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하 송진우의 손자로서 유족 대표인사를 전하는 송상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이호인
위기의 보수, '송진우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일부 진보 역사학계에서는 고하 송진우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식민지 시기 '자치론'과 '민족개량주의'에 가까운 입장, 그리고 해방 후 보수적이고 친미적인 한민당의 영도에 대한 지적은 일정 부분 타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고하 송진우가 재조명받아야 할 이유 역시 분명하다.
첫째, 그는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말기, 태평양 전쟁의 광풍 속에서 조선총독부의 극심한 압박을 받으면서도 칭병을 이유로 칩거하며 어떠한 친일 행위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이는 절친한 관계였던 인촌 김성수(1891~1955)가 같은 시기 학병 지원 독려 기고 및 연설 등으로 친일 논란에 휩싸인 것과 뚜렷이 대비되며, 고하가 민족의 자존과 자유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둘째, 그는 통합의 리더십을 지녔다. 3·1운동 당시 기독교 세력의 참여를 주도했으며, 1931년 만보산 사건으로 한중 간 민족감정이 악화되었을 때는 진상을 보도해 조선과 중국 민중 간의 화해를 도모한 고하 송진우는 해방 이후에 사회주의 계열의 김약수, 원세훈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당하는 등 '우파 빅텐트'식 연합정당 모델을 실현하고자 했다. 비록 고하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한민당이 급격히 우경화되었지만, 고하 생전의 한민당은 이념을 넘어 민족 통합을 지향했던 정당이었다.
셋째, 그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확고한 '자유민주주의' 신념을 지닌 인물이었다. 고하는 해방 정국에서 임시정부 봉대, 미군정 협력,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립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는 좌우 합작을 부정적으로 본 반공주의자였지만, 동시에 경제적으로는 생존권 보장을 중시하며 독점 자본을 비판하는 등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추고 있었다. 1945년 한국민주당 창당 강령에 '경제적 민주주의'를 명시한 것, 그리고 고하가 남긴 글 곳곳에 등장하는 '자유권과 생존권의 조화'라는 개념은 그가 단지 이념적 자유주의자가 아닌, 실천적 자유민주주의자였음을 보여준다.
2024년 12·3 계엄 사태 이후, 한국 사회는 다시금 민주주의의 근간을 되짚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특히 보수 진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혼란과 분열 속에서 정체성의 위기와 노선의 공백을 절감하고 있다. 정의와 원칙 대신 계산과 침묵이 앞섰고, 자유민주주의를 말하면서도 자유도 민주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일부는 부정선거 음모론에 매달리고, 특정 정치인 비판에만 열중하면서도 정작 미래 비전은 제시하지 못한 채, 비겁한 정치에 안주하고 있다.
그러나 고하 송진우는 달랐다. 그는 반공과 친미를 명분 삼아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경계했고, 비판보다 대안을 먼저 고민했고, 외세와 국내 갈등 사이에서 이성적 설계자이자 통합의 조정자가 되고자 했다. 특히 1945년 말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졌을 때, 고하는 격앙된 여론과 정치권의 극단적인 반탁 움직임 속에서도 미군정과의 정면충돌은 피해야 하며, 반탁은 국민운동으로 관철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분명히 했다. 그는 사실 확인도 안 된 오보에 휘둘리지 말고, 감정보다 이성을 앞세워야 한다는 언론인으로서의신념과, 지도자로서의 책임감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그 절제와 품격, 그리고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는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가치다.
오늘의 보수가 살 길은 과거 회귀도, 감정적 반발도 아니다. 갈등을 넘고, 이념의 대립을 뛰어넘어 자유와 통합, 그리고 도덕적 일관성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고하 송진우가 우리에게 보여준 길이자, 오늘날 보수가 마땅히 회복해야 할 길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 디트리히 본 회퍼
역사와 정치에 관심이 많은 20대 수원청년
내일부터가 아닌 이제부터를 모토로 활동중입니다.
공유하기
고하 송진우 탄신 135주년 및 서거 80주년 추모식 개최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