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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5.05.17 10:54수정 2025.05.17 10:54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낯선 것을 볼 때 거부감을 느껴 아예 멀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호기심을 느껴 오히려 가까이 하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단체로 해외여행 가서 식당에 들어가면 그곳 음식을 먹어보지도 않고 들고 간 즉석밥과 고추장을 꺼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주얼과 냄새가 예사롭지 않음에도 서슴없이 젓가락을 들고 맛을 보는 사람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런 행동은 예술에도 나타난다.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은 익숙하니까 좋아하면서 난해한 현대 미술은 내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멀리하거나 극단적으로 이건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경우 난 호기심이 조금 더 작동하는 편이라서 작품을 이해하기 어렵다면 작가의 기획 의도를 찾아본다. 대체로 기획 의도를 알면 작품을 이해하는 게 덜 어렵다(여전히 쉽지는 않다).

▲ 리움 미술관 외관
문하연
요즘 현대 미술계의 가장 핫한 예술가 '피에르 위그'가 아시아 최초 서울 리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2월 27일~7월 6일). 그는 프랑스 출신으로 구겐하임미술관, 파리 퐁피두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각종 비엔날레에서 초청받는 가장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사람이다. 특히 2002년 휴고 보스상을 받았는데. 이 상은 영국 터너상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상으로 평가되며,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작품 활동하는 작가에게 수여된다.
'실험적이고 혁신적인'에 방점을 찍고 전시를 둘러보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은 어떤 면이 그러할까? 일단 그의 작품은 영상이나 설치 작품이 많은데, 완성품이 아니다. 전시장 안에서 계속 변화하고 진화한다.
영상 작품의 경우 전시장 곳곳에 설치해 놓은 센서에 의해 관람객의 몸짓, 음성 등 전시장의 환경이 감지되고, 감지된 정보들은 설치된 영상에 실시간으로 영향을 끼치면서 미묘하게 영상들이 변한다. 그러니까 그는 일정한 세계를 만들어 놓고 외부에서 습득된 정보를 최첨단 기술을 통해 다시 그 세계로 집어넣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전시
무슨 말인지 헷갈린다면 일단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가 보자. 전시실에 들어서면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관람객을 맞는다. 그러니 주변 사람과 부딪히지 않도록 온몸의 감각을 세우고 입장해야 한다. 그로테스크한 사운드와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어두운 빛에 이끌려 스크린 앞에 서면 생각지도 못한 기괴한 영상이 펼쳐진다.

▲ 피에르 위그의 리미널 장면들
문하연
여자의 몸을 한 얼굴이 없는 형상이 달 표면 같이 거칠고 황량한 땅을 기어가고 있다. 때로는 몸부림치기도 하고 어떤 알 수 없는 수신호를 보내기도 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지평선을 향해 위태롭게 걸어간다. 또 뭔가 냄새를 맡는 제스처를 취했다가 관람객을 향해 뻥 뚫린 얼굴로 바라보면 으스스하다 못해 등 뒤에 유령이라도 있는 것처럼 한기가 느껴진다.
인간도 아니고 비인간도 아닌 이 형체는 스크린 주변에 설치해 놓은 센서에 의해 주변 환경이 감지되면서 그 감지된 정보는 다시 영상 속으로 들어가 이 형체의 움직임에 관여한다. 그러니까 이 형체는 전시장에서 만들어지는 정보를 학습하고 체득해서 매번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작품이 전시장과 상호작용을 한다니, 정말 실험적이고 혁신적이지 않은가?
이 작품의 제목은 '리미널'로, 리미널이란 "생각지도 못한 무엇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인 상태"를 뜻한다. 이 과도기적인 상태에서는 어떤 생명체도 나타날 수 있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 그러니 긴장감이 높을 수밖에. 게다가 하필 그런 생명체가 얼굴이 텅 빈 여자의 형상이라니 충격적이다.
또 전시장엔 황금색 LED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간간이 출몰하는데 이 마스크는 '이디엄'이라는 작품으로 인공지능에 의해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기이한 언어가 이 마스크를 통해 생성된다. 이 소리는 기계음 같기도 하고 인간의 언어를 흉내 낸 효과음 같기도 한데, 이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다른 행성에 와 있는 듯 낯설다.
작가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관념 속에 존재하는 허구의 것들을 작품으로 만들었고, 이 작품들이 단선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했다. 아마도 그는 관람객에게 기이하고 낯선 환경을 보여줌으로 정형화된 사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에는 그의 작품 12점이 왔는데, 또 다른 그의 작품을 살펴보자.
눈을 떼기 어려운 장면들

▲ 피에르 위그의 휴먼 마스크 장면들
문하연
이 작품은 '휴먼 마스크'로 후쿠시마 주변 폐허가 된 도시를 드론이 촬영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19분짜리 영상이다. 한때는 식당이었던 곳으로 보이는 곳에 인간의 마스크를 쓴 원숭이가 있다. 소녀 가면을 쓴 이 생명체는 이곳에서 훈련된 일을 (이를테면 서빙과 같은) 했던 것처럼 익숙하게 이 공간을 헤매고 다닌다. 습관인 양 반복되는 행동을 하다가 불안한 눈동자를 굴리기도 하고 멍하게 멈춰 무언가를 기다리는 모습을 취하기도 한다.
이 영상 또한 예측할 수 없고 몰입감이 뛰어난 작품이라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 그런데 영상이 끝나고 나면 관람객은 혼란에 빠진다. 저 생명체는 진짜 원숭이인가? 아니면 원숭이탈을 쓴 배우인가? 이런 기본적인 궁금증에서 나아가 본질적인 질문인 인간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의 가면을 쓰고, 인간의 옷을 입고 있으면 인간인가. 원숭이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학습된 인간처럼 행동하면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작가는 이 작품에서도 인간도 아니고 비인간도 아닌 생명체가 폐허가 된 도시에 살아남은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재앙 이후 인간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 피에르 위그의 주드람 4
리움 미술관
이 작품은 주드람 4(Zoodram 4)로 수족관이다. 이 수족관에는 조각가 브랑쿠시의 '잠든 뮤즈' 복제품 속에 소라게가 살고 있다. 소라게는 인간의 가면(잠든 뮤즈)을 집 삼아 살아 나간다. 이 작품에서도 작가는 소라게가 사는 세계를 창조해 놓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관해 통제하지 않는다.
소라게가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예측 불가능하고 우연적인 요소에 의해 생존을 지속하느냐, 지속하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 작가에게 '게와 가면'은 각각 '인간이 아닌 존재와 인간의 형상'을 나타내며 두 가지를 함께 살게 함으로써 두 종의 교합을 나타냈다. 생물과 무생물의 교합이라니, 역시나 실험적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작품들은 모두 얼굴이나 가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작가는 가면을 통해 생명체 본질에 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또 내가 가장 신기하게 여겼던 작품은 'U움밸트-안리'라는 영상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안리'라는 인간을 상상하는 누군가의 뇌 활동을 기록한 '뇌-컴퓨터 인터스페이스'에 의해 생성된 이미지다.
1초에도 여러 컷 빠르게 움직이는 이미지들은 전시장 조건에 의해 계속해서 변한다. 그런데, U움밸트-안리에서 추출된 정신적 이미지들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작품이 '마음의 눈'이라는 조형(?) 작품인데 정신적 이미지를 물체로 구현했다니 참신하지 않을 수 없다. 모양도 너무 신기하게 생겼으니 이건 방문해서 확인하시라.
거의 이천 년을 넘나드는 시간 여행
피에르 위그는 어떤 세계를 창조하고 그 세계를 완벽하게 통제하지 않음으로 우연이나 주변 환경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작품을 만들어왔다. 여타의 현대 미술이 그렇듯 관람에 있어 정답은 없다. 이 작품을 작가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혹은 자연과 인간, 자연과 비인간의 경계를 나타내고자 했더라도 관람객이 그것을 보고 다른 감정을 느꼈다면, 그 역시 틀린 감정은 아니다.
리움미술관에서는 이 외에도 삼성 문화재단 창립 60주년을 맞아 현대 미술 소장품전도 동시에 개최하고 있다. 이 전시에는 마크 로스코나 자코메티와 같은 현대 미술을 대표할 만한 작가들의 작품 44점이 전시되고 있는데 그중에 소개할 작품은 이 전시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오귀스트 로댕의 '칼레의 시민'이다.

▲ 여러 방향에서 찍은 '칼레의 시민'
문하연
1347년, 프랑스와 영국이 백년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영국의 도버해협과 가장 가까운 프랑스 해안 도시 칼레는 영국의 집중 공격을 받았고, 끈질긴 저항 1년 만에 항복하고 만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격렬하게 저항한 칼레 시민들을 몰살할 계획을 세웠지만, 협상 끝에 칼레를 대표할 6명의 시민을 처단하는 거로 마음을 바꿨다. 문제는 이 여섯 명을 어떻게 뽑을 것인가 였다.
이때 상류층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가 제일 먼저 나섰고 그 뒤로 지도 계층 5명이 자진해서 합류했다. 당시 영국 왕비는 임신 중이었는데, 만일 이들을 죽인다면 아기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왕을 설득했고, 결국 이들 6명도 풀려난다. 이 사건은 기득권의 도덕적 의무를 나타내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로댕은 이 6명의 시민이 끌려가는 모습을 청동 작품으로 남겼는데, 이들을 영웅적으로 그리기보다 죽음을 앞두고 불안과 공포에 잠식당한 연약한 인간으로 표현했다. 당시엔 이 위대한 영웅들을 평범한 인간으로 표현한 것에 대해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평범한 인간들이 두려움 속에서도 영웅적인 행동을 한 것이라는 해석이 대중의 공감을 이끌면서 논란은 잦아들었다.
이 작품은 관람자와 같은 눈높이에 있어 가까이 볼 수 있으며, 그래서 작품 속 인물들이 느끼는 불안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청동 작품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사실적이고 생생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착각이 들 지경이다. 칼레의 시민은 12개의 에디션이 있는데, 그중 한 개를 리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 고미술전에 전시된 작품들
문하연
내가 생각하는 리움 미술관의 백미는 상설로 전시되고 있는 '고미술전'이다. 피에르 위그와 현대 미술 소장품전은 각각 입장권을 사야 하지만(통합권을 사면 더 저렴하다), 고미술전은 심지어 무료다. 삼한 시대 유물에서부터 가야 금관, 삼국시대 보물들, 고려청자, 분청사기, 백자, 장승업의 회화 등 많은 작품을 볼 수 있다. 특히 큐레이션이 압도적이니 꼭 둘러보길 추천한다.
지금 리움은 2~3세기 작품에서부터 21세기 최첨단 기술이 녹아 있는 작품까지 거의 이천 년을 넘나드는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 현대 미술이 어렵긴 한데, 무조건 멀리하지 말고 일단 젓가락 들고 맛보면 좋겠다. 그렇게 새로운 맛에 눈을 뜨면 즐거움의 폭이 넓어질 테고, 즐거움의 폭이 넓어지면 그만큼 인생이 풍요로워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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