)
쌍묘우고루(雙廟又高樓)
수생무사일(羞生無事日)
기고한만유(笳鼓汗漫遊)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두 사당에 또 누각 있네
일 없는 세상에 태어남도 부끄러운데
피리와 북으로 질펀하게 놀고 있네
이 나라가 흔적 없이 사라져 가고 있는데 지식인들은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는가. 당시 엘리트 층이란 사람들의 세속적 야욕은 여념이 업고 점차 양심의 소리마저 잦아든 세태를 본, 의기 산홍이 자신과 지식인들을 향해 꾸짖고 있는 듯하다.
일행들의 독촉으로 발길을 돌려 촉석루 아래 암벽에 이르자 을사오적 친일 반 민족 행위자 이지용(1870!~1928) 이름이 눈에 띈다. 그의 이름이 암벽에 새겨있다니. 그는 구한말 경남도 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이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으리라 추측된다.
의기(義妓) 산홍이 통탄할 일이다. 저항시인 변영로(1897~1961)가 뒤늦게 나마 1923년 '신생활'을 통해 의기 논개와 산홍을 위로하듯 시(詩)로 화답한다.
논개
-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情熱)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중략>
논개 의기(義妓)가 산홍으로 흐르고 시인 변영로가 그들의 의로움을 시(詩)로 화답하니 세상에 울림으로 다가온다. 의기사를 바라본 사람들의 눈길이 따뜻하다. 꽃길 따라 걷는 연인들 웃음소리가 남강으로 넘쳐 물결도 춤을 춘다. 의기사를 뒤로 하고 나오는 길에 붉은 동백꽃이 눈에 밟혀 발길을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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