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봄 96세 아버지가 새옷을 사시고 기뻐하시는 모습. 오랜만에 같이 사진을 찍었다.
이혁진
어제는 아버지 혼자 안과병원에서 진찰받고 안약을 타왔다며 자랑하셨었지요. 왜 말도 없이 당신 혼자 가셨느냐고, 위험하다고 말해 아버지와 제가 잠시 옥신각신했습니다.
물론 아들인 제게 부담 주기 싫어하신 일이겠지만, 저는 혹시나 일이 생겨 다치셨으면 어땠을까 싶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건강한 편이시지만 청력과 시력이 좋지 않은 편이니, 다음부터는 꼭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아버지의 이북고향 시절과 월남해서 살아온 인생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들을 때마다 실화라는 사실에 흥미롭고 즐겁습니다. 드라마틱한 실향민의 삶은 어쩌면 그 자체가 분단과 엮인 살아있는 역사일 것입니다.
아버지 덕분에 저도 삽니다
매일 저녁 식사를 차려드리면서 아버지께 막걸리 한 잔을 따라 드리는 것도, 아들인 제게는 작은 기쁨입니다. 암 투병 와중에도 제가 용기 잃지 않고 힘을 낼 수 있는 것도 정정한 아버지 덕분입니다.
아버지, 그런데 저 때문에 노심초사할 필요 없습니다. 병이 몸에 들어와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니 지금은 한없이 마음이 편안합니다(관련 기사:
암투병 중 기사쓰기, '살아갈 용기'입니다 https://omn.kr/27b4d ).
이제는 다 커서 결혼한 손자들도 여전히 할아버지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긍지랄까요.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때마다 할아버지를 찾고, 안부를 묻고, 끼니를 걱정하는 모습이 제 눈엔 대견하기만 합니다.
추억만큼 강렬한 것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새긴 추억도 많지요. 애들이 지금도 초등학교 시절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갔던 인천 강화도 여행을 자주 이야기합니다.
애들 말을 들어보면 1박 2일 강화도 여행에서, 처음엔 길을 잃어서 고생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덕분에 강화도 안쪽에서 한강 건너에 있는 할아버지 고향을 가까이 볼 수 있어서 좋은 기회였다고 합니다.

▲ 김포 애기봉, 애기봉에서 강 건너 아버지 고향 개풍군을 직접 볼 수 있다. 애기봉은 실향민의 애환을 간직하고 있다.
이혁진
특히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맺은 유대와 소통으로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애들은 크게 사회적 명예를 얻었거나 성공하진 못했어도, 주위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소질이 엿보입니다.
제 아내 또한 아버지에게 둘도 없는 효부입니다. 최근 아내가 몸이 불편한데도 아버지의 매끼 식사와 의복을 빠짐없이 챙기고 있습니다. 남편 병까지 수발해야 하는 아내에게 저는 늘 죄송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묘소에서도 아버지의 건강과 안부를 전해드렸습니다. 33년 전 천식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웃으며 말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제게 들려왔습니다.
"너희들이 잘해주니 고맙다."
푸른 하늘 저 멀리 계신 어머니도 아버지 어버이날을 축하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도 조용히 어머니께 감사기도 한번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 항암주사를 맞는 사진
이혁진
어버이날은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지만, 두 아들의 부모인 저도 아이들에게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해왔는지 반추해 보는 날입니다. 그간 저는 아프다는 핑계로 애들을 많이 돕지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주어진 앞날에 최선을 다해보자 마음 먹을 뿐입니다.
외람되지만 우리 부부도 건강이 예전만 못해 아버지로부터 위안을 얻고 희망과 용기를 품기도 합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 힘이 되고 있습니다. 이게 가족의 또 다른 존재이유이기도 하겠지요.
가정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우는 5월입니다. 저는 아버지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하는 인생이 아름답고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내리사랑이 당연하다며 소홀히 생각하거나 행동한 적은 없는지 반성해봅니다.
5월엔 이런저런 가족모임이 있을 듯합니다. 빠짐없이 모두 아버지를 모시고 가고 싶은 생각에, 제 마음이 괜스레 급해집니다. 아버지와의 행복한 시간과 멋진 추억을 기대합니다.

▲ 어버이날은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지만, 나도 아이들에게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해왔는지 반추해 보는 날이다.(자료사진)
kevindelvecchio on Unsplash
자식들은 어버이날이라고 특별한 날을 정해 부모를 모시고 기리지만, '내리사랑'이라 하는 부모의 자식사랑은 한결같다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아버지! 오늘 어버이날, 다시금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고 오래도록 늘 저희 곁에 계셔주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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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 96세 아버지께 70세 아들이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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