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동네풍경
박철순
잠시 달리던 차를 나이든 나무 근처에 세웠다. 그 나무 아래 길게 뻗은 가지가 가리키는 오래된 의자. 그 위에 앉은 어르신 한 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저… 혹시 몇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어르신은 의외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래 뭐?"
낮은 목소리였다.
세월의 진득함이 묻어 있었다.
"이 동네 오래 사셨어요?"
"뭐… 한 10년? 20년쯤 됐나. 고향은 아니고."
"그래도 변하는 걸 좀 보셨겠네요."
"그렇지. 내가 올 때만 해도, 저기 산 너머까지도 온통 논 밭이었지."
"이사 오신 이유가 있으셨어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었지. 은퇴하고 나니까."
남양주 농촌 지역에는 이렇게 은퇴 후 평온을 찾아 이주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내방3리 주민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보통 집과 얼마간의 땅이 자산의 전부인 경우가 많다. 직접 영향을 받지 않는 동네에 사는 이들의 시선은 어떨까?
"골프장을 짓든 말든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사람이야."
예상치 못한 대답에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결국 모든 갈등의 중심에도 사람이 있다. 반대를 하든 찬성을 하든, 그 뿌리는 같다. 사람 답게 살고 싶다는 마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어르신은 긴 담배 연기를 뿜어져 나왔다.
"나도 뭐 자세히 는 몰라. 그 동네 사람들 데모 한다고 고생도 하고, 분위기도 험해졌다고 하더라고."
산을 바라보던 눈이 잠시 흐려졌다.
"사람이 먼저 살아야지. 나이든 사람들 힘들게 하는 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래도 이 일대가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질문은 조심스러웠지만, 어르신은 담담하게 받았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어. 우리 동네 일이 아니기도 하고. 우리 아들은 좋아하더라고. 그런데 말이야, 내가 예전에 큰 사업도 해봤는데 그때 배운 게 있어. 남 눈물 나게 하고 번 돈은 오래 못 가. 내가 얼마나 더 산다고 그런거 까지 바라나."
허허롭게 웃는 노인의 등 뒤로 나무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다. 바람이 불자, 그 그늘이 조용히 미소 짓는 듯했다.
"근데, 젊은이는 뭐 기자라도 되는 거야? 이리 와서 마실 거라도 한잔하지?"
'젊은이'라는 말에 괜히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그러면 좋은데요, 다른 분들도 좀 더 만나 뵈려고요.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 차에 올랐다.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타인에게 곁을 내어주는 일, 그건 결국 사람을 믿는 일이고 어쩌면 사람을 사랑할 때 가능한 일이리라.
3. 허기가 밀려왔다
조금 더 달리자 문득 허기가 밀려왔다. 다이어트고 뭐고, 팔자에 없는 기자 노릇을 하려니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다. 길가에 보이는 한가한 식당 앞에 차를 세웠다. 바랜 간판과 뿌옇게 먼지가 내려앉은 창문이 나를 반겼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노포 특유의 익숙함이 다가왔다. 반찬 냉장고 위엔 테이프로 붙인 가격표가 흔들리고, 묵은 장국 냄새와 기름 냄새가 섞여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스쳤다. 엄마 손을 잡고 동네 식당을 가던 때.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빈자리가 많았다. 경기 탓일까, 아니면 늦은 오후라서일까. 국밥 한 그릇을 시키고 벽에 붙은 달력을 바라보았다. 큼지막한 농협 로고가 인쇄된 익숙한 달력이었다.
밥을 기다리며 점원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사장님이세요?"
"아니에요. 그냥 알바죠."
"그럼 수동 사세요?"
"살죠. 여기 오래됐어요."
말은 짧았지만 무뚝뚝하지는 않았다. 다만 낯선 이와의 대화에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혹시 내방리에 골프장 들어온다는 얘기 들으셨어요?"
"듣기야 하죠. 아직도 확정 안 났나?"
"혹시 땅 보러 오셨어요?"
"아뇨, 그냥 사람들 얘기 듣고 있어서요."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야 어려운 건 모르고. 골프장 생기면 길도 여러 갈래로 뚫리고, 가게도 좀 살아나지 않겠어요?"
"자주 가보셨어요? 그쪽은."
"가끔 지나치긴 했죠. 근데 아는 사람도 없고. 여기가 고향도 아니고요."
"그럼 골프장 오는 손님들한테 내놓을 비장의 메뉴 같은 건 없어요? 국밥 말고요. 다음엔 그걸 먹어야 할 것 같아서요." 실없는 농담에 아주머니가 슬며시 웃었다.
"어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냥 다 맛있어요."
그 웃음은 묘하게 씁쓸했다. 개발에 대한 욕망은 현실을 이기지 못할 때가 많다. 소비와 자본의 논리는 '다 맛있다'는 말로는 굴러가지 않는다.
희망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남의 희망을 짓밟고 세운 꿈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국밥 한 숟갈 떠 넣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돈만 있으면, 이 동네 계곡 좋은 데 묻혀 살고 싶어요. 진짜 좋은 동네더라구요. 하하."
4. 걸었다.
식당 문을 열고 나서는데 한낮의 바람이 조금 덥게 불어왔다. 부른 배를 어쩌지 못해 걸어 보기로 했다. 차를 타고 오가던 길을 걷는 것도 의미가 있다. 잠시 시간을 내어 걸으면,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된다. 가끔은 낯선 냄새, 이름 모를 꽃을 만나는 행운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조금 넋을 놓고 걷다가 투닥이며 놀고 있는 형제를 만났다.
"애들아, 내방리가 저 쪽 방향이 맞지?"
"맞아요."
바쁜 아이들의 대답이 돌아왔다.
"형은 가봤는데 저는 입구까지만 가 봤어요. 거기 뭐가 생긴다고 막 써있던데."
"골프장?" "아 맞아요. 골프장!"
형에게 물었다.
"골프 치는 건 본 적 있니?"
"TV에서 봤어요. 재미는 없어 보이던데. 근데 다 지었어요?"
골프장 논의가 시작된 지도 거의 5년이 지났다. 전략환경영향평가 초안에 대한 공청회도 오래전에 끝났다. 그래서 인지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 사이에서도 이미 '지어진'듯 말하는 이들이 많다.
"아직은 아닌데, 너희는 골프장이 생겼으면 좋겠어?"
"몰라요."
당연하겠지. 아이들에게 실없는 걸 물었다. 이만 인사하려고 돌아 서려는 데, 막내 녀석의 말이 발목을 잡았다.
"친구네 할아버지가 거기 사시는데... 이사 가실지 모른 데요. 그럼 친구가 올 일이 줄어들 건데, 그건 싫어요."
그렇지.
개발이란 그런 것이다.
새로운 사람을 불러 오기도 하지만 살던 사람을 밀어내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개발은 더 좋은 삶의 기회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보금자리를 잃는 고통이다. 그 간극을 줄이고 밀려나는 이들을 지키는 일. 그건 정치와 행정의 몫이어야 한다.
5. 돌아서며

▲풍경02 동네풍경
박철순
다시 차에 올랐다. 풍경 만큼이나 다양한 삶이 창밖으로 스쳐갔다. 인간은 저마다 생의 무게를 지고, 헤아릴 수 없는 이유를 안고 매일을 살아낸다. 그래서 아프고, 그래서 소중한 것이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삶과 집을 지키기 위해 무모한 개발을 반대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찬성하거나, 혹은 무관심하다. 결국 사람이 다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사람에게 무엇이어야 할까.
반대하는 주민들을 장애로 여기고, 8천명으로 추산되는 수동면 주민들 중에 몇 퍼센트가 반대하느냐고 따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퍼센트로 환원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의 진심이 만나 숲이 되고, 냇물이 되어 흐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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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장 짓든 말든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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